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2023년7월31일 월요일 8 (제199호) 기 획 박성기현종은임진왜란에창의하여혁혁한공을세운죽천박 광전 선생을 현창하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죽천박광전선생기 념사업회’이사장이다. 박이사장은아버지형호(炯虎)공과어머니달성배씨순임여 사와의사이에칠남매중장남1939년전남목포에서태어났다.조 상대대로 세거한 두봉 마을에서 아버지가 목포로 이사했기 때문 이다.그리고 5살 때 두봉마을로 돌아와 13살까지 서당에 다니며 사람이지켜야할다섯가지도리즉군신유의(君臣有義),부자유 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 유신(朋友有信)을깨우쳤다. 이후 목포로 돌아가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병약한 아 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남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 자신의삶은포기할수밖에없었다. 아침새벽신문배달을하고밤에는한의원에서잡일을하며고 학(苦學)을 하였던 박 이사장의 꿈은 신문사 지사장이었다.신문 배달을하며보았던지사장은당시기관장이부임하면신문사지 사장에게 인사를 왔던 시기인지라 지사장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 다.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향해 뛰었다. 지인들은 무모한 일이라 했지만 노점상과 막노동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병뚜껑을 개발하여 특허를 얻어 지역의 삼학소주와 보해소주,삼학사이다 등공장에납품을하면서꿈은이루어졌다.한국일보목포지사장 으로 신문 판매와 해남 목포를 관할하는 주재기자로서 언론인으 로의길을걷기도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납품업체인 삼학소주가 부도를 맞 으면서 어렵게 되었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어렸을 때 배운 오상 (五常)의 근본을 되새기며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 아회복하는저력을보여주었다. 그리고 남다른 교육열로 아이들을 위해 1973년 광주로 이거하 여 3남1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다.아들 3형제는 모두 의학계 에종사하게되었고,사위는병원장이다. 광주에 이사와 하였던 사업은 출판업이었다.그리고 1975년 한 국일보목포지사는다른사람에게넘겼다. 박이사장은 평소 불우한 이웃과 재난에 힘겨워하는 사람을 외 면하지못하는착한심성을가졌다.사업은날로번창하면서지금 까지받은사랑을소외계층을위해헌신했다.1970년경목포지역 의폭우로큰재난사고가발생해통큰기부와모금운동을펼쳤던 것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단다. 매년 불우이웃 돕기와 재난사고에는 항상이름을올렸다. 1981년 두산개발을 설립하여 사업은 순탄 하게 안착되었고, 사회 에 헌신하는 기업가로 사회단체를 맡아 봉사 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에 건설교통부장관과 대통령상으로 이어졌 고, 그동안 추진해왔던 위선 사업에 박차를 가 할 수 있었다. 기관단체장 모임의 간사를 맡아 지방자치 발전에 공헌하였고, 자 유총연맹광주전남지회장과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으로맡은바 책무를다해2005년국민훈장모란장을받기도했다. 진원박씨 제1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위선봉사와 애족심 함양 에열정을경주하여문중발전에크게기여했다.특히임진왜란의 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죽천 박광전선생 추모사업회 이사장 으로 용산서원 복설과 보성의병기념관 건립하여 지역민들의 나 라사랑을 실천하는 데 기여하였고, 선조의 유집(귀의집)을 국역 으로발간하는등선조현창사업에사재를출연하면서문중은더 욱활성화되었다. 선조 우후공(휘 응두)의 재사 옥산재가 6븡25전란으로 소실(燒 失)되어 중건(1979)하였으며 구례공 묘역과 사온서직장공 묘역 장종파 파조이신 흥원공 이하 3대 묘역을 정비하였고 우후공 이 하선조단비등을세워그아래웅대한숭조회관의건립(2004)을 독력(獨力)으로 마쳤다. 그리고 숭조회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나자효수련원을지어각종단체의효세미나를할수있도록하였 다. 이 같은 위선사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아니다고 말한다. 부인 김초자여사의헌신적인내조가절대적이었다. 부인 김 여사는 8남매의 맏이이다. 어린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운명은박이사장과같다.부부는양가의동생들을훌륭하게성장 시켰으며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성균관에서는 부부에 게 효행상을 각각 전달하기도 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표본이 자현모양처를보는듯하다. 박이사장은젊은이들에게경로효친을강조한다.그리고20세 기 역사학자 토인비선생이 지구가 종말하여 타 행성으로 이사를 갔을 때 세계 모든 문화는 버릴지라도 한국의 효 문화는 가지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듯 효 사상을 계승발전 시켜나가야 할 책무 가 기성세대에 있고 효사상 고취는 젊은이들의 인성함양에도 크 게도움이된다고강조하고있어박이사장의꿈이현실로이어져 아름다운 사회로 발전되길 기대하면서 숭조회관을 함께 소개해 본다. 숭조회관은옛날시묘(侍墓)를연상케한다.선조묘역아래회 관을 짓고 매일 아침 묘역을 들러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제삿날이 되면 후손들이 한데모여 선조의 음덕에 감사하며 추원 보본의정성을다한다. 진원박씨문중은청백전가(淸白傳家)를종훈으로유구한역사 와 전통으로 이어오고 숭조효친 사상이 이곳 숭조회관에서 다시 점화되어종문의더큰번영과국가민족에크게공헌할명문거족 으로발전할것이라며회관을찾는사람들은말한다. 김동환전광주광역시장은2004년숭조회관준공식에참석“박 성기 회장은 공인으로서는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 의신장과수호에진력해오셨습니다.또한우리민족의정신문화 의근간인효친사랑이남다른바있어부모님을모시는데도각별 한정성을쏟아우리에귀감이되었다.”고말하고“효친사상이소 홀해지는일부사회현상에경종(警鐘)과아울러좋은교훈이되 리라확신합니다.”라며극찬을아끼지않았다. 옛말에착한행실과아름다운사상은돌에새긴다했으니세상 의귀감이되는덕행을앞다투어기문으로남겨전남대학교명예 교수 철학박사 안진호 박사가 지은 ‘숭조회관기(崇祖會館記)’를 소개하며마무리해본다. 사람은어디에서와서어디로가는것인가또어떻게살아야하 는것인가우리는현실의삶속에서왕왕해답을찾을수있다.그 본보기의하나를여기진원박씨의숭조회관에서본다.이곳응암 촌은진원박씨의한파가대대로살아온곳이다.이곳묘역에는그 선조들이줄줄이모셔져있고그아래에재각옥산재가있으며또 한숭조회관이웅대하게서있다.응암촌의진원박씨는우후공(휘 응두)이택지하여정착한이래벽옥산의신령스런정기를받았음 인지 많은 벼슬아치와 학자가 배출되었다.또 그 여광(餘光)에 힘 입어이묘역의일들도다잘이루어진것으로생각된다. 우후공의14대손성기씨는6븡25전란으로없어진옥산재를중건 (1979)하였으며이곳선영의정화사업에솔선진력하였다.그는재 각의 중건에 이어 단비와 묘비 등을 갖추는 일(1991)과 저 웅대한 숭조회관의건립(2004)을독력으로마쳤으니 이처럼 장한일이어 찌유래없이이루어질수있겠는가성기씨는일찍부터어른들의 훈도를몸에익히고근검을치산(治産)하여아우들과자녀들의교 육에힘스는한편종중의일에도내집일처럼정성을다한끝에이 숭조회관까지 짓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세상의 모범이 되는 장거 (壯擧)가아닐수없다나는이와같은그의아름다운행실에감동 되어이숭조회관의기문을다음말로끝맺고자한다. “이글을보는후손과젊은이들이여정성을다하여조상을받들 며부모에게효도하고형제간에우애한(孝悌)박성기씨의저숭고 한뜻과아름다운행실을본받아우리문화와윤리의전통을이어 가길바라노라” 뱚종/친탐/방 진원박씨효수련원박성기현종 효(孝)수련원전경(전남장흥군장평면두봉진산길26-13) ‘사람이사람으로태어나사람노릇하며살기가제 일힘든다.’라는말이있다.이는우리민족정신문 화의근간인효친사상과우애그리고사랑으로세 상을살아야하는데그렇지못하다는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급속한 산업 화로인해많은변화를실감하고있으면서도가족 간의사랑과부모에대한효사상은많이무너져있 음을알 수있다.언젠가 언론매체에 부모를모시 고 살겠다는 청소년이 극소수에 달한다는 설문조 사 자료를 공개한바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자식도부모를죽이는끔찍한존속살해뉴 스는우리사회단면을보여주고있어효사상고취 는이제우리에게큰숙제로남아있다. 사람에게는굳게지켜야할상도(常道)가있으니천 성(天性)이그근본이다.타고난품성이준수(俊秀) 하고맑고바른본성을갖고조상을숭배하고어버 이께 효도하며 뜻과 행동을 오직 한 결 같이 해야 하는것이다. 전남장흥군장평면두봉리소재숭조회관과효수 련원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해답을 갖고 있다. 숭조효친사상이 이곳에서 점화되어 우리 사회를 더아름답게승화시켜나가고있어찾아가본다. 박성기 이사장과 부인 김초자 여사께서 다 정한한때를보내고있다. 박성기이사장이지난1일청년들을맞아조상을숭모 하며효를생각해보게하 도록숭조회관을건립했다고배경을설명하고있다. 숭조회관 숭조회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