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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7월31일 월요일 12 (제199호) 기획 금서재박광보선생(1486~1554)은유명조선국징사(徵士)라는단어가수식어처럼붙어있다.징사(徵士)란학문과 덕행이높아임금이부르나나아가 벼슬을하지않은은사(隱士)를말한다.금서재선생은진사시에우수한성적으로합격하여성균관에서도장래가촉 망되어관료로성장할수있는특별 한자질을갖추었으나교유하던문인과숭모하던사림파들이사화에연루되어참혹한최후를지켜보면서홀연히자 취를감추고오직학문탐구와후 학양성에만몰두한은사(隱士)이기에지역의열읍(列邑)의선비들이추존하여고려때의학자안향(安珦:1243∼130 6)선생이배향되어있는합호사에 추배하여높은학덕을기렸던명현(明賢)이다.상주박씨찬성공파후예는조선조에들어고관대작(高官大爵)이많이 배출된명문가이다.조선중종조에 옥곡공과금서재공,필재공,율촌공은가문을더욱빛낸인물(四賢)이다.특히금서재공과율촌공은도학과명절로서 원우(院宇)에배향되었으나 대원 군의서원훼철령으로훼철된이후위패를모시지못했다.그러나최근지역유림들의공의로조만간금서재공이합 호서원에배향될것으로보여소개 해본다. 선생은학행으로세상에우뚝드러났다.조졸하였 던생원휘린(璘)과어머니덕수장씨사이에서사형 제중장남으로경기도파주에서1486년19월18일태 어났다. 어머니 덕수장씨는 성정(性情)도 엄하면서 법도(法度)로 자식을 교육하니 순리와 규범(規範) 에조금도어긋남이없었다. 아들들을위하여서실(書室)을지어한곳에서강 습(講習)케하고손님이오면교대로한사람씩의관 (衣冠)을갖추고나가뵈옵게하여허랑하게빈둥빈 둥 놀지 못하게끔 하여 마침내 사형제가 소과에 오 르고삼형제가대과에오르는등성취(成就)하니정 암조광조선생과여러어진분들이칭찬하기를맹모 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지금 보는 것 같다고 하 였다. 이에 금서재공의 도학과 문장은 세상에 떨쳤고, 첫째 동생 광필(光弼)은 대사성(大司成)이요, 둘째 아우 광좌(光佐)는 형조판서(刑曹判書)요 셋째아 우(막내) 광우(光佑)는 호(號)가 필제( 齋)인 데, 기묘제현(己卯諸賢)의 피화사(被禍事)로 대궐 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상소(上疏)하여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였고, 을 사(乙巳,明宗 元年, 1545)에는 문정황후(文定王后) 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여 사화(士禍)가 다시 일어나니 사간(司諫)으로 쟁론(爭論)하다가 국문 (鞫問)을 입었고 사후(死後)에 정절공(貞節公)에 사시(賜諡)되었다. 선생의 휘는 광보(光輔) 자(字)는 국주(國柱), 호(號)는 금서재(琴書齋)이다. 천품(天品)이 심 히 고상하고 어질어 너그러운 포용력이나 재능이 일찍나타나서어버이를섬김에그 지성으로 효도 (孝道)를 다하고 모든 아우와 함께 우애(友愛)가 돈독할 뿐만 아니라 함께 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 에 밝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기본으로 문예(文 藝)가 넉넉하여 일거에 상상(上庠:성균관)에 올 랐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이름이라는 것은 실상 (實相)의 손님이니 그 이름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는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이름이란 실제에대해서는손님이라고 할것인데 나보고 장 차 손님이 되라고 하는 말인가.(名者 實之賓也 吾 將賓乎)라는 말이 나오는데 선생은 이름이란 이 름에맞는 일을감당하는 자리이지 권위를내세우 거나명예를 위한 것이아니라며당시의시대상을 읽은 것으로 곧바로 모부인(어머니 덕수장씨)을 모시고 청주의 모과동(木果洞)으로 은거하기에 이른다. 중종조(中宗朝)에 한성의 남부주부(南部主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기묘사화(己卯士 禍) 이후로는 더욱 진취(進取)의 뜻이 없음을 보여 준것이라하겠다.청주(淸州)로물러나숨어살면서 정주학(洛 벵 , 락민)의 모든 서적에 깊이 몰입하여 그진수(眞髓)를맛보았으며,한가한틈으로는거문 고를 타고 시(詩)를 읊어 초연자적(超然自適)하니 때에 송재(松齋) 한충(韓忠)이 정척산(正尺山)에 살았는데시내하나사이로서오르락내리락서로상 종(相從)하여 질의(質疑)하고 강마(講磨)하였다. 후에 유일(遺逸)로 조정에 천거되어 나라에서 부르 는전지(傳旨)가있었다. 선생은교만하게사양함은미안하다하여잠깐나 가 은명(恩命)을 사례하고 마침내 돌아와서 초복 (初服, 관리 이전의 옷)으로 임천(林泉)에 상반( 숙 伴)하여 고상(高尙)한 포부()抱負로서 지내니 세상 사람들에 쉽게 보였지만 대체 별다른 각오를 두고 각근(脚 님 , 입장을 굳건히 하다)을 정하여 세운 것 은사람이미처알지못하였다.가정갑인(嘉靖甲寅, 明宗9,1554)7월1일에돌아가시니향년(享年)69세 였다. 부인 함양여씨(咸陽呂氏)는 부사(府使) 정보 (貞輔)의 따님이며, 정평공(靖平公) 이 ( 의 ) 현손(玄孫)인데, 선생보다 1년 먼저 돌아가셨고 후 에 선생의 묘소(墓所)에 부장( 뻤 葬)하였다. 슬하에 사남(四男)을 두었으니 장자 옹( 죙 )은 학행이 있었 고,차자 윤양(胤楊)은 음사부장(蔭仕部長)이고,셋 째영(領)은첨추(僉樞),넷째는영(穎)이다,2녀(二 女)중첫째사위는민희남(閔喜男)으로진사(進士) 이고둘째는윤혼(尹渾)이다. 선생은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겼고, 상(喪) 을 당해서는 여묘(廬墓)를 살았으며, 아우들에게 는 사랑이 도타웠고 부부간에는서로 공경함을 손 님 대하듯이 하였으며,자식은 예법(禮法)으로 가 르쳤다.선생의 성품은 간결하고 엄중하고 말씀은 드물었으며 세상사람을만나며성과 이름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평상시에는 역상(易象,역의 괘에 나타난 현상)을 즐겨보았는데 어쩌면 선생 은 진퇴(進退)와 존망(存亡)과 길흉(吉凶)과 소 장(消長,쇠하여 줄어 감과 성하여 늘어 감)의 변 화에 깊었기 때문에 바른 도(道)가 없어지는 세상 을 만나서 능히 몸을 숨겨 해(害)를 멀리한 것인 가 보 다. 선생은 한 시대의 제현(諸賢)과 함께 종유(從遊) 하였고,학문의 조예는 의당 말할 것이 없는데,정절 공(貞節公,아우 광우)이 정미년(1547년)에 가산 적 몰(籍沒)에 들어갔고, 임진·병자 호란을 겪으면서 문헌이모두산실(散失)되어자세함을알수없으니 애석하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헌 안문성공(晦軒 安 文成公)이 사문(斯文)을 일으킨 공이 있으니 기성 (箕聖:기자)의 다음이다.”고 하고 존경하고 흠모함 이 매우 깊었다. 후에 열읍(列邑) 선비들이 선생을 연기군합포의합호사(合湖祠)에추배한것또한공 의(公儀)가증험이되어서정한것으로매산홍직필 선생의당시축문을지었으니『효우강엄(孝友剛嚴) 효우는강엄하고,시례시정(詩禮是程)시와예를공 부해 지켰네, 비둔고도(肥遯高蹈) 초야에 은둔하여 고고하게 살았으며, 영세류명(永世流名) 영세토록 이름 전하네』고 하였으니 이는 족히 선생을 중(重) 히여기었음이다. 선생의 본관은 상주(상산)이다. 상주(상산)박씨 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인 언 창(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사벌 주(沙伐州 : 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下賜)받아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아들 욱 (昱)이고려조에서개국공신(開國功臣)에책록되 고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이 고,손자 양유는 상군사로거란이 침략해오자중순 사 서희를 파견하여 담판케 하였다.사벌대군의 10 世에이르러휘원정(元挺)은첨의정승(僉議政丞) 으로아들3형제를두었는데장남전( 櫻)은봉상대 부 전법총랑(奉常大夫 典法摠郞)으로 총랑공파, 차남 여(侶)는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첨의찬성사 (三重大匡 輔國崇祿大夫僉議贊成事)에 상산부원 군(商山府院君)에 봉해져 찬성공파로 각각 파조 가된다. 찬성공은 금서재공의 7대조이다. 고려 충선왕 기 유(己酉,1309년)밀직부사,경술(庚戌,1310년)에 동 지밀직사사, 1312년 밀직사사로 원나라 국가경사에 축하사절 정사(正使)로 파견되었다. 1319년(충숙왕 6)에 평리(評理), 1321년 삼사사(三司使)을 역임했 다. 찬성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의 휘는 지헌 (之軒)으로광정대부밀직사사,좌부대언판서,전리 판서를 지냈으며, 차남 지영(之永)은 첨의평리(僉 議評理)와 조선 때 평택현감에 제수되어 그곳 지명 을따평택박씨로분관하였다. 밀직사사(密直司事)지헌(之軒)의아들돈(惇)은 봉익대부 예의판서인데 5대조이다. 고조부 양생(良 生)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조부 유(濡)는 사헌부 감찰과 문화현령, 가선대부 대사헌이다. 조부 휘 정 지(貞地)는통훈대부내자시정,통례원찬의(通禮院 贊儀)를 지내고 아버지 휘 인(璘)은 생원으로 관직 은 공조좌랑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곧아 가정에 법 도를 세웠으며,아들 4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성취시 켜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한 여러 어진 분들이 맹 모삼천지교를보는것같다고말했다. 선생은정암조광조선생을존숭(尊崇)해왔다.정 암은금서재공의어머니가아들을훈육하는것을보 고 맹모삼천지교를 본 듯 하다고 하였으니 정암 선 생은 선생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추정할 수 있고,또한 정암 선생의 사상을 이어받은 훈구세력 이아닌사림파로분류된다할것이다.그리고아우 필재공은 성균관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때 태 학 생 수 십 명 을 창솔하여 대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통곡하며 기묘사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 다. 조카 율촌공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충암 김정과 비록 나이는 8살 연하이지만 사화 이 전에 서로 젊은 나이부터 도의(道義)로 교제하였 다. 이렇듯 기묘 제현과 밀접한 관계였던 금서재공은 숭모해온 제현들이 억울하게 화를 당하고 훈구세력 들의득세에환멸을느끼지않았나조심스럽게진단 해 본다. 연동 합호서원은 세종특별자치시 원합강1길 262 -6 소재에 있다. 1716년(숙종 42) 안경신·안경인·안 경정등이영당(影堂)을건립하여고려때의학자안 향(安珦:1243∼1306)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받 들어왔다. 이후 헌종9년(184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영당의 당호를 합호사(合湖祠)로 개칭 덕재 신천(德齋 辛 횡 ,1264~1339)과금서재박광보선생을추배하여선 현배향과지방교육의일익을맡았다. 그러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합호사(合湖祠)를 건립하여 춘추로 향사하다가, 1949년 전국 218개 향교의 동의를 얻어 합호서원을 복설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기와집으로 현재 연기유림회 주최로 매년 9월 12일안향의제삿날에제사를지낸다. 안향은 순흥(順興) 출신으로,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1260년(고려 원종 원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1 270년 삼별초의 항쟁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 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86년 (충렬왕 12)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연경 (燕京)에서 처음으로 븮주자전서(朱子全書)븯를 보 고 필사하여 고려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후 성리 학 연구에 몰두,고려 말기의 유학 진흥에 큰 공적 을남겼다. 덕재 신천은 고려후기 총랑, 지공거, 판밀직사사 등을역임한문신으로본관은영산(靈山).호는덕재 (德齋).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14년(충숙왕 1) 3월 에선부직랑(選部直郞)이되었다.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1319년 6월에 총랑(摠 郞)으로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극력 주 청하여 스승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하였다. 1 326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달중(李達中) 등을 발탁하였으며, 그 뒤 1339년 12월판밀직사 사(判密直司事)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 다. 작품으로 안동(安東)의 영호루(暎湖樓),청주(淸 州)의 공북루(拱北樓),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 亭)을 읊은 시가 있으며, 삼척팔경(三陟八景)의 하 나인 「와수목교(臥水木橋)」와 평해(平海)의 경치 를 읊은 「요곽장천여고리(繞郭長川如故里)」등의 시가전하고있다. 한편 연동 합호서원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지정되었다.그러나충남연기군일부 와 공주시 일부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가 출 범함에 따라 2012년 충남 문화재자료에서 해제되었 다가 같은 해 12월 31일 세종시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최근금서재박광보선생을원래대로추배 해야한다는지방유림의청원이있어수차례공의를 거쳐이를적극추진하여한다는데의견이모아져조 만간배향될것으로보여형조판서윤치겸(尹致謙,1 772~1853)선생이지은봉안축문을소개해본다. 림하숙덕(林下宿德, 산림의 유덕한 원로는) 아선 생최(我先生最, 우리 선생이 제일이네) 학수행독 (學邃行篤, 학문 깊고 행실 돈독해) 금문울애(今聞 蔚욕 ,아름다운이름애연하네)효우장엄(孝友莊嚴, 효우하고 장엄하여)모훈유수(母訓有受, 어머니 가 르침 받았네) 필옹난형( 翁難兄,필옹이 형이요) 송로외우(松老畏友,송로의외우였네)침잠완이(沈 潛翫視 , 침착하게 마음 써) 락민지지(洛 벵 之旨, 연 구한 바는 성리학이네) 효효무견( 畝 굣 , 부지 런히농사를지으며)영리시치(榮利是 勖 , 영리 부끄 럽게 여겼네) 좌우금서(左右琴書, 좌우에 거문고와 책 두고) 몰이후이(歿而後已, 죽을 때까지 읽었네) 수풍려속(樹風勵俗, 풍속을 심고 격려해서) 위후세 사(爲後世師, 후세의 스승 되었네) 휘촉종막(徽 縱邈, 아름다운 자취 멀지만) 긍식재자(矜式在玆, 모범이 여기에 있네)의여문성( 초歟文成,훌륭하다 문성공[율곡 이이의 시호]은) 아동부자(我東夫子, 우리 동방의 부자이네) 창기문교(創起文敎, 처음으 로문교일으켜)정학유시(正學攸始,정학이비로소 열렸네) 령우재이(靈宇在邇, 영우가 가까이 있어) 다사함조(多士咸造, 선비들이 다 달려가네)량정분 필(兩丁芬苾,두 정일에 제사지내) 일방숭보(一方 崇報, 온 고을이 높이 받드네) 광대사숙(曠大私 淑,사람들 오래도록 사숙하니)례의추배(禮宜追 配, 추배해야 마땅하네) 연길타향(涓吉妥享, 길 일 가려서 제향하여) 건성사채(虔誠舍菜. 경건하 게 석채 올리네) 변두유천( 븅豆有薦, 변두를 올 리니) 긍신용청(矜紳聳聽, 유생들이 경청하네) 장수송현(藏收誦絃, 책 읽는 소리 끊어지니) 면 회범형(藏收誦絃,길이 모범을 생각하고)어언시 축(於焉尸祝, 어언 축문 읽으니) 만세유녕(萬歲 攸寧,만세토록평안하리) 선생은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한 제현들이 성 리학에바탕을둔이상정치를주장하던때 종유하 여 물어 배우고 사군자(四君子,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 출처의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바탕으로 두 었다. 그러나 숭모(崇慕)하던 제현들이 기묘사화로 인 해화를당하자영화(榮華)를멀리하고청주시모과 동에은거하여오직성리학탐구와후진양성에매진 하였고, 특히 효우가 돈독했던 선생의 삶은 나아가 고 들어갈 때를 알고 있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 리에게교훈을주고있다. 그러나 선생의 문적이 동생 필재공이 화를 당하 고,임진·병자 란을 겪으면서 산실되어 아쉬움을 주 고있으나문중에서선조현창사업에적극나서고있 어다행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선조의업적을후 손이 아니 하면 어찌하랴’라는 말이 생각난다. 정승 판서도후손이못나면생원진사보다못하고생원진 사도후손이잘나면정승판서보다낫다는말이있지 않은가. ‘상주박씨 찬성공파 문중사현록’,‘상주박씨세현 보문지’등 각종 서적을 발간하여 훌륭한 선조를 드 러내고있고,한편으로는박연석대종회장을비롯한 박재인사무총장과중중원로들이선조현창에적극 나서고있어노고에찬사를보낸다. 징사금서재박광보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금서재공묘소및묘표,충북청주시흥덕구오송읍상정리산57.금서재공의묘표는유명조선징사금서재박공광보국주지묘(有明朝 鮮徵士琴書齋朴公光輔國柱之墓)라적혀있다. 합호서원. 합호사전경. 맺음말 합호사금서재공봉안축문 (合湖祠琴書齋公奉安祝文) 합호서원과금서재선생 선생의사상 선생의선원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