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3년1월31일 화요일 12 (제193호) 기획 조선전기문신인박세영(朴世榮)은아버지생원휘중검(仲儉)과담양부사전의이관식(全義李寬植)과인천 옹주의사이에서난딸과결 혼하여 1480년(성종11)11월29일 공을 낳으니 정종의 외증손이 된다.자는 경인(景仁)이고 호는 구당(九堂)이 며,기묘년 (己卯年, 1 5 1 9 년 중종 14년)의 명인(名人)이다.사람됨이 돈후하여 형제간에 우애가 극진했으며,필법이 정예하여 국서(國書), 표계(表契),공경(三公과 九 卿)의덕을써서남겼고,비갈(碑碣)등에필적을많이남겼으며,병풍서같은것은가진자가보배로여겼다.약 관의나이에아버지가돌아 가시니(연산군4년1498)편모슬하가되어공의나이19세요바로아래동생휘세무(世茂)는바야흐로12세요. 막내동생휘세옹(世?)은 겨 우6세였다. “선생의어머니(전의이씨)는옹주의소생으로52세에홀로되어남편의무덤아래에거처하면서자제를가르쳤 는데,잠시도쉬지않고엄 히九堂公세영을단단히타일러서경계하면서(申飭)두아우를가르치게하였다.혹逍遙堂公세무와眞木亭 公(明軒公)세옹이조금이라 도 게으름을 피우면 貞夫人(전의이씨)이 문득 그들을무덤앞으로끌고 가손을동자석 목에 매어놓고종아리 를쳤다고한다.”그래서지 금도 동자석의 목에는 이때의 끈 자국이 남아있다.대부인 전의이씨는 옹주소생으로 호화로운 가정에서 생장 하여교만하기 쉬운 터이지 만,20세에출가하여시부모를섬기고,남편받들기를지성으로하여부덕의모범이되었다.시아버지(신동)윗 대에서벌어진정치적희생 으로멸문지화를당한집안이풍비박산이되어가족들은모두지방으로흩어져박씨가문의재기는불가능하 였지만,기회가오면가문의 재기를위해자녀교육에전력을다했다.이로써조선전기함양박씨삼파중흥의기틀을마련하게되면서중종 대에걸쳐이른바사림파들 과밀접한관련을가지면서학문적,정치적으로활발한활동을벌였다.이로써박세영,박세무,박세옹은함양 박씨의중시조가되었는데, 박세영은九堂公派,박세무는逍遙堂公派그리고박세옹은明軒公派의파조가되었다. 선생의 생애를 조망하기 위해 선대를 살펴보 면, 선생의 본관인 함양박씨는 고려조 박선(朴 善)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고려 말 조선 초 역사 상에서 주목되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고려 말 우왕 연간에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양광도안무사 재직시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박인계 (朴仁桂), 역시 우왕 연간에 전리총랑(典理摠郞) 을 지낸 박덕상(朴德祥) 등을 비롯해 고려 말 문 과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초 병조판서를 역임한 박습(朴習)등이이해당된다. 박습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 즉 丁未년 10 월 3일에 출생하였고 태종 이방원 역시 공민왕 16 년(1367) 5월 16일에 출생하여 둘은 동갑이었다. 박습과 태종 이방원은 동갑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왕 9년(1383) 4월의 과거시험에 17살의 나이로 함께 합격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박습은 태종 이 방원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였고, 결국 제1 차 왕자의 난 이후 정사원종공신(定社原從功臣) 이되었다. 태종은 이런 여러 인연들을 기념하여 같은 丁 未生들과 甲契를 결성했는데, 박습은 甲契의 일 원이었다. 이처럼 박습은 태종의 측근이었고, 그 결과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의 원종공신이 되 면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박습은 태종이 세 종에게 왕권을 양위하는 과정에서 외척을 숙청하 려던 태종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그때 박습의 죄목은 모반대역(謀叛大逆)이었고,그의 부자 중 나이 16세 이상은 모두 교형(絞刑)을 받아야 했 다. 또한 15세 이하의 아들 및 처첩, 조 손, 형제, 자매는공신(功臣)의집에노비로가야했다. 박습 자신은 참형을 당하고, 그의 생존한 아들 3명(義甫,義卿,義孫)은 지방으로 귀양가서 참형 을 당 하 거 나 官 奴 가 되 었 을 뿐 만 아 니 라 , 그 의 처 와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은 모두 공신의 노비가 되어야 했다. 실제로 박습의 처와 막내며 느리 (안동권씨)그리고 막내 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공신의노비가된것으로보인다. 결국 “강상인의 옥사”를 통하여 박습의 가정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다. 이처럼 풍비박산된 박습의 가문을 살린 것은 역설적으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또 박 습에 대한 갑계회원으로써 미안한 마음에서 박습 의 막내아들 박의손과 부인 안동권씨, 그리고 박 습과 부인 의성김씨를 이혼하게 함으로써 혈맥을 유지할수있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동권씨는 친가에 의지하여 여 공으로 생계를 이으시며 아들 박신동(朴信童)과 딸을 착실히 가르쳐 후일에 번영을 누리게 하였 다.세월이 흘러 40년 만에 세조 4년(1458) 4월 16 일에 박습의 자손들이 벼슬에 임용될 수 있게 허 용됨으로써 박습 가문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박신동의 자녀는 신원되었기에 명문가문 과 혼인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 박중검이 정종의 부마 이관식(李寬植)의 사위가 되었다. 박중검의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 세영(世 榮), 세무(世茂), 세옹(世 죕)을 과거에 합격하게 함으로써 함양 박씨는 다시 명문가문으로 일어서 게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면 강상인의 옥사로 풍비 박산된 박습의 가문은 그의 막내며느리 안동권씨 에 의해 혈맥이 보존되었고, 뒤이어 박중검의 부 인 전의 이씨에 의해 가문이 부흥되어 박세영, 박 세무,박세옹이3파의중시조가되었다고하겠다. 박세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살면서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하고 공부하며 가문의 재기를 위해 꿈 꿨던 부모의 희망을 잊지 않고 뜻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고정진하였다. 16세기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기에 3 형제 박세영(朴世榮), 박세무, 박세옹(朴世 죕) 등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 박세영 등은 사림사회 와 연망(連網)을 형성하면서 활동하였다. 청강 (淸江) 이제신(李濟臣)은 박세영의 묘갈명을 찬 술하면서, “동국(東國)에 현벌(賢閥)이 많으나 효우(孝友)로 이름난 것은 박씨에 앞서는 자가 없다”며효우를높이평가하기도하였다. 1458년(세조 4) 4월 공식적으로 신원이 회복되 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면서 시 작되었다. 이때의 조치는 이후 박세영(朴世榮)이 사산감역관을 비롯해 전주판관과 풍덕군수와 초 계군수, 돈녕부정 등을 지내고, 박세무와 박세옹 (朴世죕)이 문과급제 후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 던 계기가 되었다. 1458년 신원이 회복된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실록 등에서 명확하 게 설명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 다. 다만 추정해보건대 박의손의 부인이 안동 권 씨가 권제(權 퇀)의 딸이었다는 점이 주요한 배경 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주지하다시피 세 조의 즉위에 중요한 공로를 세우고 공신으로 책 봉된 인물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권람(權擥),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권람은 한명회와 함께 세조가 정난(靖難) 하는데 “제일 앞장서서 도와 성취하게”한 대표적 인 인물로, 정난공신 1등과 좌익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이 같은 세조 연간 권람의 정치적 위상으 로 본다면 충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권람은 박의손의 처가인 안동 권씨로, 아버지가 권제이므로, 박의손의 부 인과는 결국 남매 사이가 되며, 박의손과 처남 매 부 사이가 된다.기록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1 458년 박습의 후 손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한 조치는 당대 정치 실력자인 권람의 지원이 있 었기에가능했을것으로추정된다. 박세영의 부친인 박중검의 처가 전의이씨 이관 식(李寬植)집안과 박세영의 처가인 광산김씨 김 한우(金漢佑) 집안도 주목된다. 이관식의 처는 제2대 국왕인 정종의 옹주 인천군주(仁川郡主) 이고,부친은 사재감정을 지낸 이성간(李成幹)이 다. 박세영의 장인인 김한우의 부친은 김백겸(金 伯謙)으로, 김백겸은 무과를 급제하였고 1467년 (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2등에책록된바있다. 공의 부친(휘 중검)까지는 이처럼 공신가문이 나 외척가문과 인척을 형성하였다. 이후 공(박세 영)에 이르면 처가와 같은 공신 집안이 포함되기 도 하였고 동생 박세옹의 처가인 남양홍씨와 같 이 이른바 ‘기묘사림’계열로 분류되는 세력과 인 척관계로연결되고있음도주목된다. 박세영과 형제들은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의 신 진사류와 동반하여 조선을 주자성리학적 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의 활동 으로 조선사회는 도덕과 수기치인을 근본으로 하 는 주자성리학적 사회의 건설을 앞당길 수 있었 던 것이다. 박세영은 “나면서부터 지덕이 뛰어났 으며 학문에 뜻을 둘 나이에 스스로 독서할 줄 알 았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특별한 사승 (師承)관계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다만,그가 제 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다는 기록이나 ‘기묘사림’을 비롯해 이언적(李彦迪) 등과 교류 한사실로미루어보면,이른바‘기묘사림’계열의 학문적 성향과 유사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된 다. 세영(世榮)은1504(연산군10)년 25세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에 올라 태학(太學)에 유학(遊學) 할 때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성균관에서 경학에 전념하기란 녹록지 않았다. 이때 교육의 피폐한 상황을 보면,훈구세력의 정치주도,사장학적 (詞 章學的) 학문성향의 대사성 등으로 인해서 경학 중심의교수가제대로이루어지지못했다. 특히, 연산군대에 들어와서 연산군4년 무오사 와 이후 성균관교육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정상 적인 경학중심의 관생교수가 이루어질 수 없었 다. 그래서 성균관 유생들은 학문은 연구하지 않 고 이득과 녹(祿)을 먼저 도모하여 의서(醫書)를 강습하는 습독관(習讀官)등의 관직에 소속되기 를 서로 다투었다. 또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를 장 려하기 위해 열흘마다 실시하던 제술(製述), 예 조의 월강, 그리고 전강(殿講)등 방법이 점차적 으로 해이해져서 유풍(儒風)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풍(士風)도 역시 타락하여 생원ㆍ진사 중에서 구독조차못하는자까지나왔다. 심지어 연산군 10년 10월에는 유생들이 글을 읽으며 사귀는 것을 금하는 엄한 법으로 다스려 그 죄가 어버이에 미치므로 사대부집에서는 시서 (詩書)를 꺼려 그 자손들을 배우지 못하도록 경 계까지하게되었다. 또 연산군 11년 10월에는 유생들의 이름이 학 적(學籍)에 실려 있는 자는 5일마다 비록 눈, 비 가 내리더라도 반드시 대궐문에 나아가 군졸같이 정열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은 공부할 뜻 은 없어지고 한갓 구차하게 출세할 마음만 가지 게됨으로써사풍이크게무너졌다. 선생은 이러한 환경을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며 앞장서서 유생들을 모아 나서기도 어려웠 고, 시세를 외면하고 경학만 하기는 더욱 어려웠 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비문학적, 비윤리 적인 성격, 성균관 교육의 억압책, 사풍의 마멸 (磨滅),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대립ㆍ갈등 등으로 인해서 경학중심의 교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 지 지못했다. 중종대에 와서는 연산군대의 성균관교육의 탄 압, 사풍의 마멸 등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성균관 교육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경학적 학풍을 지 닌 중종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중종 초에 유숭조 (柳崇祖)가 대사성으로 재임할 때(중종2년9월 ~ 6년11월)는 도학적 성향을 지닌 유승조가 부지런 히 경학중심의 교수를 해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 으며 그때는 강경해서 14명에 낙제할 정도로 사 풍이제모습을찾았다. 그래서 중종6년 7월 대사성 유승조가 병이 들 어 사직하려 하자 성균관 생원이었던 박세영 등 이 앞장서서 중종에게 상소하여 다시 머물러 두 도록 청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동지사(同知 事)는 겸관(兼官)이며, 대사성은 실관(實官)이 다.병이 즉시 낫지 않으면 오래도록 그 직을 비워 둘 수 없으므로 체직을 명하였는데, 이제 너희들 이 상소하여 유임을 청하니, 사제지간(師弟之間) 에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체직하지 말도록 하 라.”하였다.이것이조선왕조실록에보인다. 이와 같이 박세영은 피폐해진 사풍과 유풍을 다시 지키고 일으키는 존경스러운 스승의 바른모 습을 보면서 성균관의 생원으로써 의연하게 리더 십을발휘한일례를보여주는것이다. 공은 성균관 유학시절에 천성이 성실하고 몸가 짐과 언행이 바르며, 마음이 너그러우니 관생중 모범생이었으며, 남과 사귐에 모가 나지 아니하 고 실로 바르고 엄숙하니 유생들의 중심에서 그 를 따르고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의 품성을 알 수 있음이다. 어느 여름날 성균관에 있을때에 앞뜰에 선 나무 에 벼락 이 떨어 져 같이 있 던 관생 들이 놀 라 흩어 지 었지 만 공은 홀 로 단정 히 앉아 동 요하 지 않으 니 그 소양(素養)이그러했다고가전잡록에서전한다. 경학과 문장은 이미 최고 경지에 오른 것으로 보이며 글씨는 독특한 필법으로 뛰어남이 이미 의정부의 육조는 물론 세간에 소문으로 자자하였 을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유생으로 29세에 필법 이 정예하고 뛰어나 1508년(중종 3년)에 세워진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증천동리(忠淸北道 曾 坪郡 曾坪邑 曾川洞)에 자리한 회령도호부사 양 윤원(楊潤遠1445~1506년) 묘갈의 묘갈문을 충제 (忠薺) 최숙생 (崔淑生)이 짓고, 박세영(朴世榮) 이 글씨를 쓴 것이다. 양윤원은 1467년(세조 13 년)에 내금위 (內禁衛)에 소속되었다가, 이시애 (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성종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인물 이다. 계미(1523년)에 중종이 태학으로 와서 인재를 뽑는데 선생의 글이 입선되었는데 봉한 풀이 떨 어져 임금은 그대로 뽑으려 하였으나 사간원(司 諫院)관원의 말을 쫓으니 낙방되자 사람들이 매 우 애석히 여겼으나 선생은 오히려 태연하였다. 운명이라 여기며 공직에 종사하기를 정성껏 하였 고 청렴하고 밝게 살피고 생각하여 미루는 일이 없었기때문에소송에는반드시공평했다. 1540년 전주판관으로 있을 때 전주 부윤(全州 府尹)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서로 친하 게 지내기로 하여 유명하더니 선생의 정성스러움 을 칭찬하여 항상 공경했다. 선생이 회재 이언적, 정암 조광조 등과 정치적 관계를 맺으며 상합하 니 두 동생은 물론 조카와 손자들도 조광조 신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뒤에 잠야 박지계, 박지경 등이 상소하여 5현을 배향할 것을 목숨 걸 고 주청하여 아산에 있는 인산서원에 배향하게 되는계기가된다. 선생이 벼슬한 뒤 녹봉을 다 어머님께 바치고 조금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고 중취(仲娶)라 는 가엾은 여인이 가난을 견디지 못하거늘 선생 이 그의 가족을 모시고 와서 초가를 지어주고 식 사를함께했다. 박세영은 봉사손(奉祀孫)으로 조상들에 대한 예(禮)를 늘 격식에 맞게 하였고 아우들과 자식 들을 잘 돌보면서 가문의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 이다. 아버지 생전에는 기쁘고 즐겁게 해 드렸으 며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을 다하여 받들 듯하고 밤중에 반드시 일어나 침소에 찾아가 보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맛난 음식을 봉양하기를 늙도록 게 으르지 않았고 사후 섬김에도 여막을 짓고 3년 시 묘살이를 하며 슬픔을 다했으며 제사에는 주자가 례에 따라 초하루 삭망에 사당을 참배하고 형제 가 서로 계절 따라 새로 나오는 음식을 올리지 아 니하고는먹지않았다. 박세영 19세에 아버지 돌아가심에 시묘살이 3 년(19세~22세)동안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나 눈 이 오나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 슬퍼하는 것 이예를넘어섰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시경을 읽다 가 <小雅-谷風之什-蓼莪篇> 요아편(蓼莪篇)에 이르면 눈물을 머금고 읽지 못하더니 당호를 九자로 편액함은 아마 생아국아 로부터 복아에 이르기까지 아자가 九임을 취함이 라.[父兮生我하시고, 母兮鞠我하시니, 뻑我畜我 하시며,長我育我하시며,顧我復我하시며 出入腹 我하시니, 欲報之德인댄, 昊天罔極이샷다-아버 지여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여, 나를 기르실 제 나 를 어루만지고 나를 먹여 주시며 나를 키우고 나 를 가르치시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덮어주시며 나아가고 들어옴에 나를 안아 주시니 그 은덕을 갚고자할진댄넓은하늘도다함이없네요] 때로 왕의 종친과 외척들과 함께 잔치 열어 즐 기며 비록 면복(9촌 이상)된 사이라도 차별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를 구제하되 가정의 유무를 헤 아리지 않았고 상례시에는 더욱 유의하더니 시골 에 사는 종매부(사촌여동생 남편)가 열병( 렐疫) 으로 죽으니 관곽(널)을 마련하여 몸소 가서 염 (殮)을 했다. 선생은 어린나이 아버지가 돌아가니 편모슬하 에 가문의 종손으로써, 집안에서는 가장으로써 중심을 가지고 역할을 충실히 하니 조상들에 대 한 예(禮)를 늘 격식에 맞게 하여 매년 제사와 시 제 지내는 일, 종친 혼례,상례에 예를 갖추는 일, 아우들과 자녀 교육에 전력을 다하는 일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 처리 했다. 평생에 옛 것을 사모하고 선을 즐기며 남에게 모나고 언짢 게한적이없었다. 자제교육은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사람이 태 어나 자란 고향과 시골의 마을의 멀고 가까움, 친 함과 낯섦의 차이에 차별을 두지 않고 순수하게 가르침을 주었고 혹 엄한 꾸지람을 가해도 사람 들이 좋은 영향을 받아 생각이 바람직하게 변화 하니 원망이 없었고 모두들 과오가 있었으면 선 생이알까두려워했다. 실례를 살펴보면, 초계원(중종35 1540년)에 계 실 적에 찬성공이 등과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조 금도 기쁨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공무에 전념하여 저녁에야마치니보는이가이상히여겼다. 평소에 도서(圖書)를 즐기고 가끔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읊고 흥을 붙이니 선비로써 예술적인 감각도겸비하였음을알수있다. 명종이 임금에 올라(1546년) 통치할 때에 선생 이 사옹원 첨정으로 있으면서 당직 근무하였으므 로 당연히 원종공신에 오를 터이나 나는 아니라 하고 동료에게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구당공은 자신의 공을 밝혀 상훈을 얻어 공신록에 오를 수 있었지만, 동료에게 그 혜택을 나누어 줌으로써 넓은도량이아니면불가하지않았나사료된다. 선생은 전주판관 등을 거쳐 돈령부정에 오르고 73세에 하세하셧다. 뒤에 장남 좌찬성 박대립의 귀로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에증직되셨다. 선생이 태어날 때 가문은 조선 전, 중반기 정치 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이 개 국한 이후에는 개국공신의 일원으로써 주요직을 두루 점하였고, 정치적 경쟁과 외척배척을 통해 세종에게 안정적으로 통치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태종의 노력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불 의의 객으로 만들었다. 선생 집안도 태종과 갑계 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공신계열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후에는 재야에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 士 林으로 세력을 전환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 던 것이다.선생의 부친 휘 중검은 멸문집안이라 결혼을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정종대왕의 부마 이 관식은 선생의 풍채와 학식을 높이 사서 사위로 삼았다. 이 로 써 다 시 정 계 에 진 출 할 수 있 는 초 석 이 되 었 고,중검이돌아가시고52세에홀로된부인전의이 씨는 선생을 비롯한 삼형제를 학업에 정진시켜 집 안을 다시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셨다. 선생은 3형 제중장남으로동몽선습을편찬한소요당박세무, 이 조 참 의 를 지 낸 명 헌 박 세 옹 과 형 제 간 이 다 . 선생은 편모슬하에 집안의 장남으로써 아우들 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여 25세는 사마시에 합격 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 유생으로 천성이 성 실하고 몸가짐과 언행이 바르며, 마음이 너그러 우니 관생 중 모범생이었으며, 남과 사귐에 모나 지 아니하고 실로 바르고 엄숙하니 유생들의 중 심에서 그를 따르고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의 품 성을알수있음이다. 선생은 글과 글씨를 잘하여 국서의 표지나 공 경대부의 비문,병풍의 글 등이 남아 있으며,특히, 충북 증평의 양윤원 묘갈, 서울 흑성동의 완성군 묘비 등에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박세영은 봉사 손으로 조상들에 대한 예(禮)를 늘 격식에 맞게 하 였 고 아 우 들 과 자 식 들 을 잘 돌 보 면 서 가 문 의 중흥을이끌었던인물이다. 부인은 광산김씨 (光山金氏1490 성종21년-156 2 명종17)로 김한우(金漢佑)의 딸이며 4남을 두 었다. 장남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의정부 좌찬 성을 지낸 무환당 박대립, 차남은 선교랑 박사립, 삼남은 형조참판을 지낸 박희립, 막내는 박춘립 이다. /글븡사진=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두 동생들을 깨우친 박세영븣 ‘필법이 정예하여 국서,묘갈을 남기다’ 선조 유지를찾아븣 가문과어린시절 박세영선생의신도비(左)와묘소,고양시향토문화재제19호로지정되어있다.조선시대분묘전문가인김우림박사는박세영선생 묘를두고‘현재고양시에서확인된분묘중최고의석물 적,예술적가치를가지고있다. 박세영선생의친필,통정대부안악군수공심광문묘갈 출사의배경과정치적연망 자녀교육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