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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호(趙喆鎬)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에 유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유학중에 동기생인 지청천(池靑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龍山)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뻔 했으나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제대되었다. 퇴역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구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오산학교의 체육교사로서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고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3월 5일 만주로 망명했다가 봉천성(奉天省) 하마당역(下馬塘驛)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구한국군 교련방식에 의한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조선소년군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동년 6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8년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어 청년학생들을 훈련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