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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1980년대 대부분의 민중시들이 형식면에서 하나의 구호에 가깝다면 김남주의 시는 그 러한 민중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름의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반복, 패러디(parody), 풍자 등은 그 증거이다. 특히 식민지 시대 유행가 가사에서 김수영, 김소월(金素月)의 시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의 시구 를 인용하여 텍스트 사이의 상호관련을 맺고 패러디하는 수법은 다른 한국 시인들에게서 는 발견하기 힘든 예라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으로 『진혼가(鎭魂歌)』·『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 시선집 『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학살』·『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가 있으며, 산문집 『시와 혁명』,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프란츠 파농)·『아트 트롤』(H. 하이네) 등이 있다. 이제 아무도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체 게바라가 하나의 문화코드, 티셔츠에 새겨지는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었듯이, 혁명은 이제 거대한 전 지구적 자본의 총공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한 시인, 생 전체가 혁명이었던 한 시인을 여전히 기억한다. 김남주(1946~94). 그 스스로는 시인이기에 앞서 전사이기를 원했다. ‘자기 땅에서 유배 당한 자’(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 김남주 역)로서 혁명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 서 그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담했고, 재벌 회장 집의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고, 체포 돼 15년 징역형을 받았고, 끝내는 혁명의 길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를 더 도 덜도아니고 꼭 이 땅에 이런 시인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바로 그 시인으로서 기억한다. 김남주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십년 이십년 남의 집 부자집 머슴살이였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 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시 ‘아버지’) 김남주는 공부를 잘했다. 그는 해남중학교를 나와 그해 유일하게 광주의 명문 광주일 고에 들어간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어서어서 커서/ 면서기 군서기가 되어 주기를 바랬다/ 손에 흙 안 묻히고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닥하는 그런 사람 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 부러워했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말해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골방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인다고 했다”(‘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