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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 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 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 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 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 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 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 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 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