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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8월31일 목요일 8 (제200호) 관향조 종친회 8월의 폭염 속에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 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아버지 의 선비정신과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되새기며지역의학생들이더훌륭하게성 장하길 기대하며 전달되는 호경장학회 제 11회 장학금 전달식이 지난 20일 전남 장 성소재 ‘장원갈비’에서 있어 폭염을 무색 케하는훈훈한정을느끼게하였다. 장학 규모를 떠나 가족 간의 우애와 빛 나는가문의전통이고스란히담겨진이날 행사에는 광주 제일고 3학년 박시우,담양 고 2학년 임지예나, 장성문양고 3학년 김 도훈학생에게전달되어전체24명의학생 이수혜를받았다. 장학회 박택열 회장(광주 금호여중 교 사)은 더 많은 학생에 전달하고 꾸준히 이 어가고싶은생각은변함이없다며훌륭한 학생으로성장하여사회에큰일꾼이되어 주길 당부하고 2009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가더욱그립고그래서어머니를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생신날이 오기 전에 작은 기 쁨이나마함께나눌수있어행복하고감사 하는마음을함께전했다. 호경장학회는 평생 후학을 가르쳐온 필 암서원훈장박래호선생과부인고청심당 심경순 여사의 사재출연으로 형성된 가족 장학회이다. 故 청심당 심경순 여사는 1943년 7월 1 일겸면칠봉리에서농암공(휘한상)과장 흥임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 어나 어려서부터순량하고근면한성품으 로겸면초등학교를졸업한뒤부모님의명 에 의해 가정에서 침선방직(바느질)을 익 힌 뒤 22세의 나이로 태인박씨 가문에 출 가하여유학자노강박래호선생의아내가 되어어려운생활을시작했다. 남편이 객지에서 훈장생활을 하는 동안 엄격한가문의법도에따라고추보다맵다 는시집살이속에극기의정신으로시부모 님을봉양하며자녀를양육하였다. 30세에남편을따라그고향인장성으로 이거한뒤남편이유학자로서경제적책임 을 다하지 못하자 몸소 행상과 품팔이와 삵 바느질을 생업으로 삼고, 좁은 집을 전 전하며 일곱 번이나 이사 를 다니면서 도 오직 근면 검소로 저축 을 하여 3남1 녀의 자식은 모두 대학에 수 학 시 키 면 서 집을 마련 하기도 하였 다. 여사는 남 편이 전국에 알려진 유학 자가 되기까 지 정성으로 내조해 왔으 며 남편의 학 당인 기양정 사(岐陽精舍) 를 세울 수 있는 기금과 후손 교육을 위한 학자금까지도힘써마련했다. 그러나뜻밖에찾아온위암으로투병중 2009년앞서가신시아버님영위에새과실 을 진설한 뒤 하직 인사를 올리고 광주 요 한병원에 입원하여 같 은 해 음력 10월 24 일 향년 67세의 일기로 영면하여 주위를 안타깝게했다. 특히사망에이르러그동안모아온돈과 부의금을 더해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손 교육과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장학금 을전달해줄것을유언으로남겼다. 이에 4남매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유훈 을 받들어 아버지의 이름 ‘호’자와 어머니 의 이름 ‘경’ 자를 따 호경장학회를 설립, 청심당 여사의 기일을 전후로 한 토요일 자녀들과 지역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 달하고, 모든 가족이 한데 모여 장학생 가 족과함께어머니를추모하는시간을갖고 있어청심당여사가보여준정신은이시대 의 진정한 현모양처로 추앙 받고 있는 것 이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장성투데이 백현모 편집국장이 함께 했다.백 국장은 노강 선 생과 30여년전 인연으로 지금에 이른다 고 말하고 항상 마음에 두고 새기고 존경 하는 어른으로 장성 뿐 만아니라 전라남 도에서 살아있는 호남의 참 지식인으로 우리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치신 어른 이라며 가족장학회가더욱더번성하기길 기원한다며축하했다. 호경(鎬敬)장학회제11회장학금전달 식 20일열린호경장학금수장학생들이한자리에모였다.왼쪽부터박태열이사장,임지애나(담양고2), 박시우(광주제일고 3),김도훈(장성문향고3),노강박래호선생. 호경장학금으로 훌륭하게 성 장한 박택열 회장의 딸 정은 양이 박 회장이 지은 노강졸 고발문을읽으며할아버지를 기억한다. 정은 양은 지난해 임용고사 합격 후 올 9월 발령 을 기다리는 예비 선생님이 다. 효자의 이름은 상문(尙文, 1615~1672), 자는 욱재(郁哉) 호는 죽촌(竹村)으로본관은무안이고,암천박증선생의후예이다.아 버지는박훈이며성삼문의외손이다. 선생은천성이독실하여지극한예로써부모를섬기고새물건 을 얻으면 반드시 양친에게 드려서 맛을 본 후에야 자신도 맛을 보았다. 그 아버지가 성품이 엄해서 혹 기색이 좋지 못한 때에는 심히편치못하여종일토록식음을전폐하고극진히공경하여반 드시문밖에서서돌아올때를기다렸다가식사를하였다.아버지 병환이 있고, 또 모친이 환후가 있어 다 위독하자 목욕재계하고 밤새워 기도하니 두 분이 모두 쾌차되었다. 자기 손에 피를 내어 그부친의수명을하루연장시켰으며,부친이수박을원하자제철 이아님에도원근에서구하여다행히얻었으나때가늦어드리지 못했다.그뒤로는종신토록수박을입에대지않았다. 어머니가 난치병을 얻어 여러 해를 고질로 신음하였는데 항상 창밖에엎드려서물러가않고머리를조아려하늘에빌었다. 한 모금의 물과 한 술의 밥도 어머니가 잡수신 후라야 식사를 했다. 그 모친이 비록 병환이 있으나 아들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입속의 말로,“내가 식사를 했으니 너도 밥 먹으라.”고 하였다.어 머니가별세함에이르러피눈물로슬픔을다하여부친상때와같 이하고제사에드리는물건을반드시손수장만하고물건이좋은 게 있으면 그 값을 따지지 않으므로 장사치들이 다투어 그 집에 모여 들었다. 기일이 되면 열흘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혹 그 부모 가꿈에보이면실성통곡하니처음에는이웃사람들이이상히생 각하였으나그뒤로는곡성을들어도의아하지않았다.혹모르는 사람이 물으면 아모가 또 부모의 꿈을 꾸는 것이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고 부모와 같은 연갑이면 비록 걸인이라도 반드시 후(厚) 하게 대접하였고, 서모와 숙부를 부모 섬기듯 하니 이것이 다 효 심에서우러나는소치라하겠다.지금은다리가없어졌지만公으 로인해무겁교(無?橋)·조석교(朝夕橋)의일화가전해진다. 무겁교는 논산시 상월면에 있었던 다리인데 효자공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동네 앞 냇가에 아침저녁으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가 어느 때고 끊이지 않음으로 그 다리를 사람들이 조석교 (朝夕橋)라 하고 혹 은 부모를 공양함에 있어 두려워하는 게 없다 하여‘무겁교’라고도하였다고한다. 지금은다리가없어졌지만‘무겁다리’라는이름이전하고있다. 이러한 효행으로 1682년 겨울에 시골사람들이 모여 노성현감에 게 글을 올리고 현감이 감사에게 주청하자,그 사적이 묻힐까 염 려되어나라에장계하여올린글과같이시행해줄것을간청하니 1688년정월18일에예조에서정려(旌閭)의명을내렸다. 공이 세상을 뜨자 그 아들 수형과 수강이 손의 피를 내어 드리 고,수강의 부인 이씨가 임종할 때에 그의 아들 시혁의 나이 겨우 13세에 단지하여 약을 달이니 아들, 손자가 모두 효성이 지극했 다. 이에 1683년 우암 송시열이 그 효행 을 기려 ‘죽촌공 박상문 효행전(竹村公 孝行傳)’을썼다. 그에 앞서 조정에서 내린 정려는 학 당리 북쪽 지경리에 건축되었다. 또한 학당리와경계를이루는곳에는옛날에 공이 조석으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 양했다는 무겁교 혹은 조석교에 얽힌 일화가전설로남아구전으로전해지고 있어 최근 빗돌에 그 사실을 새겨 세인 들에게 효(孝) 사상을 고취시키고 있 다.삼가 살피건 데 선비의 일백가지 행 실은 효도로서 근본을 삼고 삼천가지 죄(罪)에는불효가가장크다하였으니 반드시 앉으면 공경을 극진히 하여 순 종하는예를다하고봉양함에즐거움을극진히하여입에맞게받 들음을다하고병들은즉근심을극진히하여의약(醫藥)의방법 을 다하고 상사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여 못 미친 점이 없이 효도 를다하고제사에는엄숙함을극진히하여지나간먼일을그리워 하는정성을다하여야과연그렇다할만한어버이섬기는도리요 아들된지극한정성을다했다할것이다. 효자박상문공같은사람은살았을때예로써섬기고별세함에 예로써 장려하고 제사드림에 예로써 올리여 항상 지내는 행사를 부끄럼이 없은즉 공의 지극한 효행은 비록 옛 성인(聖人)이라도 이에서 더하든 못할 것이다. 하물며 공의 아들과 손자가 또한 단 지(斷指)하여약을다리는정성은가히공결할만한것이다.옛적 당나라의류공(柳公)작세(綽世)가효행과예법으로서사대부의 받드는바되었는데이제공의가문(家門)이거의근사하도다.하 물며이제풍속이퇴폐한시대를당해서공의효행을높이사모하 고우러러본다. 뱚효열부열전 부모님나이또래를뵈어도공경을다한효자죽촌 박상문 효자죽천박상문선생정려:충남논산시상월면계룡산로153번길1-2 효자 박상문 선생의 유적지 (무겁교조석교) 순천세계수석정원박물관을관람하 면朴性인재육성기금으로돌아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