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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 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 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2. 중수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 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 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 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 표충사(表 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 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주요고승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 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 (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 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 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 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 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저술을 후세에남겼던 유일 (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