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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8월31일 목요일 7 (제200호) 기 획 1923년9월1일오전1 1시58분일본도쿄를비 롯한 간토(관동) 일대 에 일어난 대지진의 혼 란과 공포 와중에 학살 사건이일어났다.무려6 천6백여명,많게는2만3 천여 명까지 정확한 피 해자수를알수없는학 살의 근거는 “조선인이 방화했다”, “누군가 우 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이다. 일본 내 무성은 ‘전시’ 또는 ‘내 란’에 해당하는 비상시국에서 발동하는 계엄령을 발령해 군대를 무장시켜 시내로 출동,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냥에 나섰다. 군부와 경찰은 자경단과 긴밀히 협력해 ‘불령선인’을 연행, 경찰 서로가두었다가자경단에게넘겨학살을자행하도록했다. 요주의인물에대한계엄군의무작위검속으로검거된이도6,3 80여 명에 이른다.당시 계엄군과 경찰에 의해 검속된 이 중에 박 열(朴烈, 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그 리고불령사동지들16명도포함되었다.이들은한달뒤인10월20 일 ‘진재 중의 혼란을 틈타 제도(帝都,도쿄)대관의 암살을 기도 한 불령선인 비밀결사’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듬해인 1924년 1 월사건은‘대진재를틈탄조선인비밀결사의폭동계획’,즉‘대역 사건’으로보도되기시작했다.이로써박열사건은일본의‘4대대 역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관동 대지진 중에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에 의해 희생당한 6천여명의 조선·중국인들 의학살책임을모면하기위해일본정부가조작한사건이다 일본요코하마에서부모의천대와무관심속에자란가네코후 미코는 9세 때인 1912년부터 7년간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부강 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의 고모부 집안에서 성장 하였다.고리대금업과아편밀매로조선농민들을착취하는고모 부가족밑에서가정학대를받은그녀는비슷한처지에있던식민 지 조선인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되었다. 일본 제국 의무단통치에대한반감,권력에대한그녀의저항의식은1919년 3월부강지역에서일어난독립만세운동에크게공감하면서더욱 커졌다. 일본도쿄로돌아와신문팔이와식당 종업원으로 고학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5월 흑도회에서 의열활동을 펼 치고 있던 박열과 만나 동지로서 공동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인삼행상을 하 며고학하는 박열을도와1922년 7월 10 일 흑도회(黑濤會) 기관지 ≪흑도(黑 濤)≫를 창간해 발행하고, 노동자 후원 과 친일파 응징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또 민중의 직접행동 노선을 추구하는 고학생들과함께사상단체흑우회와불 령사(不逞社)를 조직해 한인 노동자 학살문제 등 항일행사에도 적극참여하였다. 가네코후미코의활동은박열의항일의열투쟁과관련이깊다. 박열은 1922년 2월 중국 의열단에서 파견된 최혁진을 만나 폭탄 유입문제를 논의하였다. 상해에서 만들어진 폭탄으로 조선총독 부와도쿄왕궁을동시에파괴하려는의열단의대규모계획(일명 ‘제3차 폭동계획’)에 의해 폭탄을 나눠 받기로 했던 것이다.박열 은 애초 이 계획을 가네코 후미코에게 숨겼지만, 의열단의 국내 폭탄 수취 책임자로 김한(金翰)이 선정되는 등 계획이 가시화되 자 1921년 10월 상의하였다.박열은 1922년 9월과 11월 서울을 두 차례방문하여김한을만난후늦어도1923년가을까지폭탄을건 네받기로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 김상옥 투탄 의거로 김한이 체포되고,일제 의경계망이삼엄해지면서계획은일시중단되었다.이에박열은 서울 흑로회(黑勞會) 회원인 김중한을 상해에 파견해 의열단의 폭탄을입수하고자하였다.그러나김중한과박열의불화로이계 획도무산되었다.그럼에도박열은불령사동지인최영환을통해 중국상해의의열단체와폭탄구입을협의해무사히인계받았다. 그러던중1923년9월1일돌연도쿄일대에대지진이발생했다. 요주의인물이던박열은9월2일경찰에체포되었고,가네코후미 코는 다음날은3일 밤계엄군에의해 연행되었다.세타가야(世田 谷)경찰서에는보호검속이란명목으로연행된두사람이외에도 불령사회원전원과120여명의한인이수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구류 29일에 처하더니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을들어불령사16명전원을치안유지법으로기소하였다.검찰조 사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일제는 불령사 회원들에게‘대역사건’의혐의를씌워폭발물취체법으로기소하 였다.하지만폭탄투척계획은‘혐의’만있을뿐아무런물증이없 었기에박열·가네코후미코와김중한만기소되었고,나머지불령 사회원들은모두무죄방면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 려는 일본 정부에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 하는투쟁을벌이기로했다.가네코후미코는수많은회유에도불 구하고 전향을 거부한 채 예심판사에게 폭탄유입 계획을 당당히 밝혔다.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그 녀는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정해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혔 다. 또한 박열과 함께 사형을 선고해 달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 고,사형판결즉시만세를외쳤다. 일본검찰은10일만에두사람을사형에서무기징역으로감형 시켜달라는은사를신청했고,곧사면장이발표되었다.가네코후 미코는일본정부의기만술책에저항하며형무소장앞에서은사 장을 찢어버렸다.사형 판결이후두 사람은치바(千葉)형무소와 우츠노미야(宇都宮)형무소 도치기 지소로 각기 이감되었다. 교 도소에서편지교환은물론외부와도단절되었고,전향을강요하 거나글쓰는것도금지되어단식농성을벌이며저항하였다. 그러던 중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아침 옥중에서 의 문의 죽음을 맞았다. 죽음의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채 타살의 의 혹이많은상태에서교도소측은그녀의시신을서둘러인근들판 에가매장하였다.이에원심창등흑우회동지들이교도소로몰려 가유해를발굴하고유골을수습해박열의고향인경북문경팔령 산 기슭에 묻었다.사후인 1931년 자전적 옥중 수기인 븮무엇이 나 를이렇게만들었는가븯가발행되어그녀의굴곡진삶을이해할수 있었고,1973년 아나키스트 동지들이그녀의묘소를정비해묘비 를 세워주었다. 2003년 12월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그녀의유해는문경시마성면샘골길44번지기념관앞으로이장 하게되었다.대한민국정부는독립운동에끼친그녀의공로를인 정하여2018년건국훈장애국장을추서하였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 을위하여”.이문구는2004 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 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 1879~1953)의 묘비 명에 새겨져 있다.이 건국 훈장애족장은일본제국의식민통치에목숨걸고저항하며한국 독립과대한민국건국에기여한공로가크기때문에추서되었다. 후세 다쓰지는 1879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오시카군(牧鹿 郡)에 있는 작은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관심을갖고서당에다녔는데,제자백가중에서도전쟁에반대하 고 타인을 사랑한 겸애주의자인 묵자(墨子)를 존경했다고 한다. 자유민권운동 지지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깊은 관심 을가졌는데,인간의평등성을바탕으로일찍이차별과억압에눈 뜬것으로보인다. 그는 1899년 도쿄에 상경해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에 입학해박애사상을실현하고자했다.재학중후세는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는 물론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유학생들과 많은 교 류를가진것으로알려졌다.이러한경험은후일그의활동영역이 일본을 넘어 조선과 대만·중국 등 식민지까지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고피지배민중에대한사랑과헌신의배경이되었다. 1903년 8월 변호사가 된 후세 다쓰지는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 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특히 강제병합을 전후로 이를 비판하며 조선인과 독립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1911년 작성한 「조선의 독립운동에경의를표함」이라는글을문제삼은검사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본격적인 조선에 대한 관심은 1919년 3·1 독 립만세운동을전후한시기이다. 1920년 5월 사회적으로 분출된 보통선거운동과 사회단체의 결 성을 계기로 ‘전통적인 변호사’로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 겠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했다. 이것은 입신출세 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비굴한 삶을 거부하고 평생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그는 1921년 자유법 조단을 결성해 조선소 쟁의운동을 지원하며 본격적인 변호활동 을전개했다. 그가처음조선인독립운동가들을만난사건은1919년2·8독립 선언으로체포된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등9명에대한 ‘출판법 위반사건’을 변호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일본이 체코의 독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하면서 조선의 독 립운동을 왜 원조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옹호하였다.이를계기로조선인들의독립열정을절감 하고,변호와각종지원활동에적극참여하였다. 1923년 7월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해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사명‘이란주제의강연회를가졌다.그의열정적인강 연에많은조선인들이큰감명을받았다고한다.하지만귀국하자 마자기다리는건관동대지진이었고,이와중에발생한조선인대 학살 사건이었다.그는 자유법조단의 일원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학살이책임이일본정부와군부,경찰과자경단에있음을밝히려 했지만,당국의방해로조사결과를발표할수없었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대역사범’의 누명을 쓰고 법정투쟁을 벌이는 박열 과가네코후미코에대한변론을맡았다.일본의국체인천황제를 송두리째부정하고식민통치를철저히비판하는,‘일본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의 두 주인공에 대한 변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법정투쟁이었다.더구나 변론과정에서 옥사하여 형무소 뒤뜰 에버려진가네코후미코의유해를거두어자신의집에안치했다 가박열의고향으로운구해묻히게하였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그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의 토지사건을 조사하였다. 봉건지주층과 동양척식회사를 상대 로전개한나주농민들의토지반환투쟁이었다.일본제국의식민 지정책에의해압박받는조선농촌의처참한상황을실감하고이 를 대변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벗, 변호사계의 반역아’란 별 명을얻게되었다. 1927년세번째로조선을방문할때는박헌영을비롯한조선공 산당 사건을 변호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을 ‘조선 동포 전 체의사건’으로간주하여독립운동의일환으로바라보았다.공판 과정에서피고에대한일본경찰의잔혹한고문실태가폭로되어 항의운동이벌어지기도했다.그해12월공판의최후변론을맡아 12명을무죄판결받도록하였다.이후에도‘재일조선인노동산업 희생자구원회’의발기인대표로참여하고,1931년에는김한경등 의치안유지법위반사건을변호했다.그러던중1932년법정을모 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재판에 회부되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다.1933년에는 신문지법,우편법 위반으로 기소 당하여 금고 3개 월의실형을언도 받았다.더욱이1944년 2월 둘째 아들이 치안유 지법위반혐의로체포되어교토형무소에서옥사하는아픔을겪 어야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또 다른 모습으로 민중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출옥 자유전사 환영 인민대회’에 참가해 연설하였고, 자유 법조단을다시결성해변호사로활동하였다.그는새로운평화헌 법 보급과 계몽에 힘쓰고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획득하는 투쟁에 진력하였다. ‘박열의 열열한 옹호자’였던 그는 1946년 박열의 요청을 받아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를집필하고,그의투쟁을정리한『운영 의 승리자 박열』을 출간하였다. 나아가 『관동대진재 백색테러의 진상』에원고를기고하는등재일조선인과의변함없는연대활동 을 전개했다.이 밖에도 한신(阪神)교육투쟁에 변호인으로 활약 하는한편,조련(朝聯)·민청(民靑)해산사건,도쿄조선인고등학 교사건등의변호를맡다가1953년세상을떠났다.장례식에는수 많은조선인들이장의위원으로참여해고인의명복을빌었다.동 지들의 표현대로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며, 한일연대투쟁의 상징이기때문이다. 천대와무관심속에 자란가네코 후미코는 20살이던1923년 조 선인대학살의 와중에 암살 폭동을 꾀했다는 일본 제국의 무시무 시한음모로인해대역죄인이란죄명을뒤집어썼다.하지만이를 회피하거나전향공작에넘어가지않은채상식을바탕으로당당 히 반(反)천황제 투쟁을 벌여 나갔다.일제의 식민통치와천황제 군국주의의 부당성을 통렬히 비판한 그녀의 법정투쟁은 누구보 다조선의독립과한일평화연대를갈망했던한자유인의치열한 항일투쟁이라할수있다. 박열·가네코후미코의반천황제투쟁을비롯해조선민중의항 일운동에늘함께한후세다쓰지변호사역시한일연대투쟁의상 징이다. ‘일본인 쉰들러’란 별명과 같이 일생동안 억압받는 조선 민중의 든든한 벗이 되어준 그는 자유와 평등·인권이란 이념을 실천한 살아있는 일본의 양심으로서 아시아 평화연대를 향한 한 국과일본의귀감이아닐수없다. /자료제공 <참고문헌> 가네코후미코지음·정애영옮김,븮무엇이나를이렇게만들었는가븯,이학사,2 012. 김명섭,븮한국아나키스트들의독립운동-일본에서의투쟁븯,이학사,2008. 박열의사기념사업회저·김창덕역,븮국역박열·가네코후미코재판기록븯,드 림,2017. 야마다쇼지지음·정선테옮김, 븮가네코후미코-식민지조선을사랑한일본 제국의아나키스트븯,산처럼,2002. 오오이시스스무·고사명·김형낭·이규수공저, 븮조선을위해일생을바친후 세다츠지븯,지식여행,2010. 전명무,븮후세다츠지평전-조선의독립운동을지지한일본의양심븯, 역사공 간,2022. 1923년4월불령사(不逞社)라는비밀결사대를조직했다가,직 접행동의 기회를 노리며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함께1923년10월에일본왕자히로히토의혼례식때 암살을기도한죄로체포되어갖은옥고를치른불굴의애국지사 박열의사의독립투쟁일기를그린영화‘박열’이지난2017년28일 개봉 후 8월 22일 현재 관객 235만 명을 돌파하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있다. 영화가 주는 감동과 느끼는 역사의식은 공교육에서 가르친 내 용못지않게마음을움직인다. 이준익감독의영화‘박열’은22세독립투사의불꽃같은삶의이 야기다. 다른 층위의 감동이 있었고, 여러 지점에서 보는 관객에 게 피를 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저항과 투쟁의 방식부터 달 랐다. 시인 윤동주가 고독한 시 쓰기로 일제의 폭압에 저항했다 면,박열은냉철한이성과기개로일본제국주의본토인도쿄에서 일제지배층에맞섰다. 그는 자신처럼 아나키스트인 일본 여자 동갑내기인 가네코 후 미코와결혼을했고21살이되던1923년,이들부부는천황아키히 토를암살하기로결심하고폭탄을준비하던중계획이발각돼동 지 14명과 함께 체포됐다.그는 아내와 함께 제 발로 일본 대법원 에들어갔고,법정에서제국주의의모순을조목조목지적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000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 이학살된다.이사건을은폐하기위해일본내각은‘불령사’를조 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박열’을 대역 사건의 배후로 지 목한다. 박열은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의 한복판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말 안 듣 는조선인’을빗대어불령선인이라고부르며조롱했다.박열은불 령선인에서 착안해 불령사라는 단체명으로 활동할 만큼 패기가 넘쳤다.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는 이 영화의 모든 걸 압축해 놓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그가 시 전문을 읊는 모습이 대단하게느껴진다. “하늘을보고짖는/달을보고짖는/보잘것없는나는/개새끼 로소이다/높은양반의가랑이에서/뜨거운것이쏟아져/내가목 욕을할때/나도그의다리에다뜨거운줄기를뿜어대는/나는개 새끼로소이다” 높은양반은일본제국주의에대한은유라생각한다.그의다리 에다나도오줌을눈다.너희들이폭압하면나도되갚겠다는것이 다.박열은실제로인생을자기가쓴시대로살았다.또한,그가세 상을바라보는관점이매력적이다.일본이라고무조건악으로보 지 않는다. 민중을억누르는세력이적인것이다.이런생각은국가나민족 단위를 초월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 같기도 하다. 헐 벗은 민중에 대한 사랑,죽음의 길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 등, 하물며허름한차림새에길게어질러진머리까지. 박열은일본내각의음모를눈치채고전세계의관심이집중될 수 있도록 황태자 폭탄 암살 사건을 자백한다. 그는 조선 최초의 대역죄인이돼사형까지무릅쓴공판을시작한다.이어서가네코 는우리는부부이고모든일은함께추진했으니사형이든무기징 역이든 형량을 꼭 같이 해주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고 했다. 감독은이영화를일본에서보고일본이날조하고폄하하지못 하도록고증작업을거쳤다는것이다.야마다쇼우지의평전을바 탕으로 가네코의 옥중수기,아사히신문과 산케이신문 자료 등을 넘겨받아너덜너덜해질때까지봤다는것이매우인상적이다.이 감독의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영화로 되살아난 박열의 일생이 야말로 1900년대 전반기의 한국사를 대변하는 한 편의 드라마라 고할수있을것이다. 영화 ‘박열’은 미국 주요 지역에서의 개봉 해 눈길을 모으고 있 다.앞서6월29일(목)에는캘리포니아주LA에서개봉한바있으 며,30일(금)OC지역(얼바인,라구나,뉴포트등등),7월7일(금) 에는텍사스주델러스에서개봉이확정됐다.여기에,한국에서박 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타 지역극장에서도개봉문의가잇따르고있어,미주지역에서의개 봉관은더욱확대될예정이다. 한편박열의사는본관이함양으로경북문경에서태어났다.기 념관이지난2012년개관되었다. 뱚8·15광복절특집 제국에맞서한국독립을지원한일 본인들 뱚뱞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일본방면,애국장 ,2018) 뱚뱞후세다쓰지(布施辰治,1879~1953,일본방면,애족장, 2004) 1.관동조선인대학살100년과‘박열사건’의진상 관동대지진당시일제의한인학살을규탄한하 와이동포들의동정을보도한기사(신한민보19 23년11월8일자) 2.천황제에맞서싸운일본여성가네코후미코 가네코후미코묘소,경북문경시 가네코후미코와박열의재판모습 박열 3.한국민중의벗,일본의양심후세다쓰지변호사 24세무렵의후세다쓰지 후세다쓰지가족사진(1916년경) 4.상식과양심으로제국의폭압에맞서싸우다 박열의사기념관(지하1층지상2층)-경북문경시마성면오천리98번지 5.덧붙임(본보2017년8월호9면) 불굴의애국지사박열의사영화로다시태어났다 가네코후미코와박열(22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