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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허상기선생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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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기(許相基)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고향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만일 구금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은밀히 부락민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육창주·김용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시위군중 2,3백명이 투석으로 주재소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안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금산(錦山)에서 온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오후 3시경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몽둥이로 일본 헌병들의 말(馬)을 후려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이원 장터에는 옥천과 대전(大田)에서 일군 수비대원이 증파되었으며, 일본 헌병도 10여명이 부상하였다. 그도 시위활동을 하다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지금 옥천·이원면민들은 당시의 애국적 거사를 기리는 9현비(九賢碑)를 세워 당시의 주동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