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page

2022년10월31일 월요일 5 (제190호) 관향조 종친회 고려 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두 문동으로 들어갔던 송은박익 선생과 지 극한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조정랑과 이 조 정 랑 에 오 른 아 당 선 생 과 졸 당 선 생 형제 등 삼부자의 제향이 신계서원 정충 사에서 9월 중정일을 맞은 지난 11일 지 역유림주관으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오전 10시 개좌를 열어 정태근(鄭台根) 원임(院任)으로부터 정충사에 배향된 삼현에대한 행장을 소 개받고, 하행락(河行洛) 원임으로부터 는 1개월전 서원 임원회의에서 천거된 오집사에 대해 추천배경과 경력 등을 전 달받고나머지집사분정을마쳤다. 천거된 제관은 초헌관 조온환(曺穩 煥) 전 단성향교 전교, 아헌관 이전용 (李퀸庸) 산청군노인회 부회장, 종헌관 문병운(文炳雲) 남평문씨 충선공파종 회 前사무국장,집례 정옥영(鄭玉永)前 행정공무원,축 신갑열(申甲烈)전 행정 공무원, 알자 박승제(朴承濟) 신계서원 보존회장, 봉향 조두환(曺斗煥), 봉로 박도문(朴道文), 봉작 김봉규(金奉圭) 전작 박순제(朴淳濟, 신계서원 사무국 장), 진설 박종하(朴鍾夏), 찬창 하행락 (河行洛, 원임), 사준 박춘재(朴春在) 신계서원 前보존회장 등이 천거되어 각 각 소임을 다하였으며,이완규(李完圭), 박종현(朴鍾鉉), 박종식(朴鍾植) 진주 향교 전교 등이 학생(學生)으로 참례하 였다. 제향 후에는 하행락(河行洛) 원임의 사의로 신임 정옥영(鄭玉永) 원임을 선 임 천권을 전달하였다. 하 원임은 이 자 리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물러난 듯 하 여 아쉽지만 신임 정 원임은 다방면으로 박식하여 서원발전에 적임자이기에 홀 가분하다며 앞으로도 더 열심히 노력하 여 서원발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말했 다. 정옥영 신임 원임은 행정직 공무원으 로 정년을 맞은 뒤 유학자의 길을 걸으 며 지역의 큰 어른으로 많은 사람을 이 끌어 오고 있다. 이날 인사말을 통해서 는 모 든 것 이 천 학 비 재 한 데 큰 걱 정 이 앞장선다고 말하고 최선을 대해 보겠다 며포부를밝혔다. 신계서원(新溪書院)은 1836년(丙申 헌종2)에 시공(始工)하여 1869년(己 亥)에 工役)을 마쳤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사(貞忠祠)에 송은 박익 선생을 주벽으로 영정(影幀)을 봉안하 고 아당(啞堂),졸당(拙 堂)두분의 배행 하고 춘(春)3월 추(秋)9월 중정(中丁) 에유림에서봉향(奉享)하였다. 1868년(고종5 무진(戊辰))에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어 응봉 산 중턱 현 위치에 영정각(影幀閣) 3칸 과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여 송은선 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후손들이 춘추로 향화(香火)를 받들었으며 학당(學堂) 으로 이어졌다. 1985년(乙丑) 3월 채례 시(菜禮時)에 유림들이 신계서원을 복 원하자는 공의(公儀)가 있은 뒤 후손들 이 그 일을 맡았고, 유림들이 도와 經營 하니 사우3칸과 내삼문 그리고 대문3칸 을 중건하고 주위를 정화했으며 제기 18 점이 지방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지자체에서 문화재 보호각(東齋)3칸을 중건하였으며 원우(院宇)를 번와( 붕 瓦)하고 보수하고, 1989년 3월 11일 복 설하였다. 2020년 가을부터 2021년 5월 말까지 순환도로를 개설하고 꽃동산 및 쉼터를 만드는 등 정화사업을 마무리함으로서 서원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편의를 제공 하게되었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신계서원제향지역유림주관봉 행 신계서원추향이지난11일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되었다.(사진제관왼쪽부터정태근원임,조온환초헌관,이전용아헌관,문병운 종헌관,정옥영집례, 신갑열축관順) 독축광경 개좌광경,신계서원제례는전통예법에따라엄숙 하게진행된다. 불사이군의절의지킨송은선생과아들아당·졸당삼부자학덕기려 1949년 창립되 어 수도권 종친들 의 구심점이 되어 온 함양박씨 재경 종친회(회장 명 환)가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첫 회 의 를 갖 고 활 성 화를 위한 준비에 최 선 을 다 할 것 을 다짐한 가운데 특 별한 안건 없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아 쉬움을 털어내고 친목을 도모하는 장 (場)을마련했다. 명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코로나19 를 이 기 지 못 하 고 작 고 하 신 분 이 있 는 지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모 습으로 뵙게 되어 반갑다고 말하고 지금 호주제가 폐지되고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부자와 형제간의 천륜이 무너 지고 아름다운 가족제도 무너지고 있어 안타깝다며 충효정신을 우리나라의 아 름다운 정신문화로 승화 발전시키는데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이어 함양박씨 후손들은 큰 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히면 서 그 뿌리를 생각하고 맑은 물을 마시 면서 근원을 생각하며 항상 조상님의 음 덕에 감사하며 신라왕족의 후예라는 자 부와 긍지를 갖고 화합과 단결하여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 였으며, 지난 2019년 각 파별로 소위원 회를 구성하여 종친회 발전 계획을 세웠 으나 코로나로 인해 무산되었는데 이제 머지않아 활성화를 위해 세웠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조만간만남을위한추진의뜻을밝혔다. 안동에서 올라온 원갑 대종손은 격려 사를 통해 어려운 시기에 모임을 주선 하는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박명 환 회장에게 감사와 치하를 드린다고 말하고 수도권 종친회가 잘 되면 지방 도 따라서 잘되는 것이라며 우리 함께 노력하자며 수도권 모임의 중요성을 강 조했다 함양박씨대종회 제23~24대회장을 역 임했던 석남 회장은우리 함양박씨 종훈 은 숭조상문(崇祖尙門) 돈종유후(敦宗 裕後)로 이는 조상을 숭배하고 문중을 위하며 종친을 존중하고 친족간 돈독하 고 의좋게 하여 이를 후손에 전해주라는 것이며 또한 후손을 위해 많은 일을 하 라는 뜻도 있어 대종회장에 취임하면서 중훈을 중시하고 명심하여 나름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이를 시기하고 질타하는 사례를겪었다며종친간에서로의좋게, 잘못했더라도 이해하고 받아주고 종친 간에 좋은 일은 칭찬해주고 어려운 일은 함께 도와주는 아름다운 정신으로 우리 함께 노력하여 수도권 종친회가 잘 될 수있도록지혜를모으자고독려했다. 홍엽 전 회장(충효예문화운동본부 총 재) 재경종친회 총무 6년 회장 6년을 하 여 나름대로 집행부의 어려움을 알고 있 다며 힘들고 어려울수록 여러분들의 협 조해주야 종친회가 잘되고 발전할 수 있 다며 협력을 강조하였으며, 구소명종친 회 동주 전회장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화 합하여 종친회 발전이 있길 기원한다며 짧은덕담을건넸다. 박연환 대종회장 신도비각 복원사업 이 차 질 없 이 진 행 되 고 있 다 고 밝 히 고 4 천만원의 군예산을 확보,조만간 신도비 이전 및 비각건립 기공식을 가질 예정이 라 고 말 하 고 좌 안 동 우 함 양 이 라 할 정 도로 양반고을임에도 우리 함박 후손들 은 토반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 하였다며 양반고을을 지키는 명문의 후 예가될수있도록노력하자고말했다. 법무법인 최앤박 대표 박영립(전 법 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1파27세)변호 사는 40년의 경력으로 종친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며, 박희 준 한국 출산장려협회 이사장(3파)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심각성을 전하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지는 못할 망정 현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을 물려줄 수 없다는 각오로 출산을 위한 부단한 홍보, 교육, 캠페인에 함께하자 고말했다. 재경종친회는 지난 1949년 애국지사 박열의사의 발의로 창립되었으나 6·25 사변을 겪으면서 침체되었다 1965년 재 창립수순을 밟은 뒤 매 행사마다 수 백 명이 참석하면서 수도권 함양인의 구심 점이 되어왔다.그리고 상서공묘역 성역 화사업에 재경종친회 분담금으로 책정 된 7,000만원보다 114.33%를 달성한 8,0 03만원을 모금 사업에 보탬으로서 그 저 력을과시하기도하였다. 함양박씨재경종친회임시회의가 져 함양박씨재경종친회가코로나19로인해3년여만에첫회의를갖고참석한종원들은활성화를다짐하고있다. 코로나19인해3년만에첫회의븣활성화를위한준비박차 박명환 회장이 인사말 을하고있다. 영해박씨 문중의 단종절신 7현 (賢)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 고 왕권을 찬탈할 때곧은 절개로 형 (兄)·제(弟)·자(子)·질(姪)이 한마 음 으 로 같 은 길 을 택 했 다 . 영해박씨 문중은 세종대왕으로부 터 총애를 받으며 평양서윤 영해박 씨 박창령(朴昌齡) 선생의 장남 박 낭은 병조정랑, 차남 박도는 판중추 부사, 삼남 박제는 예조좌랑, 박낭 의 아들 박규손은 예빈경, 박천손은 사직, 박도의 아들 박효손은 형조참 판, 박인손은 병조정랑, 박계손은 병조판서 등 모두 쟁쟁한 직책에 있 었으나이들중 박도박제 박규손 박 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 등 7명 은 두 임 금 을 섬 길 수 없 다 며 단 종 을 추모하며 매월당 김시습과 정재 조 상치 등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 근남 면 초막동으로 와 함께 은둔하며 절 의를 지켜와 이들의 절의정신을 기 리고자 세워진 구은사는 이들 충신 들의 절의를 숭상하기 위해 1818년 (순조18)에 영해박씨 후손들과 관 내 사림의 발의로 건립되어 향화를 받들어오고 있는가운데 9월 상정일 (上丁日)을 맞은 지난 1일 지역 유 림과 후손 등이 참례한 가운데 이현 종 철원군수가 초헌관으로 헌작하 고 아헌은 조상치 선생의 후손인 창 령조씨 강릉종친회장, 종헌관은 영 해박씨 박태봉 영해문중회장이 각 각 헌작하며 엄숙 봉행되어 구은의 절의정신을기렸다. 구 은 사 는 단 종 절 신 구 은 (九 隱 ) 의 절의를 숭상하기 위해 1818년(순조 18)에 영해박씨 후손들과 관내 사림 의발의로건립되었다.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초막동에 내려와 은거하며 단종의 복위를 도 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지 3백50 여 년만이다. 그러나 1864년 흥선대 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해 철거되 었다가 고종3년(1894년)에 이 터에 설단(設壇)하여 구현(九賢)을 다시 배향하고, 1921년 중건되었으나 한 국전쟁의 와중에 사우가 완전 소실 되어 제향이 중지되다가 1960년 박 규손의 15대손 박재민의 발의로 초 막동에서 김화군수의 초헌으로 노 천봉행(露天奉行)되었다. 이후 1971년 가 사우(假 祠宇)를 부설하고 제례를 이어 오다 1977년 영해 박씨 후손과 사림제현(士林諸 賢)의 찬조로 신 사우(新 祠宇)를 중건하고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준공 및 추계제향(秋季祭享)을 올 렸다. 구은사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 월상정일에봉행된다. /자료제공박용옥(영해박씨后) 단종절신구은(九隱)추모제향열려 강원도철원구은사븣이현종철원군수초헌관으로헌작 모부인의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틈틈 이 글 을 지 어 고 금 (古 今 ) 의 사 치 와 검 소 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아들들에게 경 계토록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계주명 (戒酒銘)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기도 하 였던 공효공의 추모제향이 개천절을 맞 은 지 난 3 일 있 었 다 . 이날 제향은 우천으로 인해 파주시 오 금동 묘역 아래 중추재에서 상룡(부정 공 后)대종회 고문의 집례로 형재(공간 공 后)부회장의 초헌례에 이어 석용(부 평공 后), 상태(숙민공 后) 현종 순으로 헌작하고 용호(연안공 后) 부회장으로 독축으로 엄숙 봉행된 가운데 상용(공 간공 후), 종팔(별좌공 후) 대의원이 좌 우집사를맡아제례를도왔다. 공효공의 휘(諱)는 중손(仲孫), 자 (字)는 경윤(慶胤), 호(號)는 묵재(默 齋)또는 백당(栢堂)으로 시호는 공(公) 의 부음(訃音)을 접한 세조임금이 경순 사상왈 공(敬順事上曰 恭)이요 자혜애 친왈 효(慈惠愛親曰 孝)라는 시호(諡 號)와 함께 부조지전(不 튐之典)을 내려 청주시 옥산면(玉山面) 신촌(新村)마 을에 부조묘가 있다.1412년(태종 12.임 진) 정월(正月)에 태어나 1426년(세종 8. 병오)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해 가을에 배위(配位)를 맞이하니 남 평 문씨(南平文氏)로 공조정랑(工曹正 郞)승조(承祚)의따님이다. 공께서는 1435년(세종 17. 을묘) 4월 7 일 에 문 과 (文 科 ) 에 급 제 하 여 집 현 전 박사(集賢殿 博士)에 제수되어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 人), 서운판관(書雲判官 관상감)으로 발탁되어 장영실(蔣英實)을 독려하여 경복궁 뜰에 혼천의(渾天儀)를 간직한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해시계 앙부 일구(仰釜日晷)를 발명 제작하게 하였 다. 세종대왕의 특명이기도 하였다. 세 종, 문종, 단종, 세조 등 네 분의 임금과 도승지와 공(工), 이(吏), 형(刑), 예조 (禮曹)의 사조(四曹) 판서와 의정부 좌 참찬,한성부 부윤, 사헌부 대사헌 등 요 직을 두루거친 공께서는 1466년(세조 1 2. 병술) 5월 26일에 하세(下世)하시니 향년(享年)55세이셨다. 공효공은 계유정란에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에 오르고 인하여 전지 200결 (結), 노비 25명, 안구마 1필, 백은 50냥 그리고표리1단을하사 받았다. 이 시절의 전지(田地) 200결(結)은 백여만평(坪)이웃도는넓은땅이었다. 공의 묘소 앞에는 장명등(長命燈)이 좌우로 두 개가 세워져 있는데, 두 개다 고려시대의 양식이라 하며 좌측의 석등 (石燈)은 그 형상(形象)이 일월형각(日 月形刻)으로 조각되어 그 모양이 기이 하고 이채로워 2001년 10월에 정부 보물 제 132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생전에 서운판관(書雲判官)이 되어 관상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라는 추정 이다. 공의 묘하 5백여미터 동구밖에는 육 척(六尺)장신의 신도비(神道碑 사진2) 가 서있다. 공의 신도비문은 상낙백(上 洛白)김수녕(金壽寧)이 글을 지었는데 뒷날에 동문선(東文選)에 오른 유명한 비문이기도하다. 공효공박중손선생추모제향봉행 밀양박씨공효공박중손선생추모제향이지난3일파주시오금동중추재에서봉행된가운데용호부회장이독축을하고있다. 공(公)의부음(訃音)을접한세조는경순사상왈공(敬順事上曰恭)이요 자혜애친왈효(慈惠愛親曰孝)라는시호(諡號)와함께부조지전(不 튐 之典)을내려 제향후제관을비롯대종회임원진이함께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