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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고 각지의 적을 소탕하다가 그해 4월 왜의 헌병오장 무토(武藤)부대와 직보 장수령에서 교전한지 수십회 드디어 이곳 오누지 전투에서 동군 읍천면 어천까지 추격하면서 무토 등 십여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불행히 조집사는 전사하고 의사는 심한 총상을 입었으나 남은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그해 5월 울진, 죽변, 왜관을 격파하고 또 영북을 무찌르다가 적의 대공격을 받아 김도포장등 많은 병력을 잃게되자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재기를 약속하면서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때 왜적은 의사를 잡다못해 상금과 높은 벼슬을 줄것이니 자수하라고 방을 붙였다. 이때 한 동지가 상처를 염려하여 자수를 권하자 의사는 크게 꾸지시기를 차라리 제의 전횡과 같이 의로운 죽음이 있을지언정 어찌 한의 형률과 같이 더러운 삶을 찾겠는가 하고 자취를 감추어 영일군 청하면 연상피지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글방 훈장 노릇을 하였으나 실은 구국의 역군을 기르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것이다. 그러나 1919년 2월 3일 재기의 웅도를 이루지 못하고 천추의 한을 품은채 총상의 여독으로 영면하시니 향년이 44였다. 의사는 1874년 11월 16일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석계선생 이시명의 10대손으로 탄생하니 본관은 의령이오 그 빛나는 이름은 현규요 자는 하현이라. 우해와 내산은 그의 호다. 당시 의병 김완이에 대한 1909년 6월 9일 대구지방재판소의 소위 판결문에는 폭도괴수 이하현이라 하였고 오누지상 이 자리에 세웠던 적추 무토의 순직비에는 비적괴수 이하현이라 한것으로 보아 의거 당시에는 자를 썼던 것 같다. 이제 그 처럼 애써 찾으려던 조국의 주권이 회복된지 20년 정부에서는 빛나는 건국공로장이 내리고 동포들은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서 거룩하신 업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