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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7월31일 월요일 2 (제199호) 특 집 밀성(밀양)박씨전국청년회(회장 종우)는 지난 7월 1일 전남 보성의 용산서원을 찾아 참배하고 경내의 보성의병기념관을 찾 았다.용산서원은2019년8월호4면에소개한바있으나이번청년 들의 참배와 새롭게 2020년 개관한 보성의병기념관, 숙종33년에 내려진사제문(賜祭文)을박성태대한적집자사봉사회전국협의 전회장의특성으로세워져다시한번더소개해본다. 용산서원은 남도의병의 아버지로 민생안전과 우국충정을 몸 소보여준죽천박광전선생을기리고호남학맥의맹주였던선생 의높은학문을이어온강학의장소이다. 1607년 죽천의 학덕과 충의를 평소 흠모하였던 이 지방 유림들 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 다가 2011년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2016년 12월에 준공 복원되었 다. 죽천 박광전 선생은 퇴계의 문인으로 퇴계선생은 “늦게 좋은 친구를만났으나이제작별하는이마당에어찌한마디말이있을 수 없겠는가(晩逢好友 遽爾相別 島得無言)”하면서 시 5수를 지 어주었다.“늙고 병들어 부끄럽게 실추된 점이 많았는데,그대가 일깨워주는바람에여러가지깨우침있었네(老病極漸多失墜待 君提更明)”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어 죽천 선생의 높은 학문을 가늠해볼수있다. 용산서원은전남보성출신의죽천박광전(竹川朴光前,1526~1 597)을 추모제향하고, 후학들의 면학을 조성하는 강학의 공간으 로1868년훼철되었다가2011년복원사업이진행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1607년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에죽천의학덕 과충의를평소흠모하였던이지방유림들에의하여추진창건되 었다. 1607년 죽천의 문인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이 건원통문(建 院通文)을 작성하여 열읍과 유림에게 전하고정길(鄭佶)을 비롯 한도내사림들의협조를얻어서원을건립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6 10년(광해군 2)에는 광 해군이 왕세자시절 그 의 사부였던 죽천에게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 찬관을 증직하였고, 가 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 제(致祭)하기도 하였 다. 창건 이후 100여년이 지난 1705년(숙종31)에 는호남유생임치당등이용산서원의사액을청하는청액소를올 렸다.당시청액의이유로는우선이미건립된지100여년이경과 하여 제향 하여 왔다는 점과 다른 설처(設處)가 없다는 점, 그리 고학덕과행의가사림의추앙을받을만하다는사실이지적되었 고,당시조정에서는예조판서조태채가주선하여사액의지명을 받았다. 1707년(숙종33) 용산서원이라 사액되었고 사제문을 내 려치제케하였다. 이후한차례의중수가있었는데죽천의7대손인박형덕과윤종 의의 ‘용산서원 중수상량문’이 그 사정을 알려주나 정확한 연대 는알수가없다. 1871년(고종7) 훼철령에 의해 철향되어 1987년 용산서원 유허 지길가에유허비를수립하였다. 2011년에는 전라남도 보성군과 도내 유림들의 협조로 현 위치 에복설(復設)을시작하여,2016년 12월에 준공하게되었다.용산 서원의 편액은 옛 서원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사액현판(賜額懸 板)을탁본하여새겼다. 한편죽천선생의문집죽천집에는용산서원건립을위한통문,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 재헌(齋憲) 9數가 전해져 조선시대 서원 건립과운영등을알아볼수있는중요한자료로서인용해본다. 용산서원은 사우(祠宇) 경덕사(敬德祀)와 내삼문 숭모문(崇 慕門)이있고강당인용산서원은전면5칸측면2칸으로양쪽1칸 씩은 방으로 되어있다. 동재는 수인재(修仁齋), 서재는 숭의재 (崇義齋), 외삼문은 진선문(進善門)이고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서원의 동재와 서재를 수인재(修仁齋)·숭의재(崇義齋)라 함 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죽천 선생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 로함열현감등을하면서仁을실천했고,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 의병장으로활약하여義를숭앙했다. 함열현감으로재임시선생은관사와동헌에‘시민여상(視民如 傷)’네글자를크게써붙여놓고백성을자애롭고편안하게다스 렸다. 시민여상(視民如傷)은 븮춘추좌씨전븯 애공(哀公)편에 나오는 말로 “나라의 흥성은 백성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고,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쓰레 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화가 된다.”라는 글에서 유래하고있어편액하나하나에죽천선생이백성을가장먼저생 각하는왕도정치에충실한유학자임을알수있다. 용산서원은 도학 과 절의의 선비,의병 장 죽천 박광전 선생 을 기리기 위해 세워 졌다. 죽천선생의 본 관은 진원(珍原), 휘 (諱)는 광전(光前), 자(字)는 현재(顯 哉), 호(號)는 죽천 (竹川) 또는 해교(海 嶠),경곡(瓊谷)으로도불린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의(而誼)이고, 어머니는 낭주최씨(朗 州崔氏)이다. 죽천선생은 1526년 정월 16일 전남 보성군 조양리 (현,조성면용전리)에서장남으로태어났다. 선생은자질이뛰어나아름다운품격을갖추었다.그는어린나 이부터수학하였는데그재능이뛰어났다.수학한지3년혹은4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유학의 진수가 담기 시구를 지었다.“도(道) 는 하늘로부터 명(命)하는 것이니 어찌 인위(人爲)로 하는 것이 라 한번 공자의 도를 크게 이루리라!(道自天命 豈人爲 爲一大成 孔子道)” 이는 ‘도위(道爲)’와 위도(爲道)‘의 두 글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보라는 아버지의 시제(詩題)에 즉석에서 지은 시이다. 이일을계기로죽천선생의학문에대한자질과장래성은주위사 람들의기대를한껏높여주었다. 죽천선생은부친의권유에따라흥양(興陽,현고흥군)에귀양 온인재 홍섬(忍齋洪暹,1504~1585,조선중기문신)에게서수학 하였다.그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흥양까지 수 십리 길을 걸어 다 녔다.그의문명이전라감사에게까지알려졌다.이에그는아버지 의 권유로 과거공부에 열중이었으나 사장학보다 내면의 수양에 힘쓰는 도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는 ‘성리대전(性理大 典)’을 구해 유학의 기본원리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두었으며, ‘중용(中庸)’등을읽으면서스스로깨우치는바가많았다. 죽천선생은20세에과거를보러갔다가석천(石川)임억령(林 億齡,1496~1568)을 만나 율기(律己) 공부에 치중하기 위해 과거 를 포기하고 귀향했다. 21세에 장흥 유치의 진사 문양지(文씨亮 之,증참의)의딸과혼인하였다. 22세 때에는 송천(松川) 양응(梁應鼎)에게 수학하였다. 죽천 선생은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수 학하였다. 출사하여 출세하기보다는 학문연구와 강학(講學)에 더큰의미를둔것이다. 30대에는 보성강의상류인 죽천(지금의 광탄)위에 정사(亭舍) 를 마련하고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천봉산(天鳳山) 대원 사와 우계(遇溪)등에 들어가 강학에 열심이었다.꾸준히도학에 관심을갖고자신의학문을연마하는데노력하였다.관직에는관 심이 없었다. 접반사 윤의중(尹毅中)의 종사관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또 스승인 인재 홍섬이 재상으로 복귀하여 만나기를 원했지만 권문에출입하는것은아니라하여찾아뵙지않았다. 죽천선생은 학문을 더 연구하여 41세에(1566년) 안동 예안에 계신이황을찾아가수학하였다.퇴계이황은그의진지함에놀라 정성껏 대하였다. 죽천선생이 퇴계를 떠나 올 때 퇴계는 손수 초 사(抄寫)한 ‘주자서절요(朱子節要) 초본 8책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퇴계선생이 죽천에게 지어준 시에는 각별한 마음이 담겨 있다. “늦게 좋은 친구를 만났으나 이제 작별하는 이 마당에 어찌 한 마디 말이 있을 수 없겠는가(晩逢好友 遽爾相別 島得無言)”하면 서 시 5수를 지어주었다. “늙고 병들어 부끄럽게 실추된 점이 많 았는데,그대가 일깨워 주는 바람에 여러 가지 깨우침 있었네(老 病極漸多失墜待君提更明)”라는시구를 다시 덧붙여 준 것이다. 이 시를 통해 퇴계 선생이 죽천을 얼마나 아꼈는지,석별의 아쉬 움이 얼마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죽천보다 25살이나 위였다. 죽천선생은‘주서절요’를더욱연구하여의문나는사항은조목 조목 기록하여 서신을 통해 묻고 답을 구했다. 묻고 답하는 글을 묶어서‘절요질의(節要質疑)’라는귀중한책이나오게되었다. 죽천은늦은나이에진사시에급제하였다.이후46세에유희춘 의 천거에 의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어 관계에 처음 나갔다. 이 때유희춘이호남안찰사로있으면서선비다섯사람을천거함에 선생을 제일인자로 삼았다. 선생은 이어서 헌릉(獻陵,태종과 원 경왕후의능)참봉으로나갔다. 죽천 선생은 경기전과 헌릉의 참봉으로 재임시 원내에서 잡희 (雜戱)유연(遊宴)전렵(田獵)등을 금지하였다.그 후에 동빙고 별좌를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광해군을 가르쳤는데 기초공부를철저하게시켰다.이에그는왕자사부로선조의치하 를 받았다. 이후 감찰을 마지막으로 내직에서 벗어나 함열, 회덕 등의현감을지냈다.그는외직에있는동안‘시민여상(視民如傷) 을 좌우명으로 삼아 애민(愛民), 송사(訟事) 엄정, 관고보전(官 庫保全)을철저히하였다. 64세에 귀향하여 학문과 강학에 열성을 쏟았다.67세에 임진왜 란을 맞아 임계영,김익복,문위세 등과 의병을 모았다.그는 노령 과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어서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 였다.정유재란이일어나자죽천선생은70이넘은나이에도불구 하고창의를이끌고화순동복등에서왜군과싸웠다.그러나그는 병이심해져11월18일운면을달리하였다.이때나이72세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남도의 열읍 에 ‘국운의 존망이 경각 이니 어이 좌이대사하 랴. 일제히 봉기하여 생 민을 보고하고 나라를 구하자.’고 거의 격문을 냈다. 이때 창모에 순응 한 애국투사가 700여명 과 군량미 300여석을 모 곡하여 7월 20일 전남 보 성동헌관문에서출전식을거행하였다.죽천선생은67세의노령 을 한탄하며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며,문인 안 방준을 도체찰사 정철에게 군무를 품의케하고 장자 근효를 참모 관으로처남문위세를양향관으로,정사제를종사관으로하여‘호 (虎)’자를 장표로 하고 낙안 순천 구례 남원을 거쳐 금산과 무주 에서적을무찌르고성주와개령을수호하여전공을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에 문인 안방준과 생원 박사길 등이 의병장으 로추대하니72세의노구를이끌고화순동복에진입하여전판관 송홍렬을 부장으로 하여 적벽전에서 대승하였으나 기력이 쇠진 되어1597년11월18일모후산에서서거하였다. 죽천박광전선생의애민과호국정신을후세까지이어진다.임 잔왜란에장자만포박근효(晩圃朴根孝,1550~1607)는 아버지가 의병을일으키자참모를맡았고이후아버지가병으로군사를거 느리지 못하게 되자 전라좌도 의병장으로 추대된 임계영의 휘하 에서종사관으로활약하였으며,차자옥현박근제(玉睍朴根悌,1 560~1629)임진왜란에 임계영의 휘하에서 형과 함께 활약하였으 며,정유재란때아버지가다시의병을일으키고의병장으로추대 되자종사관으로배종하면서공을세웠다. 병자호란에는박근효의첫째아들아수박춘수(我誰朴春秀,15 90~1641)공이동생동계박춘장(東溪朴春長,1595~1664),사촌동 생 해월당 박춘호(海月堂 朴春豪, 근제의 子) 손자 요천 박진형 (蓼川朴震亨,죽천공증손자)과함께의병을모집하고군량과병 기를모아서안방준과더불어창의했다.이후강화를하였다는소 식을듣고모은곤량을모두관에바쳐선비들을가르치는데쓰게 하였다. 보성은 예로부터 충 의 열사를 많이 배출하 여 의향(義鄕), 서편제 보성소리븡민족음악이 살아 숨 쉬는 예향(藝 鄕), 유구한 역사와 전 통을 이어온 우리나라 최대의 차 주산지인 다 향(茶鄕)의고장이다.특히,의향(義鄕)보성은외침을막기위한 이들의정신을이어가기위해직븡간접적으로싸웠거나해당문화 유적이나 선양사업이 있는 777명의 의병을 조사븡발굴하여 ‘보성 의병사(2018)’를발간하였다. 보성의병들은나라가위기에처한경우온가족이스스로나섰 으며, 시대가 바뀌어도 그 후손들은 국난극복을 위해 다시 나섰 다. 또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총칼 의 찔림과 굴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죽천 박광전 선생의 유 적지인용산서원인근터에‘보성의병기념관’을건립하고의(義) 로써 일어난 선인들을 기억하고 선양하고자 2020년에 개관하였 다. -보성의병기념관팜플렛에서- 뱚청년들과함께하는유적탐방 문강공죽천박광전선생용산서원 (전남보성군) 용산서원①사우경덕사②내삼문숭모문③강당용산서원④동재수인재⑤서재숭의재⑥외삼문진선문⑦의병기념관 용산서원(龍山書院)의건립과복설 1707년숙종임금이내린사제문을지난6월말 돌에새겼다. 용산서원의구조 배향인물 지난1일청년들이경덕사에참배하고있다. 임진왜란과의병창의 의병기념관2층에서박형기전대종회장이4대 에걸친의병에대해설명하고있다. 후대로이어지는호국정신 보성의병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