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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월31일 화요일 6 (제193호) 특집 공의 휘는 지생(祗生)으로 전서공(典書公) 박침(朴枕)과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산박씨(密山朴氏) 사이에서 맏 아드 님으로 태어났다.배위(配位)는 흥양인(興陽人)찬성사(贊成 事) 이서원(李舒原)의 따님이다. 고려 말기에 간성병마사(杆 城兵馬使)로 있을 때 1392년(공양왕 4) 7월에 이성계(李成 桂)가 거사를 도모하여 새 정부 조선국(朝鮮國)을 개국하여 고려조의국운(國運)이다하자공께서는아버지전서공(典書 公)과 뜻을 같이하여 벼슬을 버리고 벽란진(碧瀾津)을 건너 아버지를 따라 섬기며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키다 졸(卒)하 였다. 공께서는 아들 희맹(希孟)을 두었는데 사온서(司溫署) 직 장(直長) 벼슬을 지냈다. 묘소는 실전하여 후손들이 수 백년 간 세사(歲祀)를 받들지 못하고 애를 태우다가 1947년(정해) 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호남면(湖南面) 박산골(朴山谷) 의 임야(林野)에 공의 제단(祭壇)을 설단(設壇) 제향(祭享) 하자는 종론(宗論)이 일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그 재산(財 産)을 선대(先代) 종친회인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종회에 기 증(寄贈) 헌납(獻納)하고 원당 두응촌(豆應村) 선영하(先塋 下)상장군(上將軍)묘하에 설단(設壇)제향(祭享)키로 합의 의결(議決)함에 따라 1947년(정해)에 고양시(高陽市) 지도 읍(知道邑) 화정리(花井里) 755번지 논(畓)(1,348평· 현 고 양시 화정동 811의 4번지. 3,967.0㎡· 등기번호1159-1996-766 868)을 매입 대종회에 기증(寄贈)한 바 있으며 6·25전쟁으로 인하여 그 설단(設壇) 실행이 늦어졌다가 1972년 4월에 제종 (諸宗)의 결의로고양시원당주교리선영(先塋)상장군 묘하 에 설단(設壇)하여 제향(祭享)을 받들어 오던 중 비문(碑文) 이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94년 5월에 단 비(壇碑)를 세우고 새로이 단장하여 모시니 오늘날의 간성공 (杆城公)제단(祭壇)이다. 1990년에 공의 제단 2백여m거리(주교동 551의 3)에 대지 9 0여 평을 마련 재실(齋室·45평)을 건립하니 공의 충절(忠節) 을 추모(追慕)하는 전당(殿堂)으로서 후손들의 화합과 숭조 사상을고취(鼓吹)하는거룩한터전이되어오늘에이르고있 다.간성공파(杆城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의문(疑問)으로 1386년(우왕 6·병인)에 부제학 공 강생(剛生)의 큰아들로 태어나니 호조전서 침(枕)의 손자 다. 외조는 윤승경(尹承慶)이고 배위는 양천인(陽川人) 허기 (許대)의 딸이다. 1429년(세종 11·기유)에 누이가 세종임금 의 후궁으로 들어가 장의궁주(莊懿宮主)로 귀(貴)하게 되어 오위좌령호군(五衛左領護軍)이 되었다가 같은 해에 하세하 매 세 종 임 금 이 관 곽 (棺 槨 ) 과 쌀 과 콩 (米 豆 ) 1 0 섬 ( 石 ) 종 이 (紙)60권(卷)석탄(石炭) 30석(石)을 부의로 내렸다.묘소는 고양시 두응촌 선영하에 장사하였다.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대손(大孫)으로 정자공(正字公)의 큰아들이다. 1407년(태종 7·정해)에 태어났다. 배위는 안동(安東) 권씨 (權氏)로 문경공 권제(權 퇀)의 딸이며 양촌(陽村) 권근(權 近)의 손녀딸이고 정난공신(靖難功臣) 권남(權擥)의 누님이 기도하다. 공은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사복시(司僕寺) 주부(主 簿),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1425년(세종 7) 중화부사(中和府使)로 북평병마절도사(北平兵馬節度使)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1456년 6월 이 시절 도성(都城)에서는 수 양대군이 선위(禪位)라는 미명(美名)하에 단종(端宗)을 상 왕(上王)으로 축출(逐出)하는 국변(國變)이 일어나고 육신 (六臣)사건이일어나뜻있다는선비들은모두가죽임을당하 였고 숙부(叔父) 박심문(朴審問)의 비명(非命)에 격분을 금 치 못하다가 여러 아들과 여식(女息)들을 불러 모아 “이처럼 불륜(不倫)한 세상에 벼슬하여 무엇하랴! 너희들은 모름지기 벼슬을 버리고 숨어살라.”라는 훈계(訓戒)를 남기고 곧 자결 (自決)하니그충절(忠節)이해와별같이빛나도다. 공의 묘(墓)는 중화(中和) 땅 정이산(定夷山) 경좌(庚坐) 이나 남북의 분단으로 오갈 수 없어 고양시 두응촌 선영하에 설단(設壇)하여 제향(祭享)하고 있다. 훗날에 사림(士林)들 의 공의로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경내의 숙모전(肅慕 殿)과 영광(靈光) 월현사(月峴祠)에 배향되었다. 공의 충절 (忠節)을 만세(萬歲)토록 기리기 위하여 2002년 4월에 고양 시두응촌선영하에사우(祠宇)를건립하고여섯아들과함께 배향(配享)하여 모시니 충절사(忠節祠)라 하였다. 절도사공 파(節度使公派)의 파조(派祖)다. 공은 공효공(휘 중손)의 맏 아드님으로 세종 신해(辛亥, 14 31)년에 태어났다. 세종32년 경오(庚午, 1450) 식년시에 무과 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에 이르고 1466년 절충장군, 부평도 호부사에 올랐다. 1471년(성종2, 辛卯)에 졸하시었다. 배위는 파평윤씨이다.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금2리 이고 부 평공파의파조이다. 공의 휘는 의영(義榮)이요 자는 광화(光華) 또는 운화(云 華)라 했다. 1456년(세조 2·병자) 4월 13일에 존성재공의 맏 아들로 태어났다. 배위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생원 순언 (純彦)의 따님이었으나 소생이 없어 후배(後配)를 맞이하였 으니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로 별좌(別坐) 한신(漢臣) 의 따님이다.공은 1474년(성종 5·갑오)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482년(성종 13·임인)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 (正字)에 오른 후 호조(戶曹), 공조정랑을 역임하고 사간원 (司諫院) 헌납(獻納),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지내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을 때인 1504년(연산군 10·갑자)에 바 른말을 고하다가 청주(淸州)문의(文義)로 귀양 갔다.1506년 (연산 12·중종) 즉위년 9월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 에서 풀려 호조,예조,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가 1 519년(중종 14·기묘) 7월 15일에 하세하니 향년 64세였다. 묘 소는 고양시 두응촌 선영하다. 대간공파(大諫公派)의 파조 (派祖)다. 공의 휘는 승종(承宗)이요 자는 효백(孝伯)이며 호는 퇴우 정(退憂亭)이다. 공은 1562년(명종 17·임술) 11월 17일에 지 돈녕(知敦寧) 안세(安世)의 큰 아드님으로 태어나니 관원공 (灌園公) 계현(啓賢)의 손자이고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 忠元)의 증손이다. 외조는 창원인(昌原人) 의창군(義昌君) 황림(黃琳)이고 배위는 청풍인(淸風人) 증참판 김사원(金士 元)의 따님이다. 1585년(선조 18·을유)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병술(丙戌) 9월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 란(壬辰亂)을 당하여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어 선무공신 (宣武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공훈(功勳)으로 선조 (宣祖)의 어필(御筆)과 묵난(墨蘭) 묵죽화(墨竹畵)를 하사 (下賜)받았고, 1593년(선조 26)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사은 사 한준(韓準)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부경(赴京)사행(使 行)한 후 1594년(선조 27)에 사헌부 장령, 헌납 등을 거쳐 집 의(執義)에 올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이 되었다. 1595년에는 통정대부를 하사받고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참의를 거쳐 병조참의로서 명나라 조총 병(祖摠兵)의접반사가되어영남지방을순행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승정원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이듬해 에는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600년에는 구 성부사(龜城府使)를 제수받았으나 부임도 하기 전에 1601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어 나아갔다.1603년(선조 36)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홍문관 부 제학(副提學)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를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607년(선조 40)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세자시강원우부빈객(世子侍講院右副賓客)을 지냈으며 1609년(광해 1)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가 되어 나아갔다. 1 611년(광해 3)에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밀창부원군(密 昌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손녀(孫女)가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이지(李祗)의 빈 (嬪)으로 들어가자 왕실(王室)과 인척(姻戚) 됨을 두렵게 여 겨 항상 몸에는 가죽으로 만든 비상(砒霜) 주머니를 지니고 다녔다.세자시강원좌부빈객(世子侍講院左副賓客)이 되었으 며 1614년(광해 6)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1617(광해9) 판 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1618년(광 해 1 0 ) 좌 찬 성 (左 贊 成 )에 올 랐 을 때 친 상 (親 喪 ) 을 입 어 시 묘 (侍墓)살이를 하였으며,1619년(광해 11·기미)3월 13일에 의 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 었으나 쇠퇴해 가는 명(明)나라의 국운(國運)을 알아차리고 신생국 후금(後金·청나라)과의 등거리외교를 주창하여 훗날 에 사학자들이 말하길, 외교의 귀재라 일컬었다. 1623년(광해 군 15·계해) 3월 13일 새벽에 김유, 이귀 등이 반정을 일으키 고 능양군 이종(綾陽君李倧)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니 인조반 정(仁祖反正)이다 사세가 이러하니 공은 유서(遺書)를 남기 고 큰아들 경기감사(京畿監司) 자흥(自興)과 함께 자결(自 決)하시니,경기도광주군남종면검천산사에서였다. 홍호(洪鎬), 이준(李埈), 안방준(安邦俊), 송시열(宋時烈) 등이누대를이어 유신(儒臣)들과후손들의신원상소(伸寃上 疏)로 마침내 1857년(철종 8·정사) 6월 13일에 관작(官爵)이 복권(復權)되고 숙민(肅愍)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공의 묘소는경기도광주군검천땅에모시었다가뒷날에공주(公 州 ) 땅 으 로 옮 겨 모 시 었 고 다 시 천 안 목 천 읍 땅 관 동 으 로 이 장 하여 모셨다가 1976년(병진) 4월에 현재의 묘소로 옮겨 모시 니 경기도 고양시 두응촌 선영 제 3묘역이다. 배위 정경부인 청풍 김씨는 두 아드님(自興·自凝)과 따님을 낳으시고 젊어 병사(病死)하시니 시증조부 낙촌선생 묘하에 장사 모시었다. 훗날의 시아버지 지돈령공 묘하가 되었다가 2007년 봄에 후 손들이 뜻을 모아 부군이신 숙민공 곁으로 이장하여 모시었 다. 후배 전주 이씨는 완풍부원군 이서(李曙)의 누이로 4남 (四男)을두었다.숙민공파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승조(承祖)요 자는 효선(孝先)이고 호는 지지당 (止止堂)이다. 공은 1564년(명종 19·갑자) 5월에 지돈령공 (知敦寧公) 안세(安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니 승종(承宗) 의 아우요관원공계현(啓賢)의손자이며낙촌공의 증손이다. 외조는 판서 황림(黃琳)이고 배위는 초취부인(初娶夫人) 남 궁씨(南宮氏)로 직장(直長) 식(湜)의 따님이었으나 소생이 없이 조졸(早卒)하여 후취부인(後娶夫人) 능성구씨(綾城具 氏)를맞이하니사헌부감찰(監察)극인(克仁)의따님이다. 공은 선대 가문의 공훈으로 광능참봉(光陵參奉)을 시작으 로 만경리(萬經理) 아문도감(衙門都監), 낭청(郞廳), 한성참 군(漢城參軍), 상의주부(尙衣主簿)를 지내고 삼등현감(三登 縣監), 안산군수(安山郡守)를 역임하고 양양부사(襄陽府使) 를 지냈는데 이때의 치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17년(광해 9·정사)에 연안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 겸 해 주진병마첨절제사(海州鎭兵馬僉節制使)로 나갔다가 1618년 (광해 10·무오) 봄에 친환(親患)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도성 으로 돌아와 간병하던 중 이해 4월 22일(윤 4월이 끼었음)에 아버지 응원군(凝原君)께서 하세하여 5월 초에 고양시 두응 촌선영하에장사하여모시었다. 선고(先考)께서 졸하신지 두 달도 채 아니 되어 5월 7일에 는 모부인 정경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마저 하세하시니 당 시 풍수가(風水家)의 말을 들어충청도천안(天安)땅대곡리 한적골 뒷산 갑좌(甲坐)언덕에 모시었다.상사(喪事)가 이러 하였으니사형(舍兄)좌찬성대감은두응촌선영하응원군묘 소에서시묘(侍墓)살이하였고공은천안땅대곡리한적골모 부인의 유택에서 시묘살이 끝에 식솔마저 불러 내려 은거하 다가 1640년(숭정 13·경진)8월 16일에 하세하니 향년77세요 이로부터 천안 한적골 박씨(朴氏)의 뿌리가 시작된 것이다. 공은 처음에는 천안 땅 한적골 은적산(隱跡山) 언덕에 장사 모셨다가 1726년(영조 26·병오) 봄에 충청도 연기군 남면 모 항리(茅項里)간좌(艮坐)언덕으로 이장하였으나,2006년(병 술)10월 29일에 다시 대곡리 한적골 뒷동산 묘좌(卯坐)언덕 으로 옮겨 모시니 공의 묘역 일대가 신행정 복합도시로 변모 하여수용됨에서였다.연안공파(延安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승황(承黃)이요 자는 효경(孝敬)이며 호는 읍청 당(揖淸堂)이다. 공은 1566년(명종 21·병인)에 응원군(凝原 君) 안세의 아들로 태어나니 승종(承宗)의 막내아우다. 관원 공 계현(啓賢)의 손자이며 낙촌공 충원(忠元)의 증손이다.외 조는 판서 황림(黃琳)이고 처부는 광주인(廣州人) 군수(郡 守) 이호약(李好約)과 문화인(文化人) 부사 유희선(柳希先) 이다. 1607년(선조 40·정미)에 직산현감(稷山縣監)을 거쳐 1 611년(광해 3·신해)에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다. 공의 선정비가 천안 땅 직산면(稷山面)동리(東里)와 김제시(金堤 市) 교동(校洞) 홍심정(弘心亭)에 남아 전하고 있다. 묘소는 고양시 두응촌 선영하 제 3묘역 공의 장형 승종(承宗)의 묘하 에모셔졌다.김제공파(金堤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안민(安民)이요 자는 의지(義之)이며 호는 의재 (義齋)다. 1544년(중종 39·갑진)에 관원(灌園) 박계현(朴啓 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니 낙촌공(駱村公) 충원(忠元)의 손자다. 외조는 생원(生員) 김지손(金智孫)이고 배위는 능성 인(綾城人) 참봉 구빈(具濱)의 따님이다. 무과(武科)에 급제 하여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거쳐 장단부사(長湍府使)를 겸하여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에 임진왜란을 맞아 공은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 립(申砬)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충주(忠州) 땅에 이 르러 단월역(丹月驛)앞에서 진을 치고싸웠으나대패하였다. 이때의 신립(申砬)은 탄금대(彈琴臺) 그 전면에 배수진을 치 고 방어하다 패전하였는데,탄금대는 신라 진흥왕(551)때 가 야출신우륵(于勒)이이곳에서가야금을탄주했다고해서붙 여진이름이다.당초신립이군사8천여명으로이곳에배수진 을 치려하자 종사관 김여물(金汝 )과 박안민(朴安民) 등 은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군을 막기 위해서는 자연의 요새 인 조령(鳥嶺·새재)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진언했다.그러나 신립은 말하길 뷺적은 보병인 데 비해 우리는 기병(騎兵)이니 유리하지 않소.더구나 적은 먼 길에 피로했고,기병에 약하므 로 이길 수 있을 것이오뷻라며 박안민(朴安民)등의 진언을 받 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의 신립은 북방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이긴 했지만, 일본이 임진왜란 도발 50년 전 에이미포르투갈상인에게서조총(鳥銃)을수입개발하여사 용해 왔음을 몰랐던 것이다.임진년 4월 27일 새벽,단월역(丹 月驛)에서 왜군의 선봉장 유키나가는 휘하의 병력 1만 8천여 명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지휘해 산을 끼고 동쪽 으로, 다른 하나는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등이 지휘해 달래 강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해 왔다. 신립은 기마대(騎馬隊)로 적의 보병을 짓밟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내린 비로 탄 금대 앞 벌판은 수렁처럼 질퍽거리고 푹푹 빠져 기마대에 의 한 기동 타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으 나적의위세에압도되어모두전사했다. 이때의 신립은 왜군의 포위를 뚫고 달천(達川) 월탄月灘) 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선 강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다. 사세가 이러하니 종사관 박안민(朴安民)과 김여물도 함께 빠져 죽으니 1592년(선조 2 5)4월 27일이다.이때 상주(尙州)땅 북천(北川)전투에서 패 전하고 도주해 이곳 신립의 부대에 합류해 있던 순변사 이일 (李鎰)은 또다시 도망쳤다. 충주(忠州)가 적에게 함락되었다 는 소식이 서울에 날아든 것은 4월 29일 저녁이었는데, 선조 (宣祖) 조정은 다음 날 새벽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니 이 른바 의주파천이다.이곳에는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8 천용 사의위령탑과신립의자결장소를알리는표석(標石)그리고 븮감자꽃 노래비븯 등이 서 있다. 뒷날에 강물(江) 속에서 박안 민(朴安民)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사 모시니 고양시 원당 선영하갑좌(甲坐)다.부정공파(副正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은 관원공(휘 계현)의 셋째 아드님으로 명종 을묘(乙卯, 1555)년에 태어났다. 자(字)는 신지(信之) 호는 월봉(月峰) 이다. 선무랑으로 선조 임진년(1592) 38세의 일기로 졸하였 다. 배위는 기계유씨이고 묘소는 두응촌 갑좌이나 이후에 충 남 보령시 주산면 야용리(야관산)으로 이장하였다. 월봉공파 의파조이다. 공의 휘는 안국(安國)이요 자는 평보(平甫)로 1564년(명종 19·갑자)에 관원공 계현(啓賢)의 아들로 태어나니 낙촌공 충 원(忠元)의 손자다. 외조는 생원 김지손(金智孫)이며 배위는 남양인(南陽人) 감역(監役) 홍유중(洪惟中)의 따님이다. 벼 슬은 찰방(察訪·馬官)을 거쳐 영해부사(寧海府使)를 겸하여 안동진관병마첨절제사(安東鎭管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한 후 1630년(인 조8·경오)에 하세하여 장사를 모시니 경기도 광주 시실촌면건업리로공께서말년에낙향하여사시던곳이다. 영해공파(寧海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응현(應賢)이요 자는 계옥(季沃)이다.공은 1532 (중종 27·임진)에 낙촌공(駱村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니 관원공(灌園公) 계현(啓賢)의 아우이며 응천군의 손자다. 공 의 초배(初配)는 광산정씨(光山鄭氏)로 현감 정기(鄭耆)의 딸이고 후배(後配)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정랑(正郞) 윤시 (尹蓍)의 딸이다. 공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전함사 (典艦司) 별좌(別坐)를 역임하고 강화도호부사(江華都護府 使)에 이르렀다가 하세(下世)하였다. 공의 묘소는 두응촌 선 영하계좌(癸坐)라하였으나실전하여두분배위와함께낙촌 공(駱村公)묘하끝자락에설단(設壇)향사를받들고있다. 별좌공파(別坐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용현(用賢)이요 자는 명치(鳴治)다.공은 1538년 (중종 33·무술)에 낙촌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니 관원공의 열다섯 살 터울의 아우였다. 공은 10세에 효경(孝經)을 수학 (修學)하고 15세에 사서(四書)를 정통하였으며 약관(弱冠) 에 군직(軍職)에 들어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에 이르렀 다가 1578년(선조 11·무인) 7월 9일에 타계하니 41세의 중년 이었다. 공은 화죽도(畵竹圖·대나무 그림)를 잘 그려 주변 사 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는데, 사형(舍兄) 관원공(灌 園公)이 화제(畵題)의 글을 써주었다는 븮제사제명치화죽 題 舍弟鳴治畵竹)븯이란 그림은그중에서도뛰어나다했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현풍(玄風) 곽씨(郭氏)로 동 지(同知·직함이 없는 노인의 존칭) 순수(舜壽)의 따님이다. 소생이 없어 사형(舍兄) 관원공의 아들 안도(安道)를 양자 (養子)로 삼아 대를 이었다. 공의 묘소는 초장(初葬)은 장지 리(長旨里)에 모시었다가 이장하여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실촌면(實村面) 만산리(晩山里) 뒷산 건좌(乾坐)로 모시었 다. 배위 또한 합장하였다. 훗날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 직되었다.참군공파(參軍公派)의파조(派祖)다. 공의 휘는 호현(好賢)이요 자는 계용(季容)이고 호는 화록 (華麓)이다. 공은 1550년(명종 5·경술) 9월 9일에 낙촌공(駱 村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니 관원공과는 26세 터울의 아우 이며 장조카 안(安世)보다도 8세 아래로 태어났다.공의 배위 는 기계(杞溪) 유씨(兪氏)로 군수(郡守) 유영(兪泳)의 따님 이요 판서(判書) 유강(兪絳)의 손녀딸이다. 공은 1570년(선 조 3·경오)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벼슬에 들었으나 1580년(선조 13·경진)4월에 아버지처럼 사랑해주던 장형(長 兄)관원공이 타계(他界)하면서 공에게 유언(遺言)을 남겼고 다음 해 1581년(선조 14·신사) 2월 16일에 아버지 낙촌공(駱 村公)께서 졸서(卒逝)하심에 너무도 애통해하여 거상(居喪) 을 견 디 지 못 하 고 타 계 (他 界 )하 니 나 이 불 과 3 2 세 의 젊 은 나 이였다. 공의 배위 유씨(兪氏) 부인은 친정어머니 하동정씨 (河東鄭氏)를 섬기고 있었는데, 1592년(선조 25·임진) 임진 왜란 중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 해(害)하려 하자 모부인 정씨 를 두 팔로 감싸 보호하였으나 역부족으로 그 어머니와 함께 적군에게 살해당하니 1592년(선조 25) 5월 11일로 부인의 나 이 42세였다.공의 묘소는 양주군(楊州郡)화도면(和道面)차 산리(車山里) 차유령(車踰領) 자좌(子坐)이다. 배위 유씨 부 인도 합폄으로 모시었다. 1739년(영조 15·기미)에 효녀(孝 女)의 정문(旌門)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다. 화록공파(華 麓公派)의 파조(派祖)다. ▶다음호에계속 뱚파조별약사 규정공파后35지파 경기도고양시두응촌묘역전경 본보는 지난 해 10월 6면과 7면을 통해 규정공파 약 사를 다루면서 예하 35개 지파 파조에 대한 소개는 추후소개하기로한바있다.이에새해1월호부터는 35지파를소개해보고자한다.규정공파는신라시조 왕(始祖王)의45세손이며 관조(貫祖) 밀성대군(密城 大君)의16세손이다.규정공의휘(諱)는 현(鉉)으로 1 253년(高宗40·계축)에고려국태사(太師)문정공(文 靖公)의 아드님으로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사헌부(司憲府)규정(糾正)에이르러관작(官 爵)을 따 규정공파(糾正公派)하고 밀성대군 이후 12 중조(中祖)의한분이다. 간성공(杆城公)박지생(朴祗生) 호군공(護軍公)박의문(朴疑問) 절도사공(節度使公)박대손(朴大孫) 부평공(富平公)박전(朴 퀵) 대간공(大諫公)박의영(朴義榮) 숙민공(肅愍公)박승종(朴承宗) 연안공(延安公)박승조(朴承祖 ) 김제공(金堤公)박승황(朴承黃) 부정공(副正公)박안민(朴安民) 월봉공(月峰公)박안명(朴安命) 영해공(寧海公)박안국(朴安國) 별좌공(別坐公)박응현(朴應賢) 참군공(參軍公)박용현(朴用賢) 화록공(華麓公)박호현(朴好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