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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 (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 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 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 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 (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 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 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고 하 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 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 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 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 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 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 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 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 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