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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김남주는 아버지의 그런 기대를 저버린 불효자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몇년 후인 69년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당시 정국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어 매우 어수선했다. 동생 김덕종의 기억에 따르면 한번은 형이 눈덩이가 시커멓게 된 채로 집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교련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탄에 맞아 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때 이미 그의 길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길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글자 모른 사람들은 술이라도 몰래 해묵고 살 것디냐. 못 배운 집 나락은 어디 일등 수 매해가더냐. 삼등 아니면 등외다”(산문 ‘나는 왜 남민전에 참가했는가’)라고 늘 신세타령 을 하던 아버지의,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민중의 삶 속으로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가는 길 이었다. 72년 가을 그는 복학생 이강과 더불어 동학혁명 전적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은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배포했다. 결국 그들은 반공법상 반국가단체 구 성 예비음모 혐의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 수사를 받았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 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 (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 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 는”(시 ‘진혼가’) 김남주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8개월 만에 석방됐다. 74년 김남주는 계간창작과비평에 시 ‘진혼가’ 등 7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시를 뽑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의 시가 “칠흑 같은 어둡고 깊은 밤중의 잠 속에 빠져있는 혼수상태의 문단에 칼을 들이대 는 섬뜩함으로 다가 온다.”고 평했다. 그러나 결코 문단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곧 싸움이었다. 75년에 김남주는 전남대 앞에 ‘카프카’라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냈다. 그곳은 광주 운동권의 총 집결지이 자 문화 사랑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