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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6월30일 금요일 12 (제198호) 기획 영덕농아당종택(盈德聾啞堂宗宅)은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320호로지정된유서깊은고택이다.당초목사공종택 으로지정관리되었다가지난4월 20일도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지정명칭변경고시(경상북도고시제2023-111호)에따라농아당종택으로변경되었 다.농아당종택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박홍장이살던집이다.박홍장朴弘長(1558-1598)은임진왜란때활약한장수로유성룡이추천하여왜란을수습 하기위해일본에통신사로파견되 었다.도요토미가사절일행을멸시하였으나조금도굴하지않고나라를위해의지를굽히지않았다.이가옥은선조 3년(1570)에세워전하다가숙종46 년(1720)건물의일부가소실되었다.앞면4칸·옆면2칸규모이며,지붕은옆면에서볼때여덟팔(八)자모양을이루 는팔작지붕이다.천장에초가집이 까치구멍집과비슷한형태인투창이있다는점이특이하다.이에명칭변경사유와건축물의특징,농아당박홍장선생 을함께소개해본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덕 목사공 종 택(牧使公宗宅)」은 농아당(聾啞堂) 박홍장(朴弘 長)의 종택으로서 지정당시에도 「목사공 종택」과 「농아당 종택」이 함께 불려졌다.목사공은 무안박씨 문중에서 농아 당 박홍장을 부 르는 말로 조상 의 존함을 함부 로 부를 수 없어 조상의 마지막 벼슬명에 존칭 을 높여 부르는 공(公)을 붙여 부르는 것에서 유래 되었다. 목 (牧)은 조선시 대 행정구역이 며 목사(牧使) 는 그 목을 다스 리는 벼슬이다. 따라서 전국에 목사관직을 지 낸 인물은 수없 이 많다. 「목사 공종택」이란명 칭은 무안박씨 문중 내에서 사 용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 나 농아당 박홍 장의종택을표현하기에는분명한한계가있다.따라 서문화유산의정보전달,인물의의미부여를위해서 는 영덕 목사공 종택 보다는 영덕 농아당 종택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문화재 지정명칭 부여지침을 확인한 결과 영덕 농아당 종택이 (소재지 + 인물의 호 + 종택)의 지침에도 부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또한현재국가민속문화재중“종택”명칭을사용 하고있는25개소를분석한결과 17개소가 (소재지+ 인물의(당)호)를문화재명칭으로사용하고있는것 이 확인되었다. 경상북도지정문화재의 경우 명칭변 경사례를분석한결과(소재지+인물의호+종택) 을사용하는것이확인되고있다.이러한이유는문중 내 족보에서만 통용되는 파종가의 명칭보다는 인물 의호이자당호를더욱선호하는것으로확인되었다. 농아당 문중에서는 계속해서 농아당 박홍장의 현창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예로농아당선조의자료수집및학술연 구,선조묘역정비(농아당선조묘역정비,후손32개 묘소의 묘표조성), 종택의 관리 (사당 복원, 재실 건 립),그리고이러한명칭혼란을해소하기위해「목사 공파」에서「농아당파」로변경하기에이르렀다. 이러한 모든 근거를 토대로 판단해 볼 때 영덕 「목 사공종택」보다는박홍장의호를사용한「영덕농아 당종택」으로변경하는것이타당할것같다. 농아당종택은목사(牧使)벼슬을지낸농아당(聾 啞堂)박홍장(朴弘長)이칠성리에이사와서지은종 택으로 건립시기는 157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칠 성리자연마을중가장안쪽의‘진밭’중앙에산을등 지고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목사공 종택 입구로 낮은 토담이 둘러져 있으며, 토담 안쪽으로 좌측 목 사공종택과우측단층양옥집이위치한다.현재남아 있는좌측건물은안채이며,우측양옥집에는사랑채 가위치하였으나퇴락된후관리인이거주하기위한 목적으로양옥집을새로지었다. 농아당 종택은 정면 3칸 반,측면 2칸 규모의 팔작 지붕 기와집으로,막돌 쌓기 한 기단 위에 자연석 주 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후 5량가의 가구를 결구했다. 겹으로 구성된 건물로 앞 열에는 좌로부터 사랑방, 마루,통로,정지방을두었고,뒷열에는도장방,안방, 부엌을각각 배치하였으며,전면과좌측면에는 퇴를 달아헌함을둘렀다.좌측의방들은앞열에는사랑방 과마루를두고후열에는도장방과안방을두어전체 적으로 ‘田’자형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강원 도 지방의 온돌중심형 겹집평면에서 앞쪽의 방 1칸 이마루로대체된형식이다.본래정침과사당으로구 성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에 화재로 소실되고 정침 만이전해진다. 농아당 종택의 건축적 특징은 와가 까치구멍집으 로서마루가수용된온돌중심형겹집의형태를취하 고있는데,이러한형태는북부지방의온돌중심주거 문화와 남부의 마루중심 생활양식이 절충된 형태이 다. 또한 이 건축물은 초가집과 유사한 형태인 천장 투창(透窓)이있다는점도주목할만하다.민가의건 축양식연구에귀중한자료가된다. 현재 문중에서 농아당의 공적(功績)을 현창하기 위해 농아당 13대 종손인 박신일(信一)과 문회장 박 정락(禎洛)이 합심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사업들을 꾸준히진행하고있다.우선종택과사당을온전히복 원한 것이며, 나아가 농아당 선조 관련 자료를 수집 하여논문으로발표한것이다수이며,경북대학교퇴 계학연구소와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서 학술총서 를발간하여구체적인연구활동을전개해오고있다. 이와더불어농아당선조의묘역을재정비하고관리 하는일도주요사업중하나이다. 종택은 1996년에 문화재자료로 지정되면서 해체 복원했다.이후 문중에서 종택을 지속적으로 관리하 기 위해서 복원을 계속 해 오고 있다. 2017년에 재실 을 새로 짓고 ‘농아당’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종합하 자면종택은남아있고,부속건물인재실이새로신축 되었고,사당도2020년에복원되었다. -임진왜란때형박의장과함께공을세우다- 박홍장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으로 본관은 무안 (務安)이고자는사임(士任)이며호는농아당(聾啞堂) 이다.현감 박세렴(朴世廉)의 아들이자 경수당 박세순 의조카이며,청신재박의장의아우이다.영덕군영해면 원구리에서태어났다.어려서부터소학과병서를즐겨 읽었다.천성이영특하고행동거지에위엄이있었다. 23세 때인 1580년(선조 13)경신 알성무과에 급제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고 경주판관이었던 박의장이 전세가 불리하다는 상황을듣고망연자실하여식음을전폐하고상심하 던 중,곧이어 경주성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 게기뻐했다고한다. 1593년(선조26)경상도수군절도사인작은아버지 박세현의 초상을 당하고 1개월 후인 12월 23일에 연 이어아버지박세렴의상을당하였다.이때박의장은 전란이급박하여아버지를임종을지키지못하게되 자, 박홍장과 사촌형 종형 박진장과 함께 장례를 치 렀던것으로알려져있다. -서애류성룡의추천으로대구부사가되다- 1594년(선조27)박홍장은영암군수에부임하였는 데,2개월후류성룡의천거로대구부사에다시임명 되었다.그는병들고약한군사를보살피고무기를만 들며군량미를준비하는등대구방어에만전을기하 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군자감정, 장악원정, 상호군 등에연이어승진되었다.그때류성룡의추천글을보 면 다음과 같다. 대구는 직로에 놓여 있는데다가 또 한도(道)의중앙에위치해있습니다.또한청도와의 사이는토질이매우비옥하므로금년에만약크게농 사를짓고흩어진군사들을모은다면진영을이룰수 있고후일을도모할수도있습니다. 신임부사 박홍장은 바로 박의장의 아우로 무장들 중에이름이높은사람입니다.다른사무를시키지말 고오로지대구의일을돌보는데마음을쏟게하십시 오.그리고순찰사로하여금소와곡식종자를특별히 조치하게함으로써궁핍해지지않게해야합니다.주 상께서는 이러한 뜻을 급히 명하셔서 의령,사천,고 령, 함안 등지에 대해서도 금년에 백성을 권면하여 농사를짓고혹둔전을경영하도록하는일도아울러 함께철저히조치하도록하십시오. 조선통신사로일본에다녀오다.1596년(선조29)2 월아버지삼년상을마치고원직에복직하였다.같은 해 6월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승진되어 통신부사로 일본에사신으로가게되었다.당시사절단중에서는 적국 일본에 사신으로 가면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모 두 겁을 내었으나, 박홍장은 오직 국명을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할 뿐이었다.이러한 태도에 주변사람들 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박홍장의사절단은5년간의지루한임진왜란전쟁 을 종전하고자 일본과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러나 이때 일본 측 태도는 오만불손하였다. 일 본오사카에도착한조선통신사에게일본의관백들 은조선의왕자를보내어사례하지않는다고생트집 을 잡으며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또한 임 진왜란때처럼다시조선에군사를또다시출동시키 겠다고협박하면서조선의사신단일행을화형에처 하겠노라고엄포를놓았다. 그러나박홍장은이러한협박에조금도굴하지않 고태연자약하게국명을수행하였다.그의대담한태 도에 일본도 할 수 없었든지 즉시 행패를중지하였다 고 한다.박홍장은 이러한 일본의 만행 뿐 아니라 현 지상황을본국에보고하기위하여동행한중국사신 심유경의훼방을겪기도하였다.그는일본에서온갖 고초를겪었지만,의연하게국명을완수후그해11월 무사히귀국하였다.귀국때일본이주는많은선물을 모두물리치고일본지도한벌만갖고왔다한다.이 때 공은 일본의 모든 거동을 분석 검토하여 본 결과 다음해정유년에재란이다시발발할것으로예측하 였으며,조정에이를정확하게 보고함으로써 우리의 국방수비태세에많은공헌을하였다.같은달말일에 조정에서는 박홍장의 노고를 치하하여 순천부사에 보임하였으나,대구부민들이상소를 올려박홍장을 대구에머물도록하였다. -상주목사로지내며순직하다- 박홍장은1597년(선조30)상주목사에제수되었으 나일본에서돌아올때병을얻어1598년(선조31)정 월에41세로서거하였다.조정과나라안팎이모두국 가의불행이라입을모아애도하였다. -이원익에발탁되다- 박홍장은세마리의준마를얻어서늘조련하였는 데 한번은 중군(中軍)으로서 도체부(道體府)의 이 원익 재상의 진중(陣中)으로 말을 몰아 달려 들어갔 다. 세 마리의 준마가 일제히 달림에 그 빠르기가 나 는 듯 하여 진중의 병사들이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구경하였고, 도체부에서는 박홍장을 맞이하여 위로 하고매우기뻐하였다. 조선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에서의 일화 임진왜란 이끝난뒤일본은조선에통신사를파견하라고요청 하였다.조선의조정에서는정사에통정대부(通政大 夫)돈녕도정(敦寧都正)황신(黃愼)과 상호군(上護 軍) 박홍장 등 총 309명에 달하는 통신사를 파견하였 다.이들은선조29년(1596)8월8일부산에서출발하 여 18일에 계빈(堺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도요토 미히데요시가조선의통신사행에 대하여,중국과의 통교(通交)를 방해하고 일본을 업신여겼으며 조선 의왕자를동행하지않았다는등의이유를들어국서 (國書)의 수령을 거부하고 급기야는 사절 일행을 죽 이겠다고협박하였다.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 吉)가 화려한 무늬의 비단을 원문(轅門) 밖에 깔아 놓고 군사를 배치해 놓아 무기의 칼날이 흰 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함께 간 조선 사람들이 모두 다리를 후들후들떨면서말에서내려걸어갔지만박홍장만 은 개의치 않고 말을 달려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숯불을 피워놓고 말하 기를“사신을숯불위에올려놓으려한다.”고겁을주 었다. 그러자 박홍장은 “어찌 옷을 벗고 뛰어들지 않 겠는가?”라고의연하게소리쳤다.그러나같이따라 갔던 수행원들이 두려워 큰 소리로 울자 박홍장은 크게 노하였다.그러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숯불을 모두 꺼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두려움을느끼고그일을중지시켰다.되돌아오려고 할 때에는 일본이 증여한 물건을 물리치고 받지 않 았다. 또한 수행자의 행장을 수색하여 두 자루의 왜 검(倭劍)도 되돌려 주었으며 단지 일본의 지도만 가 지고 출발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11월 23일 부산에 무사히도착하였다. 박홍장이통신부사 (通信副使로)서 일본 에 파견되었을 때 븮동 사록(東 汎 錄)븯을 저 술하였다. 이 책은 현 재 일본의 구주(九 州) 좌하현(佐賀縣) 명호옥박물관(名護 屋博物館)에 보관된 『관감록(觀感錄)』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통신정사(通 信正使) 황신에 의해 만들어진 븮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븯와 서로 보 완적으로 일본과의 강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동사록 일본왕환일기 선조실록 동사록이 쓰이기까 지박홍장은동사록에서부산과오사카,사카이를왕 래하는 동안 보고 듣게 된 일본의 모습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일 본무장들의모습을자세하게기록하였다.특히방일 직전에일어난게이죠(慶長)대지진의피해상황과2 개월후에일어난여진(餘震)등에대해상세히기록 하고있다. 당시 강화 교섭은 일본 측에서 고니시,명 측은 심 유경(沈惟敬)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일기에 의하 면 박홍장은 1596년 8월 8일에 부산을 출발해 쓰시마 (對馬島),시모노세키(下關),효고(兵庫),고베 등을 거쳐 윤 8월 18일에 사카이에 도착,40일간의 항해를 가졌다. 사카이에서는 고니시와 쓰시마 무장인 소우 요시 토모(宗義智)등의 출영을 받았으며,통신사의 도착 을전해들은도요토미는‘매우기뻐했다’,‘9월2일에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도요토 미가 조선의 왕자를 데리고 오지 않은데 대해 화를 냄에따라회견이이뤄지지않은채 통신사는9월10 일사카이에서귀국길에올랐다.특히사절단이부산 에서 출발하기 약 1개월 전에 발생한 게이죠대지진 에 대해 황신의 븮일본왕환일기븯가 전혀 언급하지 않 고있는데반해븮동사록븯은자세히기록하고있다.븮동 사록븯은 “사카이야, 교토에서 지진. 사망자가 1만여 명이라고들었다.효고에서대지진.먼저사카이에들 어갔던중국의사절사망”이라고기술하고있다. -동사록내용일부- 8월18일,맑음.어두워질무렵에지진이있었다.아 침 일찍 출발하여 낮에 사개(沙蓋)에 도착했는데 이 중군(李中軍)이 먼저 정박하였다.명나라의 두 사신 과 왜장 행장정성(行長正成)및 의지(義智)등이 함 께 해안에서 고칙(誥勅)을 영접하여 정사(正使)의 관소에 봉안하였다.우리나라의 상사와 부사가 뒤이 어도착한다음들어가서명나라의두사신에게절을 하니 두 사신은 중당에 서서 읍례를 하였다. 인사를 마치고상락사(常樂寺)에머물렀다.이날저물무렵 에의지가다상(茶床)을가지고와서인사하였다.병 고관에서여기까지수로로130리이다. 8월19일,맑음.날이저물무렵에의지와현소가와 서 상사와 부사를 뵈었다.사개는 하내주(河內州)에 소속된땅인데높은누각과판잣집이10여리나되도 록처마를맞댄채있어서거의1만호가까이될듯하 였다.일찍이지진으로인하여간간이무너진채보수 하지못한건물이있었는데압사한사람과가축이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다.저자 가운데 사람의 눈 길을사로잡는휘황찬란한빛깔의물건들은몇천만 종류나되는지알수없을정도였다. 영덕 농아당 종택은 1996년 목사공 종택으로 경상 북도문화재자료(제320호)로지정된이후문중과후 손들은아쉬움을드러냈다.관직으로별칭된종택의 이름은전국에서도여러곳이있기때문이다.그러나 이번 후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아호(雅號) 농아당 으로변경됨은다행스런일이아닐수없다.여기에는 종택을지켜오는후손들의의지또한담겨져있을것 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외세 의 침입이 많았다. 이때마다 피로 나라를 지켜냈다. 박홍장선생은임진왜란에많은공을세웠으며특히 통신사로일본에가정유재란을예측하고그에대한 방비를철저히함으로서나라를온전히지킬수없었 고,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기록한 ‘동사록’은 우리나 라는물론일본에서도주요학술자료로남는다. 위기를 대처함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함을 보여준 박홍장 선생의 기개가 호국보훈의 달에 더욱 빛난 다. /자료제공영덕군문화관광과 / 글븡정리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영덕농아당종택과정유재란을대비케 한박홍장 선조 유지를찾아븣 농아당종택으로의변경 농아당종택전경.①재실농아당②농아당종택③부조묘정충사④관리사 종택의연혁과특징 지붕측면까치구멍. 내부에서 바라 본 까치 구멍. 1980년종택모습 2022년현재의모습. 농아당박홍장의생애 농아당묘소,영해면묘곡리초수골. 농아당박홍장의 학문이야기 조선통신사로일본을다녀온과정을븮동사 록븯에담아내다 동사록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