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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 김규식선생 기념비(1881.1.29~1950.12.10) 우사 김규식선생은 1881년 1월 29일 경남 동래에서 청풍김씨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3남으로 출생하여 16세의 어린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매우 일찍 도미 유학의 길에 나서 1897년 로녹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13년 도미 유학생으로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뛰어들어 3.1운동 이전인 1919년 2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로 떠났고, 곧이어 대한국민회.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서 맹활약하였습니다. 1922년에는 피압박 민족해방을 위해 모스코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일제의 만주 침략 이듬해인 1932년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 중한민족대동맹을 조직했으며, 1935년에는 독립운동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해 김원봉과 중국 내의 정당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으로 김구 주석과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기 위해 진력했고, 1945년 11월 23일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32년만에 귀국해 조국의 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1946년 7월부터는 우측 수석대표로 좌측 수석대표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해 활약했고, 이어서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민족의 대의를 살리기 위해 친일파 처리에 앞장섰습니다. 민족 분단이 가시화되자 1947년 12월에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해(주석 김규식) 남북지도자회의 소집을 주창했고, 1948년 4월 26일부터는 김구와 남북협상(남북요인회담)을 이끌었으며, 4월 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통일정부 수립의 대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950년 12월 10일 끝내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통분의 눈물을 삼키며 평안북도 만포진 별오동에서 서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향년 69세였습니다. 정부는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2022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