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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석조여래입상이 북쪽을 바라보는 절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마의태자가 서라 벌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지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그만한 세력과 경제력이 있었을 리 만무한데, 미륵불인 석조여래입상이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 공주가 세운 북쪽덕주사의 마애불과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미륵불에 더한 신라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고려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신흥국가의 염원을 담았다고도 한다. 인근 마을의 고구려식지명 상모리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지세에 따라 주봉 월악산을 보고 북향 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의도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그 저 중원의 운명이다. 중원은 충주의 옛 지명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9주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이라 했다. 고려 때 충주로 개칭했으나, 오랜 시간 중원부나 중주 등으로 같이 불 렸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웅이 할거하는 격전장으로 종종 등장한다. 충주는 삼국시대에도, 통일신라를 지나 후삼국 때도 가장 첨예한 전장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 또한 거기에서 기원할 것이다. 미륵대원은 사찰의 창건 시기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략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 려 태조와 혼인한 충주 유씨 집안에서 창건,불사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미륵불이 간직한 의미와 가치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미륵불은 불교의 부처 가운데 말세에 중생을 구제하 러 올 것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부처다. 석조여래입상 앞에는 그 증거처럼 염원이 서린 바위가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날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바위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을 돌릴 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고, 쌀알이 부서지면 딸을 낳았다고 전한다. 화강암 바위의 손바닥만 한 머리 부분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윤기가 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그 위에 더해졌을 까. 빈 절터가 허전하지 않은 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끝나지 않은 바람이 담겼 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