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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교는 1925년 8월 23일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신방리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당시 3천만 인구에 10만에 불과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응교는 아내가 전해준 김익두목사의 설교집을 탐독하던 중 설교 속에 민족정신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책을 돌려주려고 처가 마을에 갔다가 송홍근목사의 부흥사경회에서 감동을 받고 1944년 11월에 예수를 믿어 1945년 성화신학교에 입학하여 해방을 맞은 후로도 계속 수업을 해서 졸업했다. 배덕영교장의 배려로 성화신학교 부설 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남산현교회 청년회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호되게 비판하고 경계를 시킨 것이 내무서에 차곡차곡 보고되었다. 서부연회에 사무를 맡는 등 학교일, 교회일, 연회일까지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1950년 6.25가 터졌고 전도사는 연회일로 ‘평양에 숨어있는 박대선박사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 9일 체포되었다. 박박사의 은신처에 대해 물음 당하며 고문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혀를 깨물며 입을 열지 않았고 치료도 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로 내무서 유치장에서 26세에 순교하였다. 출처 : 총회순교자기념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