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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찬엽(余燦燁)은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