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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공포의식'의 내면화 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해남지역 주민을 학살했을까? 일제 강점기 해남 군에는 '해남소작인회' 등 농민조직이 결성, 1930년대에는 소작쟁의 운동과 혁명적 농민 운동이 활발했다. 또 1930년대 전라남도 최대의 조직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군 북평면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해방 후에는 '해남군 인민위원회'와 '농민위원회'의 결성 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 군정도 진주 초기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장 김 정수를 초대 해남군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1946년 11월 11일 일어난 '해남추수봉기'를 기점으로 미 군정은 좌익진영과 농민운동세력을 탄압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해남의 농민운동세력과 진보진영을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남경찰 은 국민 보도연맹사건으로 독립운동가와 농민운동세력을 1차 싹쓸이를 했다. 이후 나주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해 2차 싹쓸이를 했다. 싹쓸이를 하면서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이나 그렇지 않은 주민도 '빨갱이'로 몰아붙여 죽였다. 두 번의 광풍을 겪은 해남 주민들은 '빨갱이'라 는 말 앞에는 입도 뻥긋 못했다. 공포의식이내면화돼 이후 반백 년 동안 피해의식에 젖어 살게 되었다. 손녀에게 젖을 물린 할아버지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김경예가 구정물을 얻어 와 돼지우리에 쏟아부었을 때였다. 방문 창호지에 조카를 안은 아버지의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김경예 가 방문을 여는데 아버지가 조카(죽은 김재수의 딸)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