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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香亭(육향정) 吳世昌(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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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吳世昌)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博文局主事)가 되었고, 우리 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낭청·총재비서관(郎廳·總裁秘書官)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局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 6)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孫秉熙)·양한묵(梁漢默)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최 린(崔麟)·권동진(權東鎭)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 린과 최남선(崔南善)이 협의하여,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므로 손병희·최 린·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道師)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도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관한 계획을 알려 찬동을 얻었는데, 특히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尙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후에는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長)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全國愛國團體總聯合會)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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