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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연해주에서 1928년 10월에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조명희는 1929년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었다.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 1회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