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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오우가] 고산 윤선도가 56세 때 지은 오우가는 전체 6수의 연시조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시조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수인 서시에서는 벗 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다음부터 이어지는 다섯 수에서는 수(水-물), 석(石-돌), 송(松- 솔), 죽(竹-대), 월(月-달)의 특질을 특출한 시각과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담겨진 자연물들은 모두 윤선도가 추구했던 유교적 덕목과 이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로서 다른 자연물들과의 대비(물의 경우에는 구름, 바람과의 속성 대비, 바위의 경우에는 꽃, 풀과의 속성 대비 등) 속에 그 특징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주요 소재와 몇몇 단어를 제외한 전 구절을 모두 한글로 표현하여 자연물이 지닌 관념성을 아름다운 우리 말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윤선도] 고산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문인이다. 26 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나 이후 수차례의 당파 싸움에 휩쓸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는 윤선도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서인 세력에 맞서 왕권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서 인의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의 생에 있어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배, 은거 기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 신의 문학적 역량을 다지고 빼어난 작품을 세상에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문학의 특징은 자연 친화, 자연과의 거리감이 극도로 좁혀진 삶을 다루었다 는 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윤선도의 삶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 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윤선도는 여타의 시인들과는 달리 자연을 다루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관념적인 경향으로 빠지지 않고 현장성과 사실성을 살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윤선도였지만, 그는 유배기간동안 바라보았던 자연을 단순한 도피처나 일시적인 피난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을 진실한 삶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자연이야 말로 자신에게 인간 본연 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윤선도의 자연친화적 작품들은 단순히 안빈낙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