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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2월31일 토요일 10 (제192호) 기획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다. 그 울림을 통해 사람의 성정(性情)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 기에 거문고를 늘 가까이에 두었다. 이는 공자의 예악관(禮樂觀)에서 연유한다. ‘예’가 인간 사회의 바른 질서를 의미한다면, ‘악’은 인간 사회의 조화를 일컫는다. 공자의 유 가 세계는 이 ‘예악’으로 대표되는 질서와 조화로 운영된다. 조선 또한 이러한 예악 정 신이 가득 찬 이상 국가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가 완인으로살고 싶어하지만우리주변이호락호락놓아주지않는가운데에서도 선비 정신으로우리모두에게교훈을주고있으니곧농아당13대종손박신일현종이다. 신우종합건설대표이사회장을맡고 있는 박신일현종은향토사연구를통해지역 문화 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임진왜란에 선조 농아당이 남긴 동사록을 일 본에서 찾아내어 임란사를 재조명하는 큰 족적을 남겼으며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배움 의 길을 열어가는 장학사업 등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면서 사회 고위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면서 2001년 국민훈장 동백장(제33197호)에 이어 지난 10월 21일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함으로서 ‘예악’의 대표적인 삶을 살았기에 박회장의삶을소개해본다. 박신일 회장은 임진왜란에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농아당박홍장선생의13대주손이다.박 홍장(朴弘長,1558~1598)선생의 자(字)는 사임 (士任), 호는 농아당(聾啞堂)이다.1558년(명종 13) 경북 영해 원구리 본가에서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 세렴(世廉)공과 어머니 영양남씨와의 사이에서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말이분명하고영민했다.항상책을 가까이 하며 병서와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소학(小學)을 가까이 하면서 자신을 조절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습관을 내면화하는 데 힘써왔 다. 일찍이 국왕의 신변보호와 왕궁 호위 등을 맡은 겸사복(兼司僕)으로 있으면서 1580년(선 조13)23세에별시무과에서병과22위로급제하 였다.임진왜란중에는제주조방장(1592,35세), 영암군수(1594,37세),대구부사(~1596.6),상호 군(1596), 일본통신부사, 순천부사, 상주 목사 및 상주진 병마첨절제사(1597) 등을 지냈다. 15 96년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농아당 선생은 통신사로 1596년 윤 8월4일 부산 을출발하여11월23일에돌아왔다.통신사의길 은말로서는형용할수없을정도로힘든고행의 길이다.일본에도착하자정보를수집경상도관 찰사를 통해 수시로 선조임금에게 전해졌다. 선 조는이보고서를토대로명에왜군의재침가능 성을 알렸고, 이원익을 부산으로 파견 재침에 대비토록 하였는데, 선생은 통신사의 모든 일정 이담긴동사록(東 汎錄)을남겼다. 충절의 가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충성심과 높은 학문에서 비롯된 애민사상을 지닌 박홍장 선생은박신일회장의롤모델이었다. 1942년 경북 영덕의 빈농에서 아버지 종석(鍾 碩, 보명 종선)공과 어머니 남분희 여사와의 사이 에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 회장(보명 서락) 은가문의종손으로서책임과 의무를 지닌 것을 숙 명으로안고가학을익히며착실히성장했다. 조상숭배와 전통예절을 지키며, 1978년 신우 종합건설 주식회사를 설립, 주택건설사업 발전 을 이끌어 오면서 고용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에 기여하는 한편, 책임 있는 행동과 도덕적 의 무를 삶의 목표로 삼아왔다. 그리고 기업인으로 서 수익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각오로 육영 (장학)사업과 오천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우 리문화지킴이로활동하는데일생을바쳐왔다. 박 회장의 부인 정정순 여사는 대한민국미술 대전 특선과 ‘맑은 하늘에서 점하나 찍었어’ 등 여러 차례 시집을 발간한 여류시인이다. 문화예 술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박 회장의 외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정 여사님은 전한다. 기 업인으로 고용창출과 세수증대 등 성공적인 기 업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박 회장은 무엇에 홀린 듯 삶의 부족함을 느끼며 또 하나의 꿈인 전통문화의계승과복원에매달렸다. 1998년 중랑문화원 개원 발기인으로서 중랑 문화원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중랑문화원 설립을 위한 발기인회를 통해 정관· 임원 구성·회원모집·설립기금 조성 등 개원 준 비에 대한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중랑문화 원설립전부터중랑문화발전에이바지했다. 중랑문화원 개원 첫해인 1998년부터 부원장 으로 재임하여, 원장과 명예원장을 거쳐 현재 고문자리에앉기까지그역사를함께한중랑문 화원의 산증인과도 같은 인물이다. 중랑문화원 설립 이전부터 지역문화 여건이 열악했던 중랑 구에서 문화원 개원을 위해, 1998년 5월 10일 중 랑문화원 설립준비단을 발족하는 등 중랑문화 원의기반을마련하는역할을도맡았다. 개원 당시 IMF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임 에도불구하고문화원발전기금으로2천만원을출 연하여 중랑문화원 개원에 기여하였다. 이 발전기 금을비롯해약6억원의기금을근간으로하여8월 27일 101명이 참가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마치고 9월15일창립총회개최,98년9월26일서울시로부 터 문화원 설립인가를 득하여 10월 8일 법인등기 를마치고개원준비를완료하였으며10월13일성 대한개원식과함께중랑문화원을탄생시켰다. 중랑문화원 개원 후 부원장으로 재임하여 문 화원사업을의욕적으로추진해나갔다.이후20 10년 2월, 5대 원장에 취임하여 향토사 관련 사 업, 문화예술강좌, 봉화산 도당제 등 각종 문화 사업을 추진하며 중랑문화원 발전에 박차를 가 했다. 400년 전통이 깃든 봉화산 도당굿과 도당제는 중랑구의 오랜 민속신앙이자 토속신앙이다. 지 역의 전통문화 수호를 위해 중랑문화원은 ‘우리 문화 역사 만들기’ 제1단계 사업으로 봉화산도 당제보존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봉 화산도당제의 보존과 전승, 학술적 사료 조사와 도당제 홍보, 봉화산도당 주변 개·보수관리, 전 통문화와역사문화복원에힘써나갔다. 1999년 2월 7일, 행사지원추진위원회를 결성 하여 도당굿을 중랑의 특성 문화로 발전시키고 자 하였으며, 지역 전통 계승을 위하여 도당제 의 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봉화 산도당제보존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2월 에 서울시에 협의하여 조사의뢰 하였다. 2004년 봉화산도당제 행사를 통해 서울시 무형문화재 신청 통보를 받았고, 동년 6월 28일 무형문화재 지정 신청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 결과 10월 20 일 서울특별시고시 제2004-324호 서울시무형 문화재종목지정및보유자인정받았다. 마침내 2005년 1월 10일 서울특별시고시 제20 05-4호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4호로 ‘봉화산 도 당굿’이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매년 행해지는 도당굿 행사에는 연간 2천여 명이 넘는 주민들 이 참여하여 역사와 전통을 수호하고 있으며, 그전통과문화재로서의가치를인정받고있다. 현재 중랑문화원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문화 원 관계자들과 회원, 문화사업의 든든한 지원군 이 되어주고 있다. 개원 당시 구민을 위한 복지 시설과 문화시설이 전혀 없었던 중랑구의 문화 창달을 위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기부금 후원으 로 문화원 발전을 지원하며 일평생을 중랑문화 원발전과활성화와문화원의크고작은각종행 사개최나프로그램운영시문화원발전과회원 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1999년 개원부터 현 재까지 설립기금 2천만 원을 시작으로 총 6천2 백만원을후원하고있다. 후원금을 바탕으로 중랑문화원 사무국 안정 화 도모하고 문화예술 사업추진을 통한 중랑문 화발전에기여했다.그리고향토사관련사업으 로 2006년부터 양성·운영해 온 향토문화해설사 의 활동을 중심으로 향토문화해설, 향토문화학 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향토사 책자 발간 등 의 작업을 추진하였다. 문화학교를 운영하여 어 학·생활문화·음악·미술·전통문화 분야에서 매 년 문화예술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중랑 구민에 다양한 문화활동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 여 어린이 뮤지컬, 노래자랑대회, 합창대회, 음 악회, 문화탐방 등을 매년 개최하며 중랑의 문 화예술은서울의으뜸으로자리잡는다. 특히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정신으로 65세 이 상의 무의탁 노인들을 대상으로 1999년 6월 15 일 첫 한방봉사를 하였다. 연 1회 300여 명에게 진료 혜택을 제공하였으며, 2010년 이후에는 중 랑문화원의 뜻을 이어 언재호야봉사단에서 한 방무상진료를이어가고있다. 농아당박홍장의『동사록』영인본국내전파 박 회장의 13대조 농아당 박홍장 선생은 정유 재란 직전인 1596년(선조 24)에 일본 통신부사 에 임명되어 무신 대표로서 왜란을 수습하는 책 무를 맡고 적국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인물이 다.이때조선통신사의기록을남긴것이바로『동 사록』이다. 동사록은 국내에는 오랜 기간 존재가 알려지지 않고 일본 나고야(名古屋)국립박물관 에 소장 되어 있었 는데 이를 알 게 된 후 2000년 7월 사재를 털어 일본으로 건너가 복사하여 영인본을 만듦으로써국내에도알려지게되었다. 나고야국립박물관에서국내로전파되기까지 1999년 7월 일본의 고서점에서 처음 발견 된 동사록은 나고야국 립박물관에서 소장하 고 있었다.동사록 발견 기 사 를 접 한 박 회 장 은 선조의 기록과 임진왜 란 당시 시대상이 담겨 있는 동사록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을 뿐 만 아니라 우리 후대를 위해 전해져야 할 문화적 유산이라는 확신을 두 고국내에전파하기위한각고의노력을펼쳤다. 동사록 영인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평소 친분이 있던 한국일보 부회장에게 한국에 방문 한 나고야국립박물관 관장 및 관계자와의 만남 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박 회 장의 영인본 요청에 대해 나고야국립박물관은 거 절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박물관 측 에 동사 록 영인 본의 필 요성 을 역설 하며 여러 차 례 서 신을 보 냈다 . 그 결과 박 물관 에서 마 침내 영 인본요청을수락하여박회장에게전달하였으며, 열성적인설득이없었다면결코이루어낼수없었 을값진성과였다.현재동사록 영인본은 박 회장 이직접보존하고있다. 븮동사록븯의역사적·학술적의의 동사록은 조선통신사의 행적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조선통 신사가겪었던고초가상세히기록되어있어역사 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또한 동사록의 전파로 박홍장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일본 통산부 사 직을 맡 아 수행 한 행 적을 알 수 있 게 되었 다. 이러한 동사록 계승 업적은 선조의 업적을 후 대에 전하고자 한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이룩한 성과라할것이다.박회장의열정과추진력으로 인하여 국내에 동사록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 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문화융성 창달에 크게 이 바지했을 뿐만 아니라,우리나라 역사적·학술적 연구발달에도지대한도움을주었다.그리고동 사록은 현재 국내 각종 학술총서에 사본이 등재 되어있고학술연구등에활용되고있다. 박 회장은 경북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에 있는 선조 농아당 박홍장 종택을 보존·전승해오고 있 기도 하 다. ‘목사 공 종택 ’으 로도 불 리는 이 집은 본 래 사 당과 본채 로 구 성되 어 있 었으 나 1720년 건 물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본채 건물 한 동이 남아 있다. 13대 종손으로 농아당 종택의 소유자로, 경 상북 도 문화 재자 료로 지 정되 기까 지 종 손으 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경상북도 지역을 비롯, 전국에 농아 당 종택 을 전하 기 위해 거액 의 사재 를 출연 하 는등문화재보존과전승에일평생을바쳐왔다. 각고의 노력으로 1996년 7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될 수 있었고, 마침 내농아당종택은한가문의역사를넘어임진왜 란이라는역사적흔적이살아숨쉬는자료로남 게 되었다. 서울 중랑뿐만 아니라, 영덕군 소재 문화재를 보존함으로써 영덕군의 문화 창달에 도일조하였다. 1960년 12월, 농아당 박홍장 선생의 부조묘 (사당)는 화재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귀중 한 문화유산을 잃을 위기에 지역 유림과 후손은 망연자실하였다. 이에 박 회장은 거액의 사재를 들여 소실 60년만인 2020년 11월 18일 부조묘 (精忠祠)를 복원하여 향사를 받들었다. 부조묘 복원과 더불어 재실 신축·대문 3개 복원(재실· 사당·본체)·주차장 설립·환경정비·경관 조성 (조경사업) 등으로 현재까지 약 30억 원의 사재 를 들여 농아당 종택 보전에 힘써왔다. 이는 역 사적·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을 후대에 전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종손으로 서충효정신을지키고자한굳은신념이있었기 에가능한일이었다.특히부조묘소실이후주춧돌 만 남아있고 가옥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복원 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안타까워 사비를 털어 호연 건축문화유산연구원에부조묘관련자료수집을의 뢰하였다.이에1952년밤에미8군에서촬영한농아 당 종택 항공사진을 연구원을 통해 입수하는 성과 를 이루었다. 이를 토대로 부조묘를 복원하였으며 항공사진은 농아당 종택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 는귀중한역사적자료로써보전되고있다. 학술연구총서발간으로임진왜란연구지원 임진왜란은 역사학자들의 공동관심사이면서 연구해야할주요사건이다.박회장은사단법인 퇴계학진흥회 법정회원으로, 사단법인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수석부회장으로있으면서동사 록을 일본에서 영인한 덕분에 임진왜란 중 통신 사의 역할과 임무, 일본 내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통신사 일행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각종 도서 발간 비용을 사재로 지원하여 역사문화연구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하였다.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 『농아당 박홍 장의 생애와 임란구국활동』(2002.6.15. 발간) 책 자 7천 부 발간을 위해 소요된 비용(연구비·인 쇄비·편저비·발송비 등) 일체를 사재로 지원했 다. 이 책자는 학자들이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중요한연구서가되었다. 또한, 2016년 사단법인 임란정신문화선양회 에서임진왜란7년의생생한기록과숨은공신4 73명의 활약상을 집대성한 『임진란위훈록』을 발간하는데크게기여하였다. 2002년에는 학술총서 『임진란기 농아당 박홍 장의 구국활동연구』(2020.9.7./(사)임진란정신 문화선양회발행)2천부발간에사재를털어발 간 비용에 사용하여 책자 발간에 중추적인 역할 을 하였으며 훌륭한 학술도서를 보급하는 데 기 여하였다. 박 회장은 신우종합건설을 일구어낸 기업인 으로, 창출해낸 이익은 곧 사회에 환원하는 것 이 기업인의 참된 자세라는 신념으로 여러 장학 사업 또한 펼쳐나갔다. 1994년 서울북부지방검 찰청 내 장학재단인 재단법인 북부청소년문화 재단 설립 초대 이사장(현 고문)으로 설립자본 금 13억여 원 중 2억 6천만 원을 사재 출연하였 다. 5개 구청 130여 학교에 매년 장학금을 전달 하면서 수많은 학생이 학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였고, 고향인 영덕의 학생들에게도장학사업을펼쳤다. 박회장이 유년시절 자랐던 고향 영덕은 산악 지역이라는 특성상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는데, 이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학생들 이많았다.지역의학생들을보살펴오던중본격 적으로 재단법인 영덕군 장학회 이사와 무안박 씨 영해파 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사재를 출연하 여 인재육성에 매진하였다. 영덕 지역의 문화재 보존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학생들을 지 원하는장학사업을펼쳐지역인재육성에도큰 역할을담당하였다. 이처럼 박 회장은 전통문화계승과 발전, 지역 문화창달, 지역인재양성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 하였으며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을 지속해서 사 회에 환 원하 는 노 력을 현재 까지 도 이어 오고 있 어박문(朴門)의자랑으로지난10월21일옥관문 화훈장 서훈은 2022년 임인년을 빛내는 자랑스런 성 손임 을 다시 한 번 확인 된 것이 다. 돌아 온 새해 에도박회장의봉사와희생정신이거문고의힘찬 울림으로 퍼져 코로나19에 지친 국민 모두에게 따뜻한선물로안겨지길기대해본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종친탐방..... 무안박씨 박신일 신우종합건설 회장 -임란공신 농아당 박홍장선생 13대 종손 박신일 회장은 지난 10월 21일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영예을안았다. 농아당 종택전경-경북영덕군축산면칠성1길5-10,12(①부조묘정충사②농아당종택③농아당종택재실④농아당종택외삼문⑤농아당 종택재실내삼문⑥관리사) 충절의 가문에서 태어난박신일회장 전통문화는후세에의해더욱빛나는과제 문화사업추진과중랑문화활성화 기부금후원으로문화원발전지원 임란공신농아당박홍장선생현양사업전개 동사록 ‘목사공 종택’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지정과보존·전승 농아당종택(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320호) 전 소된 농아당 부조묘 사당 온전한 복원 농아당박홍장선생의부조묘.1960년12월화재로소실된 농아당(聾啞堂) 박홍장(朴弘長)선생의 묘우(廟宇,불천지 위) 정충사(精忠祠)가지난해11월18일(음10.4) 60년만에 복원되었다. 불우학생을위한육영(장학)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