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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 (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 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 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 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 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 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 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미황사 응진당이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 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 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 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 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 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