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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3.15의거 ▶3.15선거일 낮12시 45분 광주 금남로에서 1,200여 시민,학생,민주당원이 합세해 벌인 부정선거 첫 규탄이 「광주3.15의거」다. 이 시위로 10명이 크게 다쳐 피로 거리를 낭자케했고 30여명이 연행 또는 수배됐다. ▶이 시위에서 정리만(당시 35, 이필호의원 부인)씨가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으로 임신7개월된 태아와 함께 치료 2개월만에 숨지고 조계현(4.19국가유공자/당시27,이필호의원 보좌관)씨가 경찰의 칼빈 총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맞아 피를 적시며 졸도했다. 4.19혁명의 최초의 피다. ▶「광주3.15」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주주의 초석을 다진 4월의 최초 횃불이자 첫 피로 4.19혁명의 시원(始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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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집권자유당이 제4.5대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꾀하려다 이날 광주/마산에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딧혔다. 광주/마산3.15 시민봉기에서 비롯된 4.18서울고려대의 반공청년단에 의한 집단테러 대유혈사태가 4.19 전국불길을 치솟제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것이 4.19혁명이다. 순수학생들이 중심이 된 세계유일의 시민혁명이다. 3.15의거가 원인이 된 4.19혁명으로 전국에서 185명(광주8/마~부산31/서울147)의 고귀한 넋이 민주제단에 산회되었고 7천8백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