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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2월28일 일요일 4 (제170호) 특 집 용산서원은 숙종31년(1705) 봄에 삼척부사 이세필(李世 弼)이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고하여참봉최세량(崔世亮)을도훈장으로임명하고자기녹 봉을 희사하여 그것을 자금으로 학도 수 십 명을 모집하여 교 육을 강화하니 이 지방의 뜻있는 분들이 이 부사의 뜻에 호응 하여계(契)를모아이세필과같이학당을설립하였다. 이세필은 손수 용산학당(龍山學堂)이라는 현판을 써 걸고 또 학규(學規) 21조도 제정, 학도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읽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정무의 여가를 선용 자주 학사에 와서 학도들의 강의에 임하게 되니 얼마 되지않아 사 방에서글읽는고장이라칭송이자자하였다. 1705년 9월 부사 이세필이 사헌부 집의로 영전되어 떠나자 같은 해 10월 선생의 문인 및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학당 북쪽 한곳에 생사당(生祠堂) 한 칸을 건립하여 진상( 像·實像) 을봉안하고아침저녁으로예(禮)를드림에성력을다했다. 1706년 흥학비(興學碑)를 세우고, 1708년 10월 청금록(학 적부)를작성하면서체계적인학생지도에심혈을기울였다. 이와 같이 서당으로 시작한 용산서당은 숙종 45년(1719) 8 월에는 사당 3칸을 증축하고 좌랑(佐郞) 윤정(尹丁)이 이세 필의 위패를 쓰고 좌의정 조태억이 봉안문을 찬술하여 봉축 하고용산학당을격상하여용산서원이라하였다. 1729년 사우 3칸과 명륜당,동서 익랑 등을 중건하고1749년 삼척부사 박상영이 비각을 중건 하였으며, 1768년 강원도백 이태좌(이세필의 장남)가 학전(學田) 수결과 원노 두 사람을 보내어운영의기초를다졌다. 숙종31(1705)용산학당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로부터 14년 후인 숙종45(1719)에 서원이 된 용산서원은 고종5년(1868) 대원군의 전국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될 때까지 163년간 여 러 차례에 걸친 중수 개축 등이 거듭되었고,철폐 후에도 복잡 한과정을거쳐1956년중건복설했다. 용산서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특별한 것이 없고 공부 하고싶은사람은누구나입학할수있다.용산서원학규에의 하면 문벌(門閥)의 고하(高下)나 연령의 장유(長幼)를 막론 하고인품이단정하고준수(俊秀)한자로서배우고자하는자 는 입학을허락한다고 하였다.실제로 1708년(숙종34)용산서 원의 재학생은 23명이었는데 연령별로 보면 31세부터 10세까 지로 다양(多樣)하며 성씨별로 보면 강릉최씨 6명, 강릉김씨 6명,남양홍씨6명,삼척김씨3명,연일정씨2명등이다. 1719년~1755년까지 36년간 용산서원에 입학한 생도는 총 1 06명인데 이중 남양홍씨가 29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강릉 최씨 22명, 강릉김씨 18명, 삼척김씨 14명, 영일정씨 10명, 전 주최씨 6명, 공주이씨 2명, 강릉박씨 1명, 본관 미상의 김씨 2 명,최씨,이씨가각1명씩이다. 1, 옛날에 성현이 사름을 가르치고 학문을 한 참뜻은 모두 의리를 밝히고 수신(修身)을 하려는 것이며, 다만 글자를 배 워서 기록하고 보는데 쓰고, 사장(詞章) 공부하여 명예와 재 물을 얻으려는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공부를 하고수신(修身)하는방법은대강알아서그것을시행하는것 이 아니라,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분명히 안 연후에 그것을 열 심히 시행해야만 중용(中庸)을 얻어서 옛날 성현들이 교인 (敎人)하는 본의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공부하는 학생들은 열심히연구하고공부하는것을평생의사업으로해야한다. 2. 공부하는 방법은 비록 궁리하고 연구해서 열심히 실행하 는데 있지만 뜻은 공부하는 근본이며, 경(敬)은 공부하는데 있어서 마지막이요 처음이다. 따라서 뜻과 경(敬)의 둘은 궁 리역행(窮理力行)하는 근본으로 해야만 공부를 하는데 두서 (頭緖)가 있어서 공부가 잘 되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하며게을러서는안된다. 3.공부하는사람은우선 배우려고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어 서 입지(立志)와 거경(居敬)을 해야 하는 것이니 궁리역행 (窮理力行) 해야 만 마침내 참된 공부가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비록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실이 없는 것이며 성취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공부 하겠다는진실된마음을가지고열심히공부를해야한다. 4. 독서를 할 때에는 궁리(窮理)를 해서 모든 이치를 알고 힘써서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서하는 용산서당의 모든 학생은 매일같이 빗고 의관을 바르게 한 후 에 각기 독서하는 곳으로 가서 자세를 바르게 끊어 앉아서 책 을 펴고 정신통일을 한 후에 공부를 시작한다.글자 한자와 글 귀 하나라도 정동해야 하며 대강 지나쳐선 안 된다.연구를 반 복하되 쉬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해야 한다. 또한 주자(朱 子)는 입에 올라서 외울 때까지 가르쳐야 하며, 뜻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뜻이 통할 때까지 가르쳐서 스스로가 뜻을 통 할 때가지 되풀이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 하였으니 그렇게 해야하며연후에도계속숙독하는것이독서하는요법이다. 5.독서하는 순서는 먼저읽을책의 순서를 정하는데 따라서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제일먼저소학(小學)부터 시작해서 대 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순서대로 읽고 다 읽으면 다시 처 음부터 되풀이해서 반복해야 한다. 근사록(近思錄), 심경(心 經), 가례(家禮),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성리제설(性理諸說)등도시간이있는대로읽어 야하며 조금이라도 중단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서(史 書)도 읽어서 고금(古今)의 일들을 잘 알아서 식견을 넓혀야 하며 이단잡서류로 부정한 책을 읽고서 잠시라도 그 내용을 떠들어서는 안 된다. 격언(格言)과 같이 좋은 글은 성실한 마 음으로토론하고실천하는데모든정성을다하여야한다. 6. 독서를 해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道)를 배워야 한다. 소 학에서는 사친(事親), 경형(敬兄), 충군(忠君), 제장(悌長), 융사(隆師), 친우(親友)의 도(道)를 배워야하며, 대학에서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 身) 제가(齊家)의 도(道)를 배워야 한다. 논어, 중용, 시전(詩 傳), 서전(書傳), 주역(周易)에서는 우주만물의 이치를 알아 야한다. 입으로는 책을 읽고 마음에는 없으며 마음으로는 알 고 있 으 면 서 실 제 로 행 하 지 않 으 면 책 은 책 대 로 있 고 나 는 나 대로있어책을읽어도아무것도얻지못한다. 7.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 주자(朱子)의 경재잠(敬 齋箴), 진씨무향(陳氏茂鄕)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벽 위에붙여놓고수시로보고외우며열심히실천한다. 8.항상 의관을 반듯이 하고 용색(容色)은 엄숙히 하며 앉을 때에는 무릎을 뻗어서는 안 되며 걸을 때는 신중히 하여야 하 며 항상 구용과 구사를 잊어서는 안 되며, 일동일정(一動一 靜 )을 모 두 예 칙 에 의 해 서 해 야 한 다 .(註-구용과 구사븣7면참조) 9.말하는 것과침묵하는것을반드시조심하고삼가서해야 한다.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한 번의 침묵만 같이 못 할 때가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한 연후에 말을 해야 하며, 고성(高聲) 으로 떠들썩하게 말을 해서 위의(威儀,위엄이 있는 몸가짐이 나 차림새)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며 간략하고 무게 있게 말을 해야 한다.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해서는 안 되며 조정의 시비 (是非)를 말해서도 안 되고,주현관(州縣官)의 장단점을말해 도 안 된다. 재물의 다과(多寡)를 말해서는 안 되며 염빈구부 (厭貧求富,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구하는 것)를 말해서도 안 되며,음설(음란하고 문란한 말),희만(戱慢븡희롱하거나 거만 한말),패사(悖辭븡사리 또는 기준에 어긋나는 말),신괴(神怪 븡황당무계한일)의일(事)을말해서도안된다. 10. 공사(公事)가 아니면 언실(偃室븡사삿일로 上官의 집에 가지 못함을 비유한 말)에 가지 말라고 한 말은 고인(古人)들 이 한 말 이 다 . 지 금 서 당 에 있 는 모 든 사 자 (士 子 )들 은 향 교 나 서당의일과같이부득이한일이아니면절대로관가(官家)의 출입을삼가서자중(自重)의의(義)를잃지않게하라. 11. 거처(居處)에 있어서는 자신이 좋은 곳을 택하지 말아 야하며반드시연장자(年長者)에게좋은곳을양보해야하며 10세이상자가출입할때는반드시기립해야한다. 12. 식사를 할 때에는 반드시 나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하여 질서정연하게 해야 한다. 식사를 맛있는 것만 가려서 먹어서 는안되며너무많이먹어서도안된다. 13. 사람을 접대 할 때는 공손한 자세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접대해야하며문예(文藝)와부귀(富貴),그리고어른인것을 구실로 교만해서는 안 되며 또한 당파가 다른 구실로 소홀이 해서도 안 된다. 해학(諧謔)나 조소(嘲笑)를 하며 생대를 비 방하여화목(和睦)과공경하는것을잃게해서는안된다. 14. 당(堂)에 소속된 모든 학생들은 이미 한곳에서 생활하 고있으니 동거(同居)의 의리(義理)가 있는 것이고또한같이 수업을하니동문(同文)의의리가있는것이다. 따라서 그 교의(交義)와 정분(情分)이 두터운 것이다.그러 므로 동향(同鄕)의 사람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반드시 선도 (善道)를 충고해서 직량다문(直諒多聞븡정직하고 너그러우며 들기를 잘함)하는데 힘쓸 것이며,질병이 있을 때에는 친척이 환란을당한것과같이생각해서서로도와주어야한다. 15. 독서(讀書)할 때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로 토론하 고 이해가 되면 서로 권도(勸導븡타일러서 이끎)해야 한다. 서 책(書冊)과 필연(筆硯), 기안류(幾案類)는 잘 정돈해 놓아야 하며, 글을 지을 때에는 모든 정성을 다 들여서 지어야 하고 글씨를 쓸 때도 정성을 다 들여서 정서(正書)를 써야 하며,조 잡한 초서(草書)는 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창문이나 벽에다 낙서(落書)를해서는안된다. 16.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하루 동안에 해야 할 일은 경서(經 書)를 읽고 잠문(箴文)을 외우며, 의리(義理)를 강론하고 혹 은 글을 짓고 혹은 심신을 항상 반성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인 데 일시라도 방심하여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저녁에도 등불을 밝히고공부하다가밤이깊은후에취침(就寢)해야한다. 17. 서당(書堂)에 있을 때에는 비록 공부를 하더라도 집에 돌아가서는 계속하지 않고 놀게 되면 공부하는 맥이 끊겨서 (십한일폭븡十寒一曝) 마침내 위습(僞習븡거짓으로 익히다.) 이 되고 말 것이니 이점을 깊이 생각해서 귀가해서도 계속 공 부해야한다. 18. 서당에서 선비를 택하여 입학을 허락하는 법은 문벌(門 閥)과 지위(地位)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연세의 장유(長幼) 를 논하지 않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준수하며 배우려고 하는 의욕이있는자를입학시킨다. 19. 서당에 입학한 모든 학생은 반드시 학규를 먼저 읽어야 하며, 이름만 서당학생으로 올려놓고 학생으로서 의무를 다 하 지 않 으 며 경 사 (經 史 ) 를 읽 지 않 고 제 마 음 대 로 행 동 하 는 자는당임(堂任)과제생(諸生)들이동의하여퇴학시킨다. 20.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에서 공부 잘하는 한사람을 택해서 장의(掌議)로 하고 또 나이가 적은 학생 중에서 두 사 람을 택해서 한 사람은 색장(色掌), 한 사람은 유사(有司)로 하고 모든 당중(堂中)의 시비(是非)는 장의와 색장이 담당하 도록 하며, 곡물(穀物)이나 집물(什物) 같은 것은 유사가 담 당하도록 한다. 그리고 서당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고 밖 에 있는 사람으로서 근신(謹愼)하며 근간(根幹)하고 사무를 잘아는사람을택하여별유사(別有司)로정하고서당의유사 와 같이 서당의 곡물이나 집물의 출납과 생도들의 지공(支供, 필요한물품등을줌)에관한것을담당하도록한다. 21. 당중(堂中)에 소속된 하인들도 잘 보살펴서 자기의 자 제와 같이 잘 인도하고 잘 대우 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 이상해서이반(離叛)되는일이없도록한다. 위 학규 21조는 비록 순서가 제대로 안되었고, 사설(辭說) 이 자세하지 못한 점이 있으나 그 대지(大旨)는 옛날 성현이 교인(敎人)하는 유법(遺法)이요 나 개인의 의견이나 사담(私 談)이 아니다.그러므로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 면 서당은 단지 과거(科擧)준비를 하는 곳에 불과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서당을 건립하는 본의가 아니니 모든 학생들 은이점깊이생각하고잘알아서열심히공부하라. 1705년6월 일월성이세필이 용산서당의학도들을 위해서삼가 이 글 을쓴다. △매년 음력 3월 3일 춘향(春享)봉행.△매 삭망(朔望)분 향례(焚香禮) 봉행. △ 청소년을 위한 인성 및 전통예절교육 시행△서예교실운영△인문학강좌및유교아카데미개설 △학규21조현판-강원도유형문화재제78호 뱚이세필 선생이 친필로 쓴 피나무목판(가로156㎝ 세로 48 ㎝)에음각으로새긴것으로써서원연구에귀중한자료임. △ 주요 필사본 전적류 8점-강원도 주요문화재자료 제140 호 지 정 용산서원은 조선후기 문신인 구천(龜川) 이세필(李世弼)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구천 이세필은 서기 1642년(인조20) 壬午 11월 1일 출생하 여 1718년(숙종44) 戊 戌 12월 6일에 향년 77 세의일기로타개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 (李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이시술(李時 術)의 아들이다. 어려 서부터 재질이 뛰어났 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 시열(宋時烈)이 삭직 당하자, 송시열을 적극 옹호하였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하여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적소에 5년 동안이 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븮퇴계집븯을 읽고 느끼 는바가있었다고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 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듬 해 동 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 다가진위령을지내고삭녕군수로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 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 다.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개의치 않고 날마다 븮대학븯·븮중용 븯을외우며‘격물궁리(格物窮理)’공부에전심하였다. 1694년갑술옥사가일어나자다시김제군수가되고,사복시 정·장악원정을 지냈다.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제수 받 았으나모두나아가지않았다.1717년상신 이이명(李 視命)이 독대(獨對)를전횡하자상소해그잘못을극론하였다. 고향에돌아온뒤부터는성리학에전심했는데,그중에서도 븮대학븯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븮악원고사븯(樂院故事)1책이 있는데,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설명하고,악장(樂章)에관한여러사람의논의 를수집해엮은것이다.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 (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 정부좌찬성이 내려졌고, 1739년(영조15) 선생 서거 20년 후 왕은 왕조례(王朝禮)를 저서한 선생을 크게 칭찬하여 영의정 에추증하고,시호는문경(文敬)이다. 전남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전북 김제의 용암서원 (龍巖書院),전북익산의학봉서원(鶴峯書院)에 배향되었다. 용산서원은 매년 청소년을 위한 인성과 예정교육 프로그램 을 준비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호평을 받는다. 이를 위해 청소 년들에게 의관(衣冠)을 갖추도록 체형별로 구입하여 행사를 치른다. 이는 옷이 크거나 적으면 옷맵시에 신경 쓰면서 집중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박영길 원장의 철학이다.박영길 원 장을 비롯한 박하용 의례부장, 김운기 재무부장, 김원용 교화 부장, 김상철 총무부장은 청소년들의 인성함양에 심혈을 기 울인다. 지난 2019년부터 연 2회에 걸쳐 시행하고 있는 ‘감성 아뜰 리에, 용산서원’은 2021년에도 계속된다. 용산서원과 동해시 문화유산을 배경으로‘시작이반이다!’,‘문화유산서포터즈는 나야나!’,‘서당개 풍월을 읊다!’등의 세부 프로그램으로진행 됐다. ▲‘시작이반이다!’ 는 문화유산에 대한 이론 교육으로 문화 유산에 대한 상식 관련 강의에 덧붙여 서포터즈의 활동영역, 행동강령, 실천덕목 등에 대해서 배워보는 시간을 가지며 적 극적으로 문화유산을 홍보하기에 앞서 기반을 다지는 시간이 었다. ▲‘문화유산 서포터즈는 나야 나!’ 는 본격적인 문화유산 탐 방에 앞서 스스로 문화유산 홍보물품을 만들어보게 해 앞으 로 진행될 탐방에 대한 몰입 감으로 유익함과 재미를 극대화 시켰다. ‘서당개 풍월을 읊다!’는 이론교육과 직접 제작한 홍 보물품을바탕으로동해시의문화유산인‘용산서원’,‘동해구 상수시설(등록문화재 제142호)’, ‘동해 구 삼척개발 사택과 합숙소(등록문화재 제456호)’ 를 탐방하며 문화유산 정화활 동과더불어홍보영상및사진촬영등진행했다. ▲‘서당개풍월을읊다!’ 는 탐방과 더불어 진행한 정화활동 과 문화유산 해설영상 및 사진을 편집해 유튜브 등에 게시하 여동해시의문화유산을알리는홍보활동으로진행했다. 한편,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참가자들은 “문화유산에서 지 금껏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배울 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평소 경건하고 엄숙하게만 느껴졌던 용산서원과 동해시의 문화유산을 꿈, 희망 그리고 미래가 펼쳐지는 활기찬 공간으로의 인식하게 되었다”고 전했 다. 이처럼 지역의 향토문화와 접목시킨 서원의 활용방안은 지역주민은 물론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에서 많은 공감 을 이끌어내고 있어 본보기가 되고 있 기도해주목할만하다. 뱚서원탐방 강원동해용산서원(龍山書院) <강원도동해시쇄운동202-1번지> 용산서원전경-①사당(용산사)②서재③동재(嚴敬齋)④화장실⑤외삼문⑥강당 조선 서원의시초는 중종 37년(1542),합천 태생인 신재 주세붕 (愼齋 周世鵬)이 풍기(豊基):경북 영주군)군수로 있을 때,일찍 이그고을출신인안향(安珦,처음이름은裕)을모시는사당을 인근의순흥(順興)에 짓고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칭한 것이조선서원의시초였다.이후전국적으로우후죽순처럼서 원은 늘어났고,급기야 서원의본래기능인 강학의공간은 사라 지고종중의탈세또는권위의상징으로변해가면서고종때대 원군에의해훼철당하기도했다.그리고근세의서원은제사의 공간으로만활용되면서문은굳게닫혀져있어보는이로하여 금 민망 함 을 감 추 지 못 한 다 . 강원 동해의 용산서원은 숙종31년(1705) 봄에 삼석부사 이세 필(李世弼)의교육의지를 지역주민들이 호응하면서 용산학당 (龍山學堂)을 세워 인재를 양성한 이후 최근까지 인재양성의 요람으로자리를굳건히한다. 주기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지역의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인성교육과 선비체험,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 한 한 참가자들은 “문화유산에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색다 른 배울 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만족 해하고,학규21조현판이강원도유형문화재제78호로지정관 리되고있어‘학규역문’을함께소개해본다. 뱚서원의창건 뱚용산서원의생도(生徒) 뱚용산서원학규(學規)역문(譯文) 뱚서원의주요행사(行事) 사당용산사전경 뱚지정문화재 뱚배향인물 용산사 사당 내부, 이세필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있다. 뱚맺은말 지난 2019년 ‘감성아틀리에, 용산서원’ 행사에 앞서 박영길 원장 서원을 안내하고있다. 박영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