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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일 ~ 5일 낙영재에서 태극기와 죽창을 준비하다. 4월 1일 학다리 역전에서 2일에는 나산면사무소앞, 3일에는 손불, 5일에는 엄다에서 산에 봉화를 피우면서까지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큰 위력을 보이지 못하고 함평에서 온 이인행 열사가 문장사람 이윤상을 만나고 월야사람들과 만나 4얼 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한문서당 낙영재에서 김기택, 장효섭, 정용섭, 이윤상, 정재남등 24여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기획하여 극비리에 몇일전부터 그날 투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태극기 1천개와 김기택의 형 김기봉의 대밭의 대나무를 이용 죽창과 격문을 낙영재와 영사재에서 만들고 정재식(재남의 아우)을 통해 인근에 격문을 보내 중의를 모으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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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8일 독립만세 소리가 문장장터에 메아리치고 태극기가 물결치다. 거사 전 날 밤인 4월 7일에는 마을사람 십수명이 태극기를 더 만들어 밤늦게 문장시장 근처 요소요소에 운반하여 숨기는 등 거사를 위한 면밀 주도한 일이 벌어진다. 4월 8일 아침에는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거리 거리에 배치되어 민중들에게 취지를 알리고 태극기와 죽창을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시장에 모이도록 하였다. 김기택, 정재남, 이윤상, 장효섭, 정용섭등이 시장에 나온 대중을 선동하니 일제히 봉기 독립만세 소리가 시장에 메아리 치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이어 일본 경찰 문장주재소와 병참소를 기습 습격하고 일진은 함평 쪽으로 일진은 영광쪼그로 일진은 송정리쪽으로 행진했다. 영광.함평.장성.나주에서 지원온 일본경찰대와 헌병이 총검으로 대오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며 구밀교 공사를 하던 일본인 잡역부 10여명이 쇠망치를 휘두르며 대오에 뛰에들어 거리는 곳곳에서 피로 물들게 하였다.한편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김기택이 헌병들에게 구타 검속되어 가자 이윤상, 장효섭등이 경찰 주재소앞에서 애국청년 석방하가고 요구했으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왜놈들은 오히려 폭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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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질 때까지 만세운동은 계속되었고 끝내 총검앞에 해산되었는데 죽창을 든 일부 청년들이 일경과 대치하며 많은 피해 사례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때 주모자 20명이 당일 검속되고 그중에서 김기택(징역1년), 이윤상(징역6월), 장효섭(징역8월), 정재남(징역6월), 정용섭(징역8월)은 실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15명은 불기소 처분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