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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선생 구택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이 1582년 내앞마을에서 옮겨 와 살아온 종가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의 고제로 학통전수의 징표인 「병명」을 받았다. 청렴 강직한 관료로 「전상호(조정의 호랑이)」라 했다. 명과 일본 사신으로 주체적 외교활동을 펼쳤다.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정사의 황망한 보고에 놀라 동요하는 민심을 우려하고, 통신사의 발자국을 따라 곧바로 쳐들어 올 것 같은 '그런 정형은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임진왜란 중 최유사.경상도관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해서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경상도를 1년 넘게 보전하였으며, 왜군의 호남 침투를 막았고, 진주공관에서 순국하였다. 문충의 시호를 받았다. 경과 의의 실행을 중시하는 학봉의 학문은 근현대까지 도도히 흘러, 독립운동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학봉의 장손 단곡 김시추(1580~1640)는 이이첨 등 대북정권의 폭정을 단죄하는 「영남유생만인소」의 소수로 활동했다. 정묘호란에는 안동의병대장, 병자호란에는 유진장에 추대되었다. 종택을 건립하고 「풍뢰헌」이라 편액했다. 호남의병대장 제봉 고경명의 가솔 50여 명이 임란 중 피란을 와서 수년 동안 한 가족처럼 고락을 함께했다. 11대 주손 서산 김흥락(1827~1899)은 퇴계와 학봉을 거쳐, 경당 장흥효,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으로 이어지는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하였고, 몸소 실천한 학자였다. 1890년 민란 때 꾸짖고 타이르니 운집한 백성들이 신복하고 해산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봉정사 의병결의와 호계서원 등의 향회를 거쳐, 3일 만에 일만여 명의 유림을 이끌고 안동 「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안동 항일운동의 최고지도자였으며, 「유학의 종장」, 「조선의 마지막 산림」이라 하였다.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상 등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문인록인 「보인계첩」에는 700여명의 문인이 올라 있으며, 「서산학파」를 형성하였다. 13대 주손 김용환(1887~1946)은 여러차례 항일의병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의용단」 활동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종택과 전답을 모두 처분하고, 부호들의 자금을 동원해 만주 독립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은폐하기 위해 노름꾼.파락호로 위장하였다. 고초와 비방을 감내하면서, 필생의 독립운동을 함구한 채, 광복 다음 해 치열했던 생을 마쳤다. 1995년 조부 서산과 두 분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후손 15명이 독립유공 훈포장을 받았다. 「문충고가」, 「연원회귀가」라 불린다. 보물 503점을 포함한 고문헌과 유물이 「운장각」에 있으며, 왼쪽의 「학봉기념관」에서 항상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