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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8월31일 목요일 4 (제200호) 기 획 △박영록(서울시 동작구) △박병인 (인천시 연수구) △박성호(경기도 성남 시) △박홍열(경기도 파주시) △박연희 븡박해용(강원 동해시) △박인근(충북 청주시) △박부규(충북 충주시) △박봉 순(충남 서천시) △박노수(대전 동구) △박수환(경북 안동시)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종백(경북 포항시)△박외 근(경북경주시)△박복로븡박의묵(경북 청도군) △박진하(대구 수성구) △박동 춘븡박동기(대구달서구)△박만순(부산 연제구)△박영덕븡박남수(부산수영구) △박문호, 박성국, 박재헌븡박장제븡박능 출(경남 창원시) △박래수(경남 진주 시) △박정영(경남 밀양시 ) △박문갑 (경남 통영시) △박채은(경남 양산시) △박갑영(경남 산청군) △박명호븡박래 근(경남 의령군) △박홍문(광주 광산 시) △박종인븡박병순(전남 광양시) △ 박성일(전남 목포시) △박래호(전남 장 성군)△박영희(제주시애월읍) ◎서울특별시△박상숙(노원구)△순 천박씨용담공종친회(동대문구) △박이 섭(강남구) △죽산박씨 연흥군파(금천 구) ◎대전광역시△박태식(대덕구) ◎대구광역시△박원정(수성구)△박 동근(북구)△박호경(달서구) ◎광주광역시 △박인섭븡박호진븡함양 박씨동정공파븡박혁규(남구)△박남근 (광산구) ◎부산광역시△박영옥(동구)△박수 경(사상구)△박삼주(연제구)△박정열 (영도구)△박무종(해운대구)△박동수 (남구) ◎울산광역시△박용걸(남구)△박경 무(동구) ◎인천광역시△박만훈(남동구) ◎경기도△박정하(광주시)△박각준 (화성시)△박창근(의정부시)△박수영 븡박종수(양평군) △박찬모(성남시) △ 박광태(여주시) ◎강원특별자치구 △박재동(삼척시) △박철규(동해시) △박재천븡박용선븡박 우철(원주시)△신라오릉강릉시지부 (강릉시) ◎충청북도 △순천박씨판서공파종 중. 박일순. 박성균(청주시) △박형준 (보은군) ◎충청남도△박우승(아산시) ◎경상북도 △박태준븡박순도(경산 시) △숭덕전(경주시) △박봉영(영주 시) △박명술(영양군) △박인호(예천 군)△박문학(울진군)△박지일.박순태 븡박규석(청도군) ◎경상남도 △박영호븡박재숙븡박무수 (밀양시) △박영태븡진주시박씨종친회븡 박윤덕(진주시) △박병영븡박경일(김해 시)△박태주븡박원홍(창원시)△박희구 (의령군) △박정제븡박권제븡박희조(거 창군)△박덕해(고성군)△박동주(창녕 군)△박관식(하동군)△박성술븡박순근 (함양군) ◎전라 북도 △박승제븡박병원(전주 시)△박점식븡박성순(정읍시)△박상선 (군산시) △박희옥(순천시) △박철완 (김제시) ◎전라남도△박채주(고흥시)△박주 화(해남군) △박동규 신덕왕릉 참봉 △경남본부 (회장 박재복) △죽산박씨 임곡대문중 (회장 박형엽) △무안박씨 해남파(종회 장 박주신)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2023년 7월 21일에서 2023년 8월 20일 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 농협계좌송금하여 주신분 ※△2023년 3월 2일 농협으로 입금해주신 박종식님.△2022년 12월3일신한은행으로입금해주신박수복님.6월21일자신한 은행으로 입금해주신 박기태님. △4월1일자 E-신한은행으로 박재식님.△2월24일국민은행박중수(화곡동)님.△2월15일자 폰카카오로 입금해주신 박현규님.△2021년 7월 2일자 E-우리 은행 한빛신문구독료로 입금해주신 고객님. △4월 13일자 PC 신한은행3100로입금해주신고객님.△2월24일국민은행박중 수(화곡동)님.△12월11일국민은행박일남으로입금하신고객 님께서는신문사로연락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TEL:(053)58 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유방사는1938년경주박씨춘파공파문중에서건립했다.당시만 해도진도는외딴섬지역으로육지와달리교통과문물의반입등 이 자유롭지 못한 곳으로 후손들은 항시 선조 관설당공의 충절을 정신적 가훈으로 삼아왔다. 그러하기에 수양대군이 어린조카 단 종의 왕위찬탈에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선 대의 고향함안으로갔다가 다시외딴섬 진도로들어와절의를 지 켜왔고,진도 입도 길목에 조그만 단(壇)을 세우고 관설당 선조에 대한후손으로써의예를다해왔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그만 사당을 짓고 유방원의 뜻을 취해유방사(遺芳祠)라하고그후예문효공휘도덕,문목공휘원 계,춘파공휘근무등4위봉안하고매년음력3월3일제향을받들 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재숙소인 재사(齋舍)를 지어 선조의 충절에 대한 본보기가 원대하게 이어지길 기원하는 뜻에서 모원재(模遠 齋)라 편액하고 근세에 이르러 파조 춘파공 이하 137위의 위패를 모시고유방사제향직후향화를받들고있다. 선생은 신라 눌지왕대의 충신.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서 신라본 기와박제상전,븮삼국유사븯,븮일본서기븯등에나온다.박제상전에의 하면 그의 이름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하였는데, 븮일본서기븯에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되어있다.박제상전에는그가시조 (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 세손이며,할아버지는아도(阿道)갈문왕(葛文王),아버지는파진 찬(波珍 豫 )물품(勿品)이다. 벼슬을 하여 삽량주간이 되었다고 하였다. 당 시에는 아직 주제 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삽량(촌),즉 양산 지역의 간 내지 지 방관과같은역할을하였던것으로보인다.그가왜에서순국한뒤 에는대아찬(大阿飡)을추증하였고그의둘째딸을미사흔의부인 으로삼았다. 눌지왕(訥祗王)이즉위하여아우복호는고구려에미사흔은일 본에억류되어있어 슬픔으로지내던중신하를보내어 귀환을여 러차례요구했으나번번이거절당했다. 이에관설당공이고구려로가서뷺한뿌리의후예로어찌이런일 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뷻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다시미사흔을구하기위해서왜국으로떠나그해7월에그곳에도 착,뷺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 소뷻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칠 때미사흔과그를 앞잡이로삼으려는속셈을 품게되었 다.왜왕으로부터어느정도신임을받게되자그는자주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그 러던어느날지척을분간할수없도록안개가끼자그는바로이때 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미사흔을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공(公)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뷺왕제는 몸이 피곤해 서주무시고계시오뷻하며시간을끌다가마침내발각되어왜왕앞 에묶여나가문초를받게되었다. 뷺나의신하가되면모든것을용서하겠다뷻는왜왕에게뷺나는계 림(鷄林)의 신하이다.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 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받지않을것이다뷻하며굴복하지않았다.발바닥을벗겨갈 대밭을 끌고 다녀도 뷺나는 계림의 신하다뷻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 에달군철판위로끌고다녀도끝내굴복하지아니하자왜왕은그 를목도(木島)로유배시켰다가마침내불에태워죽이고말았다.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우(유방 원)을건립하여향(香)을올렸다는것이구전으로전해지고,대마 도에는순국비가세워졌다.울산의치산서원,영해운계서원,강릉 경양사, 양산 효충사와 영해박씨 각 문중 재사(齋舍)에 배향되어 있다. 관설당 박제상 선생의 21世이고 좌복야 휘 섬(暹)아들이다.자 (字)는 수겸( 쑴 謙) 호는 만취헌(晩翠軒)으로 태사중서령 민헌공 최충의사위다.목종무신년(1008년)에태어났다. 덕종 계유년(103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합문지후가되고정종 병자(1036년)에 한림학사 정당문학 검교태부에 임명되었다.갑신 (甲申,1044년)에 이부상서 문하시중 참지정사가 되고, 문종 갑오 (甲午,1054년)에 금자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갑진(甲辰,1064년) 에 별세하니 왕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며, 문효(文孝)라 시호를 내렸으니, 공으로부터 경주박씨 기일세(起 一世)하고있다. 민부전서휘종태의아들연(演)의장자이다.아버지연은 충렬 왕 정해(丁亥, 1287년)에 태어나 신축(辛丑, 1301년)에 익재 이제 현과 더불어 문과에 급제했는데 두 사람의 나이가 15세이어서 임 금이 가상하게 여겨 성균관에 들어가게 하고 예문관 겸열에 임명 하였다.충렬왕때사신정가신·유청신과함께이현궁에들어가니 왕이하교하기를뷺동성간에혼인을하지않는것은천하에두루통 하는도리인데하물며우리나라는공부자(공자)를도(道)를행하 는 나라임에랴?지금부터 이후로는 국내의 이름있는 성씨 15가문 에게 왕실과 대대로 통혼하기를 허락하겠다.뷻하였는데 곧 시조왕 의 후예 박씨와 경순왕의 김씨 등이다.충숙왕 을묘(乙卯,1315년) 에 국자박사 겸 중서사인에 임명되고 어사대부 전객령을 거쳐 충 목왕정해(丁亥,1347년)에별세하였으니향년61세이다. 장자원계(元桂)의호는석뢰(石瀨)이다.충선왕계축(癸丑,131 3년)에 태어나 충숙왕 경오(庚午, 1330년)에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에 임명되었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장령으로 옮겼으나 간관 신군평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곤궁함을 견디면서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신 사(辛巳, 1341년)에 불려서 집의에 임명되고 보문각 응교를 거쳐 예부전서로전근하였다. 충정왕 원년(1349년)에 보성군수에 임명되고또 강진군수를 맡 았다가임기가만료되어금주(현김해)로옮겼다.공민왕을미(乙 未,1355년)에 일찍이 강릉에 나아가 백성들을 위안하고 개성부윤 이되었을적에다같이훌륭한공적으로소문이났었는데덕을칭 송하는비(碑)를세우니왕이말하기를뷺지금이박모는청렴과근 신으로자신을단속하고인자(仁慈)로백성을위안하니옛날의훌 륭한 관리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 있다.뷻하고 불러들여 예문관대제학에임명하였으며,정당문학에옮겼다가이부상서를 지냈는데갑인(甲寅,1374년)에총애를받던환관(宦官,내시)최만 생과 총애를 받던 신하 홍윤 등이 공민왕을 시해하고 신우(辛禑, 훗날 우왕)를 세우니 포은 정몽주가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주창 하고공의형제및김구용,박상충등10여인과더불어굳게논쟁하 였다.포은은언양현으로귀양가고공은강계부에귀양갔으며,박 상충은사형을당했다. 공은 유배에서 풀려 돌아온 후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는데 포은이 조정에 추천하여 여러 차례 등용하려고 불렀으 나 나아가지 않았다.공은 청렴하고 정의에 분개하는 마음을 가졌 으며,평탄할때와험준할때에한결같은절도를지켰는데이사실 이 여지승람 및 오군(五郡)의 읍지. 고려사, 신군평전(申君平傳) 에전해진다. 공의휘는근무(根茂)호는춘파(春坡),수양대군의왕위찬탈에 단종을 지키려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였다. 형 저작공과 함안으 로 옮겼다가 전남 강진에 잠시 머무르다 차남 형손(亨孫)을 데리 고 진도로 옮겨 영재교육에힘쓰고,해남에서 진도로 새롭게 개편 되는군의규모를설정하는데큰공을세웠다. 신라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은 왜놈에 맞서 충절을 지켰 고, 청허당(淸虛堂)휘 광염(光廉)은 타고난 효자이자 청백리,문 열공 황(璜)은 금나라에서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내놓았다. 월산 군절효공(휘소)는고려의종때 뛰어난행실을가진성현으로탁 행군자(卓行君子)라불렸다. 조선조에들어와문목공(휘원계)은불사이군하였으며,저작공 앙과 춘파공 근무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켜보며 낙향하여 은거하는등충과효의명성을이어나갔다. 이에후손들은선조의유덕을지키고부모에효도하는등600여 년을 이어오는 동안 그 후손들은 지역의 토호성씨로 자리 잡았다. 최초 입향한고군면 벽파리 선영에단을 세워선조를기리고 일제 강점기에는진도읍교동리북상마을언덕에1938년유방사를세워 관설당을 비롯 문목공(휘 원계), 춘파공(휘 근무)의 위패를 봉안 하고추원보본의정성을다하고있어귀감이되고있다. 그리고지난봄후손들은유방사 주변축대를쌓고 대나무를제 거하는 등사당 주변정화사업에팔을 걷어부쳐새롭게면모를 일 신했다. 그리고 모원재에는 고향을 떠난 후손들이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도록 펜션형으로 리모델링하여 모원재는 후손들의 구심 점 역할을 할 것 같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재실탐방 전남진도유방사(遺芳祠)와모원재(模 遠齋) 전남진도군진도읍교동리북상마을 유방사내부에모셔진위패 모원재신실(神室) 유방(遺芳)이라함은명성을후세에널리전한다는뜻 으로진도유방사(遺芳祠)는일본의유방원(遺芳院)에 서 그 뜻을 취했다.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으며 뷺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뷻는 왜왕에 게뷺나는계림(鷄林)의신하이다.나는계림의개나돼 지가될망정왜국의신하는되지않을것이며,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뷻하며굴복하지않아발바닥을벗겨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뷺나는 계림의 신하다뷻하며 굴복하지 않 고불에달군철판위로끌고다녀도끝내굴복하지아 니하며 결국 목도(木島)로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죽게된관설당박제상선생을추모하기위해세 운사당이다.그러나어느곳에어느때세워진지는기 록이전해지지 않아고증할수없으나대마도 사고미 나토에 순국비가 세워져 추모하고 그 명성을 전하고 있어유방원의실체를엿볼수있다.이에진도유방사 와종중의재사(齋舍)모원재를함께소개해본다. 유방사와모원재연혁 모원재(模遠齋) 배향선조 관설당박제상선생 문효공휘도덕(文孝公度德) 문목공휘원계(文穆公元桂) 춘파공휘근무(春坡公根茂) 진도입향과사당수호 유방사와모원재전경(2021년촬영).지난봄사당을둘러싼대나무와칡넝쿨을재거하고,모원재옆부터축대를새롭게축조하여면모를일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