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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 은거 기념비 김구(1876~1949(선생은 일제 침략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고 해방후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한 우리민족의 등불이요, 선각자이시다. 선생께서는 1895년 만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을미사변으로 국모이신 명성황후께서 비운에 돌아가시자 이듬해인 1896년 귀국 길에 일본인 첩자를 살해하고 수감 중 탈옥하여 삼남(三南)일대를 돌며 피신생활을 하실때에 1898년(22세) 이곳 달이실마을 성태영(成泰英)의 집에 한 달간 은거했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목사를 지냈으므로 성원주탹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 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고 적고 있다. 천곡은 부항천변에 위치한 달이실 마을 즉 월곡의 또 다른 옛 이름이며 당시 위기에 처한 선생에게 많은 도움을 주며 강한 인상을 남겨 백범일지에까지 기록되었던 성태영의 이후 행적은 찾을 길이 없다. 김구선생께서 한달 간 머물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청운의 꿈을 키우셨던 성태영의 대저택(부항면 월곡리 113번지)은 사라졌지만 선생의 웅혼한 기상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우리 마을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