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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 77년에는 고향에서 해남농민회를 결성했고, 광주에서 황석영·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 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그후 상경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 전위대 ‘전 사’로 활동한다. 79년 구속돼 이후 길고 긴 투옥생활을 시작한다. 감옥에서 그는 무수한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썼다. “나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근로대중 들의 생활과 투쟁을 그린 문학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봤다. 이런 작품을 쓴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내가 동지적인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였던 시인들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나에게 준 위대 한 교훈은 인류에게 유익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고, 자기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불굴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전사라고 한 것은 꼭 무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거나 산에 들어간다는 뜻만은 아니다.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의 형태에 관계 없이 전사인 것이다.”(산문 ‘나는 이렇게 쓴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돼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우유곽에 못 으로 긁어 쓴 시가 한편 두편 밖으로 흘러나왔고, 대학생들은 그의 시를 의식화 교재에 삽입해서 읽었으며,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는 특히 유명하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 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 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시 ‘자유’) 88년 12월21일, 그는 9년 3개월여 만에 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다니면서 시를 읊고 강연을 했다. 그의 시 낭송은 성내운의 그것과 더불어 당대 최고라는 평을 받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젊은 문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 를 대개 처음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본 뒤에는 마치 10년은 가깝 게 지낸 것처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