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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8월31일 수요일 7 (제188호) 기 획 ■태인파(泰仁派) 장자 휘 번(蕃)은 음(蔭)으로 봉사(奉事)인데 문학과 행의 가 돈독하였기 때문이다. 아들 정근(禎根)은 사한부감찰, 손 자 원흥(元興) 음(蔭) 종묘서 직장, 무흥(茂興)은 문과 정자 (正字)인데 기묘사화에 연좌된 좌찬성 민제인의 억울함을 지 적하여함께대흥에유배되었다. 원흥의 아들 우(瑀)는 음(蔭)으로 예빈시참봉이고 그의 장 자 지 은 (之 誾 ) 의 호 는 월 와 ( 月 窩 ), 글 학 업 을 좋 아 했 고 마 음 을경계하는잠1편을지어항상경계했다.효행으로천거되어 건원릉 참봉이고, 그의 아들 개(凱)는 임진왜란에 숙질과 함 께 창의하여 적 수백급을 사살하는 등 공이 있어 사옹원판관 에 올랐으며, 이후 조정에서 건의하여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에증직되고그사적에초계읍지에전해진다.둘째아들 덕순(德純)은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군자감첨정에 오르고 고종 신사(辛巳,1881)에 호조참판의증직이내려졌다. 그의 아들 준개(俊凱)는 지기(志氣)가 뛰어나 등과하여 훈련 원봉사에 올라 사후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읍지에 전해진 다. 정자공(휘 무흥)의 아들 민(珉)은 증 병조참지이다.임진왜 란에 송암 김면과 더불어 창의하였으며,그 사적이 청계지(淸 溪誌)에전해지고호는운암(雲庵)이다. 민의 5대손 세장(世章)은 영조 무신란에 창의하여 분무원 종공신에오르고오위도총부부총관에증직되었다. 생원공의 차남 훤(萱)은 진사(進仕)이고, 그의 아들 응용 (應龍), 응인(應麟), 응구(應龜) 삼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용 구의임란창의사실이송암김면의용사일록에전해진다. 생원공의 셋째 휘 진( 풂)은문장이 뛰어나 학행으로 통정대 부 장례원판결사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원량(元亮), 인량(寅 亮)형제를두었는데장자원량은진사시에올랐다. 진사공(휘 원량)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화·재(호 雲岩) ·환(호梅村)이다. 생원공의 차자 인량의 호는 만수당(萬樹堂)으로 임진왜란 에 망우당 곽재우, 송암 김면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란공신 이다. 적을 참획한 것이 비록 많았지만 공이 공로를 자기의 소유 로 하지 않았다.난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몸을 삼가고 널 리 배우며 언어로 구사하여 문장을 이루었다. 공에 대한 기록 으로 원종공신록(原從功臣錄)과 읍지(邑誌), 그리고 여지승 람(輿誌勝覽)에전해진다. 당시 영남 30주의 177유생들이 만수당을 褒彰(포창)하여 주기를 請(청)하는 狀(상)을 지어 巡相(순상)에게 올렸는데 狀(상)에 이르기를 경술예학(經術禮學)이 유림(儒林) 사종 (師宗)이 되고 임진란에 종사(宗社)가 위태로움이 조모(朝 暮))에 임박했을 때 영남70주에서 의성(義聲)이 요요(寥寥) 한데 특히 포의(布衣)로서 분기(奮起)하여 가동(家 뚝)을 소 집하고 郭忘憂堂(곽망우당)趙大笑軒(조대소헌)제공(諸公) 을 더불어 동시창의(同時倡義)하여 일심서사(一心誓死)로 방략(方略)을찬화(贊畵))하여최선을다하였다고하였다.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노(櫓)의 호는 경암(敬菴)으로 아버지 만수당공의 명으로 어머니를 둔철산으로 모셔 봉양하 였고, 차남 미(楣)의 호는 도암(道菴)으로 학행이 뛰어나고, 바르고 점잖은 행실은 일세의 사표가 되어 읍지에 실려 전해 지고, 도암처사라 불려 졌으니 모두 세덕의 유풍이 아닌가 싶 다. 10대손 태곤(泰坤)의 字는 이조(而祖) 소당(笑堂)은 호 (號)이다.한학자인 아버지 눌헌공(휘 희정)의 엄격한 훈육에 서 자라 성품이 강직하고 검소하며 정의로웠다.경남 의령,산 청 단성에서, 만년에는 진태 마을의 신계서원에서 후학을 가 르쳤는데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이 산청 향내에서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일생동안 많은 문장을 남겨 후 학들이 지난 1989년 문집을 발간하였는데 총 문장 편수는 15 개 분야 325편의 문장이 등재되었고 이중에는 밀성재 중수기 가있다.특히보성계를결성하여선생의학덕을기리고있다. △습독공파(習讀휘유림) 습독공의 휘는 유림(儒林) 두촌공(휘 승문)의 셋째이고 관 (官)은 습독(習讀)으로 슬하에 영(寧)·안(安)·빈(賓)·온 (蘊)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영(寧)의 증손 예환(禮桓) 명종 조에가선대부동지의금부사에증직되었다. 습독공의 삼남 빈(賓)의 손자 희(希)는 훈련원 첨정으로 임 진왜란에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서 노량진 전투에서 순절, 선 무공신으로 그 기록이 충무전(忠武傳)에 전해진다. 넷째 온 (蘊)은동중추이다. 태인파는 휘 희문(熙文)으로부터 세계를 이룬다. 자(字)는 이지(利之) 호는 송재(松齋),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 官)이 되고 외직으로 나아가 태인현감으로 임지에서 순직하 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청백선정비를 세웠고 그 일이 읍지에 전해진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자 세림(世林)은 의령현감, 언림은판사,계림은통찬을지냈다. △현감공파(縣監휘世林) 현감공은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난(蘭)은 주부(主簿)를 지 냈고, 다음으로 전(筌), 다음 훈(薰) 참봉, 봉( )은 주부를 지냈다. 다음 규(葵)는 휘를 영(英)으로 고쳤으며 성균관 진 사이다. 참봉공(휘 훈)의 차남 사남(師南)의 호는 염재, 품성 이 온후하고 덕이 있어 많은 사람이 추종하였다. 병자호란에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은거하면서 세칭 숭정처사라한다. 성균진사(휘 葵)공은 증손 승선의 연보에 의하면 9세에 병 화를 만나 문적 수집하지 못하고 조정암 피화시 살림을 꾸려 밀양 가곡으로 세거지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 유일은 통례원 통례, 손자 희양(希良)은 참봉으로 장예원판 결사에 증직되었고, 부인 여흥민씨는 탁월한 총명과 여자가 지켜야할 모든 분야에 막힘이 없어 한가문의 꽃으로 시댁 어 른들에게 효행이 타의 모범이 되었고 행실은 전체 문중의 귀 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들이 물밀듯 닥 쳐 오 자 다 른 두 여 인 과 함 께 집 뒤 북 산 바 위 굴 에 숨 었 으 나 왜 적이 절벽을 타고 다가오자 화를 피해 바위 절벽에 올라 투신 자살 하여 정조를 지켰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을 수령이 장문(狀聞)을 올려 나라에서 정표(旌表)가 내려져 북산아래 에 정려각을 세웠졌다. 숙부인 여흥민씨의 무덤은 낙화암(落 花岩)밑에 있고,부인이 몸을 던진 바위를 지금도 낙화암이라 부르고있다 증손 종민(宗民)은 임진왜란에 망우당 막하(幕下)에서 화 왕산전투에 제(諸) 의사들과 동맹 수성하고 용사록에 실리고 영산 호국공원에 배향되고 김종직 선생을 배향한 예림서원 중창에 공헌했다. 현손 선승(善承)은 1635년 무과에 올라 한 성부우윤을지냈다. △판사공파(判事,휘彦林) 태인현감의 차남으로 통훈대부 적량만호 훈련원 판사이다. 재주와 기상이 빼어났으며 지략을 갖추었다. 아들 운(芸)은 충청도병마절도사를지냈다.호는 수성재(修誠齋)퇴계 선생 과 동서(同壻)간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퇴계선생과 교 유하고 강학계를 맺어 교유하였으며, 퇴계선생은 가례동천 (嘉禮洞天)을 써주었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아들삼형제 를 두었는데 사충(士忠)·사침(士 )·사신(士信)이다. 장남 사충은음(蔭)으로통정이고,아들서린(瑞麟)은현감이고서 구(瑞龜)의 호(號)는 악견(岳堅)으로 효행과 문학이 뛰어나 초수는 김해의 창원 교수(昌原敎授)에 임명했는데, 문학(文 學)이 일찍이 뜻과 행실이 뜻을 가다듬어 임갈천(林葛川, 이 현일)의 도구(陶丘)에게서 수업을 받았다.친상(親喪) 애경 (哀敬)에 지극히 친애(親愛) 하시고 고례(古禮)를 준행하여 효현세자(孝顯世子)에 이르도록 하고, 승중(承重) 하여 연이 어 상(喪)을 당하여 사상(四喪)에 거상(居喪) 하고 임란(壬 亂)의 임진왜란에는 망우당과 함께 창의하여 의(義)를 취하 였는데, 일이 국승(國勝)과 합천읍지(誌)에 기재되었고 븮악 견시집븯이있다. 그의 아들 현의 호는 팔우당(八友堂), 학문이 뛰어나 세인 들의 추앙을 받았다. 천자고결하고 재기가 첨예했고 효우가 뛰어나 학문이 탁연하여 알려졌다. 문간공 정동계 문인으로 한사 강대수(15911658)등 당대의 문인들과 더불어 깊은 우정 을 쌓았다.그러나 평일의 문자를 산실하여 남은 것이 없어 다 만책한권만전해진다. 팔우당공의 아들 이욱(而郁)은 통정,이도(而睹)의 호는 오 음재(五音齋)인데부호군이다.문장이뛰어났고,효행이지극 하여아버지의대를이었다. 통정 휘 사충의 삼남 서붕(瑞鵬)호는 은계(隱溪)은 일찍이 학문을 닦아 중형 악견과 임갈천 이도에게 수학하여 합천에 서 창 원 평 성 으 로 이 거 후 조 그 만 집 을 짓 고 원 근 학 자 들 을 초 빙하여 공부를 더해 성리학을 완성하여 세칭 은계선생이라 부른다. 수성재공의 차남 사침은 내금위이고, 셋째 사신은 적 량만호에 보임되고 곧 훈련원판사로 옮겼다. 아들 서휘(瑞 輝) 초명은 대수(大受), 자는 자겸(子謙), 호는 퇴휴헌(退休 軒)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뛰어났고 지략이 있 었다. 음보(蔭補)로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고, 얼마 뒤 평안도(平安道)병영의우후로옮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벼슬에서 물러나 모친을 봉양하 며 의령(宜寧)에 살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가서 임금을 배알 할방법이없음을애통해하였고마침내의령의향당(鄕堂)에 들어가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정 진(鼎津)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을 죽이고 세 자루의 칼을 빼앗았다. 왜적들이 잠깐 물러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郭再祐), 송암(松菴)븡김면(金沔)과 함께 가례동(嘉禮洞)의 누각에올라피를나누어마시고동맹을맺었다.또고금정(鼓 琴亭)에 모여 시를 짓고 맹세하기를, 븮이 마음을 어찌 속일 수 있으리오(心君何可欺, 심군하가기)/ 저 하늘에 태양이 비추 고 있거늘 (白日照中天, 백일조중천)븯하였다. 논공행상(論功 行賞)이 있던 날에는 겸손히 물러나 공적을 차지하지 않고, 장남을 맹부(盟府, 忠勳府)에 올라가게 하였다. 광해군(光海 君)시절한쪽당파의사람들만등용되자벼슬에나갈뜻이없 어져 거처에 ‘퇴휴(退休)’라는 편액을 내걸고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퇴휴헌공의 부 인 전의이씨 묘소 이장때 발굴한 유물 견직물 1점, 명정 1점, 현훈 8점, 장옥 3점, 속바지 2점, 단속곳 1점을 2005년 국립민 속박물관에기증당시의의복연구에보탬이되었다. 아들 6형제(근·유·진·경·표·환)를 두면서 크게 번성한다. 장자 근(瑾)은 음(蔭) 별제(別提), 둘째 유는 음(蔭) 훈련원 첨정, 셋째 진은 선교랑, 넷째 경은 병절교위 부사과, 다섯째 표는직장,여섯째환은병절교위이다. △통찬공파(通贊,휘係林) 태인현감 휘 희문(熙文)의 셋째이고 官은 통찬(通贊)이다. 아들 만(蔓)은 장사랑 덕릉참봉이고 호는 연죽당(淵竹堂)이 다. 다음은 순(荀)으로 호는 가산(佳山)이다. 참봉공(휘 만) 의 손자 진은 어모장군으로 손자 응두는 병절교위 중부주부 이다. 졸당선생은 밀양 삽포에서 태어났다.악견산의 줄기인 경남 합천군 대병면 송지촌으로 이거하여 왔는데 이는 효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가 권귀를 탄핵하다 유배된 후 풀려나 조용히 살면서 학문을 강습하여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기 위 함이다. 이에 후손들은 경남 합천군 대병면을 중심으로 임진 왜란을 전후하여 경남 진주, 의령, 밀양, 산청, 창원, 전북 장 수,고창등지로이거하면서집성촌을이루고있다. 종가인 두촌공의 종가인 금성재공 휘 분의 후예가 거창 남 하에 세거지를 정한 것은 증손 황암공(휘 창룡)이 동계 정온, 노파 이흘, 한사 강대수 등과 도의지교로 교유하면서 비롯되 었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노파 이흘과 한사 강대수 선생이 합 천 출신이고 동계 정온은 거창군 위천면서에 태어났다. 이에 황암공의 손자 가산공(佳山公 휘 태징)까지의 묘소가 합천에 있고 이후 황암공의 손자 휘 봉령은 거창에 있는데 아들 문우 의 부인이 위천에 집성촌을 이룬 거창신씨인 것이다. 금성재 공(사복정,휘 분)의 장자 휘 인수의 차남 천기의 후예는 합천 봉산 대병으로 찰방공(휘 사림)의 후손들은 주로 합천, 의령 지역에분포되어있다. 생원공 휘 서림의 후예는 장자인 봉사공 휘 번의 후예는 합 천 쌍책, 삼가, 고령 쌍림 창녕 영산, 밀양 무안, 의령 봉수, 거 창 등에 세거하고 차남 진사공 휘 훤의 후예는 합천 삼가지역, 증손문도(文道)는삼가에서칠원으로이거해갔다.생원공의 셋째 판결사공은 단성현(현 산청군 단성면, 신안면)으로 이 거하면서 장자 원량의 후손은 산청, 의령, 함양 등, 차남 만수 당공(휘인량)의후예는산청군신안면진태마을에큰집성촌 을이루고있다. 두촌공의 삼남 습독공(휘 유림)의 후예는 의령 정곡, 남해 창선,거제장승포등이다. 태인공(휘 희문)의 후예는 현감공(휘 세림)의 아들 주부공 (휘 란)의 차남 휘 사운(통덕랑)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청도 매전면으로 이거하면서 매전 금천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현 감공의 차남 전(筌)의 후예는 경북 김천, 삼남 현감공 훈(薰) 은 전북 태인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향리로 돌아오지 않고 태 인(현정읍)에그대로안주하면서정읍고창지역에세거한다. 판사공 언림의 후예는 진주와 합천지역에 세거한다.판사공 의 5대손 오음재공(又 梧溪, 휘 이도)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부모님을모시고합천가수로부터진양(현진주)동 쪽 오음산에 피신하여 산 아래에 보를 만들어 채전을 일구어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향리에서는 지금도 은신하였던 오 음산을박도령산이라한다. 병사공 휘 운(판사공의 장남)의 삼남 사신은 경남 의령군 가례리에 큰 집성촌을 이룬다. 태인공의 삼남 통찬공 휘 계림 의 아들 만(蔓)은 의령군 지정면 성산 연동으로 이거해 의령 지역에 산재해 있으나 후예들은 거창, 합천 용주, 함안가야, 창녕등에산재한다. 졸당공은 신심(愼心) 신관(愼官)편을 저술하여 말하되 벼 슬에 오르기 전에는 비록 걱정은 하되 마음은 반드시 편안하 고 이미 벼슬한자는 비록 기뻐하나 마음은 반드시 위태롭게 생각할 것이니 관리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 마음 을 청렴하게하고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반드시 천성을 상 실한다 하였다. 즉 공직자가 지켜야할 청렴을 강조해 후예들 은 세덕(世德)을 잊지 않는다.이에 후손들은 박동규,박철언, 박판제 장관 등의 고위공직자를 위시하여 박인제 인권변호사 를 비롯한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특히 법조인이 유독 많다. 그리고 교육계와 행정공무원 그리고 최근에는 합천 거창 진 주지역전교를많이배출되어예학의가문임을보여준다. 졸당공의 후예는 두촌·태인 양 문중에서 육림으로 이어지 면서 크게 번성했다. 임진왜란에는 분연이 일어났고, 예를 모 르는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를 추종하는 숭정처사의 길을 걷 는 등 세족충성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금번 약사를 정리하 면서 지면상 다 소개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훗날 체계적 으로 다시 정리할 인재에게 후일의 몫으로 남기면서 이만 줄 인다. 뱚▶6면에서이어짐 경남산청군신안면진태마을전경,한때100여호가넘는큰집성촌이다. 집성촌 맺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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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졸당공파 세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