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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강진 지역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장흥군(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의 박병락(朴炳樂) 부부(부인, 文方禮)가 입도한 1864년이지만, 이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증한 시기는 이인환(李仁煥), 이방언(李邦彦), 문남택(文南澤) 등 지역의 지식인들이 입도하기 시작한 1891년 이후였으며,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이 일어났던 1892·1893년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동학교세가 확산되면서 장흥·강진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와 1893년 1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같은 해 3~4월에 열린 보은과 금구집회에 모두 참가하면서 연대의식을 키워나갔다. 장흥·강진 농민군들도 이방언, 이인환, 구교철, 이사경을 비롯하여 많은 접주들을 따라 전봉준 농민군과 같이 합류하였으나, 자세한 활동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청죽(靑竹)으로써 얽어 닭의 장태와 같이 만든 것으로 밑에 차바쿠를 붙인 것이며 그 속에는 군사가 앉아 총질을 하게 된 것이니 이 장태를 만든 사람이 장흥 접주 이방언이므로 그의 별호를 이장태라고 불렀었다”고 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은 5월 8일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해산한 뒤 각기 자기 고을로 돌아왔다. 귀향한 농민군들은 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에 들어갔다. 장흥지방 집강소는 6월 20일경 부산면 자라번지에 가장 먼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라번지는 이사경 접주의 근거지로서 당시 그 세력은 묵촌리의 어산접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이사경이 군수가 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사』에는 6월 20일경 “장흥군 부산면(夫山面) 자라번지(鱉番地)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7월 3일에는 장흥읍내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사」에 따르면 7월 3일 장흥의 농민군이 장흥읍 내로 이동하여 도회(都會)를 열었으며, 농민군들은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혹은 십여인 혹은 수십인, 삼사십인이 길에 끊어지지 않았는데, 서로 부르기를 접장(接長)이라 하였고, 아이들은 동몽접장(童蒙接長)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속인(俗人), 자신들은 도인(道人)이라고 하였으며, 상좌(上座)의 사람을 교장(敎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흥의 농민군은 10월 중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기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사에는 이때 농민군이 “장흥 사창시(社倉市)에 1,000여 명이 모였으며, 영암 덕교(德橋)와 강진 석전시(石廛市)에도 계속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장흥부사 박헌양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수성소를 설치하였다. 장흥 수성군과 벽사역의 역졸, 전라병사 휘하의 병영군까지 동원, 무장 관군은 3천명에 달하였다. 10월 19일부터 벽사역 찰방·장흥부사·강진현감·전라병사들은 일제히 농민군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적지 않은 농민군이 집을 헐리거나 곤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흥·강진 지역 수성군의 위세를 본 농민군은 11월 초순 멀리 함열과 금구 등지의 농민군에게 지원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강진현에서도 10월 29일 순무영에 급보를 보내 강진현의 힘으로는 농민군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장흥의 농민군은 장흥 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11월 하순부터 웅치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곧 이어 보성으로 이동하였고, 금구(김방서)와 화순(김수근), 능주(조종순) 등지에서 5천여 명이 도착하자, 장흥의 농민군 5,000여명과 합세한 이들은 12월 1일에는 북면 사창으로 진출하였다. 장흥부사 박헌양과 병영의 서병무(徐丙懋) 병사, 그리고 벽사 찰방 김일원(金日遠)과 강진현감 민창호(閔昌鎬)도 농민군의 위세를 듣고 서둘러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12월 3일 아침 사창으로부터 벽사역 인근으로 진출한 농민군 1만여 명은 12월 4일 새벽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벽사역관에 포격을 가했다. 이미 역졸들은 도망가 버려 저항하는 세력이 없어 단숨에 점령하고 말았다. 벽사역은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점령할 수 있었다. 벽사역을 쉽사리 점령한 농민군이 12월 5일 새벽 장녕성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쌌다. 동이 트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력부대는 정면에 있는 동문(지금의 장흥극장자리)에 진군하였다. 죽창을 휘두르는 소리를 신호로 3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동문에 진공했던 농민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파괴하고 입성하였으며,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남문과 북문으로도 농민군이 입성하였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이 광경을 본 박헌양은 문루에서 내려와 동헌으로 들어갔다. 1시간만에 장녕성은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부사 박헌양을 체포하여 문책하였으나, 박헌양은 오히려 성을 내며 꾸짖다가 농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부사 이외에도 농민군의 공격을 막다가 희생된 수성군 장졸의 수는 96명이다. 전사자가 대부분이지만, 붙잡혀 항거하다 처형된 사람도 있었다. 특히 기실(記室, 부사 측근에서 기록을 맡았던 벼슬) 박영수(朴永壽)와 수성별장 임기남(任璂南, 昶南), 통장(統將) 주두옥(周斗玉), 호위장(護衛將) 주열우(周烈佑)도 같이 희생되었다. 부사 박헌양의 시신은 12월 7일 선비 김용후(金容厚)와 백우인(白禹寅)이 몰래 수습하여 입고 있던 두루마기로 시신을 싸서 시장의 모래에 묻었다고 한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