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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월31일 화요일 5 (제193호) 관향조 대종회 謹 賀 新 年 지 난 해 어 려 운 여 건 에 서 도 추 원 재 에 보 내 주 신 성 원 에 감 사 드 리 며 ’ 새 해 에 는 뜻 하 는 바 모 두 이 루 시 고 ’ 즐 거 운 일 만 가 득 하 시 길 기 원 합 니 다 ° 密 城 朴 氏 銀 山 府 院 君 派 大 宗 會 顧 問 朴 在 述 朴 秉 植 朴 祥 圭 朴 泓 箕 朴 炳 立 朴 道 文 朴 辛 在 會 長 朴 淳 燁 副 會 長 朴 昌 相 朴 遺 植 朴 海 雄 朴 鍾 道 朴 東 根 朴 元 煥 監 事 朴 孝 根 朴 淳 濟 500만박씨대종보 한빛신문의 창간 16 주년을 축하하며 은산부원군파대종회가 함께합니다. 경남창녕군계성면광계리마을전경과추원재 밀성(밀양)박씨대종회는 지난해 말 밀성재 경내의 익성사에 모셔진 밀삼한벽공도대장군 (휘욱)목상과과그의두부인의소상그리고 아드님 요동독포사(휘 란)의 병풍을 새롭게 교체했다. 익성사의 병풍은 새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낡고 허름하여 곳곳이 찢어져 사 당을 참배하는 후손들은 못내 아쉬웠으나 이 제 선 조 에 대 한 면 목 이 설 수 있 다 며 반 기 고 있다. 박원주 대종회장은 진즉 교체하여야 했음에 도 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이라며 국내 우수한 업체에서 국산 한지를 이용 제작하였다고 밝 히고 전국 300만 밀성대군 후예의 성원과 협 조 속에 선조님의 음덕을 기리며 새해 소망하 는모든일이루시길당부했다. 익성사는 밀양시 내일동(密陽市內一洞)아 북산(衙北山)기슭 밀성재 경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신라말(羅末) 고려초(麗初)에 군도 (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은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 壁控都大將軍 諱郁)의 목상(木像)과 그 두 부 인(夫人)의 소상(塑像), 아드님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 諱 瀾)의 위판(位版)을 봉 안하여 춘추로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다. 문헌에 의하면 원래는 밀양부(密陽府)의 성황 사(城隍祠)로서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있었 는데 그 성황사 주신(城隍祠主神)으로 삼한 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과 그 두부인 그리고 삼중대광사도 광리군 손극훈(三重大匡司徒 廣理君 孫兢訓 밀양손 씨의 上祖)등 사위(四位)의 소상(塑像)을 봉 향하여 관부(官府)에서 제향을 올렸다. 1580 년(선조13庚辰)에 부사 하진보(府使 河晋寶) 가 연로(年老)하였는데 산정(山頂)에 오르내 리기가 불편하다 하여 성내(城內內一洞신당 마을)로 이건(移建)하였고 1674년(현종15甲 寅)에 부사 이희연(李喜年)이 다시 남림중 (南林中: 三門洞)으로 이설(移設)한 일이 있 었다. 1875년(고종12乙亥)에 고을 유생 안인 원(安仁遠)등이 도백(道伯)에게 진정하여 성 황사(城隍祠)의 원위치를 찾아 추화산정(推 火山頂)으로 복원재건하고 추화사(推火祠) 라하였다. 1910년(순조4庚戌) 이후로 관에서 제사하 던 것이 폐지되어 후손들에 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12년에 향우(享宇)가 심히 퇴락(頹 落)하여 이를 후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 수(重修)하였다. 그러나 사우가 산정에 있어 향사(享祀) 행제(行祭)의 관리함에 불편하여 후손들이 각각 이사봉안(移祠奉安)하여 제향 (祭享)하기로 의논(議論)이 모아져 박씨종약 소 주관으 로 서기1937년(丁丑)에 상일(尙鎰), 수민(秀玟), 도경(道景)등 여러 임원들이 주 선(周旋)하여 밀양시 내일동 아북산 남쪽 기 슭 언덕위에 추화사(推火祠)를 옮기어 다시 짓고 대장군과 그 두 부인의 소상만을 봉안하 고향사하면서 사우를익성사(翊聖祠)라 이름 하고 제사를 신축하여 정미(正楣)에 추화제 (推火齋)라 편액을 달았다. 이사하여 봉안한 지 20여년이 지남에 재소(齋所)는 노후(老朽) 하고 협애(狹隘)하여 불편함에 1965년(乙巳) 에 첨의(僉議)가 모아져 개축하기로 하여 역 사(役事)가 이루어져 1978년(戊午)에 준성 (竣成)하니 정당을 밀성재(密城齋)라 게판 (揭板)하고 동재를 지어 추화재(推火齋)라 편 액(扁額)을 부치니 옛 제사에 연유하는 뜻이 있었다. 같은 해 익성사에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 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여 배향(配享)하니 사 우(祠宇)가 협소하여 1981년 사우를 훼철(毁 撤)하고 규모를 넓혀 일신하고 삼문(三門)을 아울러준공하니현재의익성사이다. 삼한벽공도대장군 목상은 199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213호로지정되었다. 1937년 추화산에서 현 위치에 이건하여 지 금에 이르는 동안 수차례 중수와 개축을 거쳐 지금에이르고있다. 경상남도와 밀양시의 지원을 받아 담장을 축조하고 오르내리는 계단 등의 정비공사로 산뜻하게 정비를 마쳤고,이번 병풍 교체로 후 손들의발길은더욱가벼워질전망이다. 밀성재익성사내병풍교체 1937년 추화산정에서 현 위치 이건 후 수차례에걸친정비사업에이어병풍교체로산뜻해져 익성사에모셔진선조의목상과위판에설치된병풍이낡아퇴색되고찢어진부분이보인다.(사진2021춘향광경) 삼한벽공도재장군목상 삼한벽공도대장군의두부인소상 요동독포사(휘란)위판 조부의 엄격한 훈육으로 도(道)와 예(禮)를 숭상하며 성장한 박홍제 현종이 지난해 12월 31일 개최된 삼가향교 총회에서 신임 전교로 추대되었다. 신임 박 전교는 삼가향교 총무 장의로 10여 년 봉사하면서 체계적인 유풍을 몸소 체득하 여 지 역 유 림 의 추 앙 을 받 아 왔 다 . 특히 같은 문중의 전임 창제 전교에 이어 후 임 전교를 맡음으로서 한 가문에서 내리 전교 를 맡는 경사를 맞아 훌륭한 가문이라며 지역 에서회자되고있다. 은산부원군파와 졸당공파대종회 총무와 재 무 등 종사에 헌신해온 박 전교는 종사에 큰 업적을남겼다. 박 전교의 조부 휘 희선(熙善)의 호는 율정 (栗亭)으로타고난 본성이 온화하고공손하여 부귀를 탐하지 않고 굶주리고 헐벗은 주민을 구휼하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짓고 스승을 맞아 자질(子姪)과 고을 사람들을 대하 고 종족들을 대함에 신의가 더해져 후학 들이 추모계를 만들 어 집 을 지 어 농 산 재 (農 山 齋 )라 하 고 합 천군 대병면 율정마을 입구에 송덕비를 세워 세세(世世)토록기리고있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밀성박씨은산부원군파홍제前총무삼가향교 전교피선 전임박창제전교후임븣전통유가에서태어나가학이어받아 앤드류 박(한국명 박인호 朴仁晧븡 사진)은 2013년부 터 10년 동안 한인학생들 79 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 화제다. 그는 조선전기 문신 이고 이조참의(吏曹參議) 를 지 낸 명 헌 공 (明 軒 公 ) 박 세옹선생 (1493~1541)의 후 손으로 선생이 후손들에게 좋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 할 수 있 는 서 재 를 마 련 하 고 장 학 금 을 주 었 던 것 과 같은 맥락으로 미국 땅에서 한인들에게 장학금을 나 누어주고있는것이다. 앤드류박은 앤드류박 법률사무소의 설립자이자 파트너이며,뉴욕,뉴저지 연방 동부,뉴욕 남부 지방 법원의개인상해전문변호사이다. 2003년 그는 앤드류박 법률 사무소를 설립했으며, 무려 수천여건이 넘는 교통사고 상해배상청구를 성 공적인 판결로 이끌어 내는 등 법조계에서는 이미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는 학생시절 다양한 기증자 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친 것을 기억하며, 자신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2012년 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자신이 받았 던 혜택을 한인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곳에 물심양면 도왔다.무엇보다 어린 학생들이 한인사회 속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그 선발 기준부터 남다르게 하였고, 재미 한인교포 뿐만 아 니라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까지 지원대상의 범위를 확장하여 많은 유학생이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비자를 받고 교포사회의 일원이 되고, 그렇지 않고 한국에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교민 사회와교류를원활히하는바램때문이었다. 2013년 처음으로 발족된 앤드류박 장학재단은 한 인 커뮤니티에 다방면으로 기여하고 있는 자문위원 으로 구성했으며, 장학생 선발 기준은 학교성적 뿐 만 아니라, 한인 사회에 기여한 실적 또는 향후 기여 할계획이나포부등을중점적으로검토한다. 그가 아버지 박중현(전 함양박씨재경종친회장)의 손을 잡고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0살 때의 일 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어머니는 동 양식품점을 운영했다. 그도 다른 1.5세들처럼 부모 님의일터에서아르바이트를하면서컸다. 2남 3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더 책임감이 컸다. 어 려서는 어머니의 식품점에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좀 더 커서는 신문배달과 각종 업체를 다니며 다양 한 아르바이트를 했다.보석회사,주유소,호텔,식당 웨이터 서빙 일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 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1달러의 가치 를배웠고,돈의소중함을알게되었다. 언젠가는 배를 타고 참치 잡이 어선에 승선한 적 도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삶과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놓여있는 관계의 형성과 친화력 등을 익힐 수 있었다. 그 동력은 훗날 사회생 활을 하면서 웬만큼 힘든 것들을 참아낼 수 있는 인 내심의발원이되었다고한다. 변호사가 된 것은 아버님의 영향이었다. “친구의 억울한 법정 현장을 다녀온 후 아버님이 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방 황 하 던 시 절 , “자 녀 중 한 명 은 변 호 사 가 되 어 서 그런 억울한 일을 안 당했으면 한다.” 던 그 말씀이 떠올라변호사가되기로결심했다. 먼저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시라큐스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아이비리 그(Ivy league)출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많은 한국 부모들 에게 아이비리그 가정교육부터 만 들고 교육할 것을 권유하는 입장이다. “머리로만 일 류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이야기하는 직업이다 보니 정말 똑똑하고 배경이 좋 은 사 람 들 을 많 이 만 나 지 만 그 런 스 펙 에 걸 맞 는 인 간의 기본 됨됨이를 덜 갖춘 사람들 또한 간혹 만난 다. 한 인간이 학벌이나 재산 등 보여주는 것은 만들 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철학, 인성은 그 사람 의 부모에게 달려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가정 교육이중요하다는것을강조하고싶다. 개인적으로 부모님께서 미국 와서 키워주신 것 자 체가 감사할 따름이지만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면, 이민 오기 전에 그의 아버지께서는 함양박씨 선산(오금동)에 온가족을 데리고 가서 세장지를 돌 아보고 조상님들께 잘 지켜봐 달라는 시간을 가졌는 데,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한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잊지 않게 해주신 아버님 덕분에 미 국사회에서 정체성을 갖고 한국인으로써 당당히 타 민족과경쟁할수있는원동력이되었다고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상에 남는 것이, 컬럼비아대 학에 입학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입학식에 갔는데,여 느 부모님들처럼 보통 기숙사나 도서관, 카페테리아 를 돌아 보는게 아니라 저의 손을 잡고 컬럼비아 대 학 내 채플(chapel)에 가서 우리 아들이 미국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게끔 해주라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런것이그에게미친영향은지대하다하겠다. 한 인간의 성장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한 것 같고, 그도 부모님이 했던 것과 같이 그의아들에게전해주기위해노력중이라고한다. 올해로 10년을 맞은 설창 앤드류 박 장학재단은 장학사업의 취지와 학생들에 대한 지원의 의미를 더 하기 위해 금년에는 5명에게 1인당 5000달러씩 총 2 만5000달러의 장학금을 2022년12월22일 수여했다. 설창 앤드류 박 장학재단에 따르면 “올 장학생 심사 에서는 성적 외에도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앞으로의 각오와 한인사회에 대한 헌신, 봉사 정신이 잘 드러 난 에세이를 작성한 지원자들이 특히 좋은 점수를 받은것”으로알려졌다. 한편 본인이 받았던 혜택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시작했던 앤드류박 장학사업이 10년을 맞이하면서 체계화되고 현실화되었다고 본다. 계속으로 발전하 고 확대가 되어 50년 100년 지속되길 빌며, 명헌공 선조가 종친에게만 주었던 장학 사업을 뛰어넘어 앤 드류박이 추구하는 글로벌화된 장학사업으로 발전 이거듭되었으면한다. /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설창앤드류박장학재단10주년맞아 올해는5명에2만5000불지원뷺내가받은것돌려주는것, 장학생들열심히사는게희망뷻이라고감사의뜻을표시 설창 앤드류 박 장학재단은 맨해튼 앤드류 박 변호사 사무실에 서 앤드류 박 변호사(왼쪽 세 번째)와 임형빈 장학위원장(네 번 째)이참석한가운데장학금을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