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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내가 김남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93년 무렵이다. 서울 인사동의 어느 술집 에서였다.… 후배들이 술 마시고 떠들던 모습을 한량없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기억. 한없이 푸근한 눈빛의 기억. 그 눈빛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의 눈빛이 아니라 바로 햇빛 바른 고향집 마루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생들을 바라보는 큰오라비의 눈빛이 었다.”(소설가 공선옥, ‘내가 만난 김남주’, 2000년) 그런 자리에서는 으레 노래를 청하게 마련이었는데, 김남주는 마지못한 듯 일어나서 18번을 불렀다.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지그시 눈을 감고 구슬피 노래를 부르던 시인. 그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5월 어느 날 밤이었다”로 시작되는 ‘학살’을 썼고,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든든 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다 쓴 시’)를 썼으며,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조국은 하나다’)를 쓴 바로 그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죽어서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21세기 어느 날, 미국이 벌인 지난 세기의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견뎌낸 베트남의 해방전사 출신 한 시인이 그를 찾았다. 그는 절을 하고 나서 한편의 시 를 바쳤다. “사람들이 당신은 돌산처럼 강하다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돌산도 석회처럼 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당신은 강철이라 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강철도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정신이라고 이상(理想)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나는 믿는다./ 정신은 불이 붙어도 타지 않고/ 단단한 도끼날 앞에서도 휘어지지 않는 다.”(반레, ‘시인 김남주를 생각하며’) 김남주는 이미 국경을 뛰어넘어 자유를 사랑하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이들의 영원한 벗이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