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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8월31일 수요일 6 (제188호) 기 획 졸당공의 휘는 총(聰) 字는 명옹(暝翁) 호는 졸당(拙堂)이 라하니주염계(周濂溪)의부졸(賦拙)의뜻을취함이고,후손 들은공의호를인용하여졸당공파라세계를잇고있다. 공은 어려서 재주가 남달리 총명하였다. 장성하여 세분 형 과 같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크게 사문(師 門)의 칭찬을 받으니 당시 사봉(四鳳) 칭호가 있었다. 벗으로 는 모두 당세의 현인인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독곡 성석린, 춘정 변계량, 춘정 변중량 등과 더불어 정의가 돈독하였으며 서로 도의를 논하고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야은이 일찍 공을 일러 공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 아니라 하였고,춘당이 시를주워말하되충열(忠烈)의송계댁에연원을이은사형제 라 하였고,춘정이 말하기를 말 더듬을 웃지 말라 한나라 주창 (周昌)이 대의를 잡았다하니 그 추론을 받은 것이 이와 같더 라 하였다. 공의 행실이 심비(深秘) 되고 더욱 효가 돈독하여 부모를 섬김이 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을 밝게 하여 부 모의 뜻을 기쁘게 하고 거상을 당하여 슬러하고 수척함이 예 절에 넘치니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그때에 춘당이 이조전위에 있을 때 공의 효성을 조정에 천거하여 정랑 벼슬 에 올랐다.그 후에 곧은 말을 진언하니 권력층에 미움을 받아 수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많은 고생을 하면서 시를 읊으니 꿈 가운데 임금님이 번연하게 다다랐는데 꿈을 깨고 보니 강 가에 누워있음을 알았도다. 신하가 되어 벼슬이 높고 낮음을 말하지 말라 천성이 누가 임 생각하는 마음 없으랴 하였고,또 한 신심(愼心)신관(愼官)편을 저술하여 말하되 벼슬에 오르 기 전에는 비록 걱정은 하되 마음은 반드시 편안하고 이미 벼 슬한자는 비록 기뻐하나 마음은 반드시 위태롭게 생각할 것 이니 관리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 마음을 청렴하 게하고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반드시 천성을 상실한다 하 였다. 공이 본래 경륜(經綸)이 있으니 곧은 말이 시행이 어려 운 것을 알고 향리에 돌아가 조용히 살면서 학문을 강습하여 늙도록게을리하지않으니탁연한일세의종사이다. 주(註)-주염계(周濂溪):자는무숙(茂叔).시호는원공(元公).주염계(周 濂溪)라고도한다.중국의사상가운데거의1,000년동안국가의이념으로 자리잡았던 이학(理學)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또한 부분적으로 신도가(新 道家)를기초로하여유교를다시체계화했다 졸당공(휘 총)은 신라 경명왕의 적장자 밀성대군(휘 언침) 의 후예이다. 중조는 고려태사 휘 언부(彦孚)이고 고조 휘 대 화(大和)는 이부상서이고, 증조 휘 간(幹)은 이상(二相, 우찬 성)으로 시호는 양효(良孝), 조부 휘 영균(永均)은 판도판서 요 은산부원군에 추봉하고 시호는 문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익(翊)으로송은 선생이다.이태조의역성혁명으로 고려가 기 울자 고려의 절신으로 불사이군의 두문동 현인이다. 조선 조 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사후에 좌의 정에증직하였다.어머니는성산배씨인데재상인현보의따님 이요 계비는 창원박씨인데 랑장 충민의 따님이요 또 고흥유 씨는판결사인인기의따님이다.공은공민왕계사(癸巳,1353 년) 6월 24일에 나시고 세종21년 기미(己未, 1439년)2월 2일 에 졸하니 향수 87세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첫 번째 부 인은 동래정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강양이씨인데 태자 첨사 공인 실의 따님이요 강양군 약의 손녀이다. 슬하에 승문(承 文)·희문(熙文)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형제를 중심으로 두촌 (杜村)·태인(泰仁)으로 파(派)를 달리하여 세계를 이루고 이 들 형제에서 태어난 아들 림(林)자 항열의 6형제 즉 육림(六 林)으로구분된다. 두촌파는 졸당공의 장자인 휘 승문(承文)을 파조로 한다. 두촌공은 졸당공의 장자로 어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장과 덕행이뛰어나유림에명망이높아순릉참봉(제9대성종의비 공혜왕후 한 씨의 능)에 이어 병조정랑이 더해지고 3자급을 더 올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니 그 명망이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임천이씨와의 사이에 사림(士林)·서림(書 林)·유림(儒林)을 낳았는데 모두 가학을 이었다. 장자 사림 (士林)은 찰방(察訪)으로 세종조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차자 서림(書林) 생원시에 올라 군자감판관 셋째 유림(儒林)은 습 독(習讀)이다. △찰방파(察訪.휘사림) 찰방공 휘 사림(士林)은 의인 경주최씨와의 사이에 아들 분 (賁)을 두었는데 충무위부사과(종6품)와 사복정(司僕正, 정 삼품 당하)이고 인수(仁粹), 인성(仁誠), 인원(仁元)을 두면 서 크게 번성하였다.장자 인수(仁粹)는 관(官)은 부장(部將) 이고 천성(天性)이 간항(簡亢)하여 불의를 보지 못해 낙향하 여 친족과 향당의 자녀들을 지도하면서 세상을 마치니 향당 에서칭송이그치지않았다.아들4형제를두었는데모두충의 에 불타 임진왜란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공명은 멀리했다. 장 자 천정(天禎)은 선교랑 군자감판관으로 재주가 민첩하고 학 문은 12세계(玉溪) 노진(盧 嶸, 1518∼1578)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하여 크게 학문을 넓혀 그의 아들 창룡(昌龍)의 호는 황 암(篁庵)으로 특이한 재주가 있어 4세에 중부(仲父)께서 글 귀하나를 지었는데 운비만리운유익(雲飛萬里雲有翼, 구름이 만리를 날아가니 날개가 있고) 풍절만목운유검(風切萬木雲 有劍,바람이 나무를 자르니 바람에도 칼이 있어)이라며 답하 니 세상사람들이 놀라지 않은이 없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 고 어른과 같이 예를 다하였고 성장하여서는 문장이 더 뛰어 나 당시의 거유 동계 정온, 노파 이흘, 한사 강대수 등과 도의 지교하였고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부장공(휘 인수)의 차자 천우(天祐)의 호는 팔정(八亭)으 로 만력병자(丙子,1576)에 진사에 올랐다.천성(天性)이 지극 한 효자(至孝)로 어머니의 병환에 배변을 맛보았고, 위급함 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였으나 끝내 연명치 못하고 돌아가 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하는데 그 정성이 호랑이를 감복시켜 호랑이는 매일같이 효자를 지키다 여막 앞에서 죽으니 효성 에 감동하지 않은 이 없었다. 임진왜란에 백의로 창의하여 망 우당 곽재우 대소헌 조헌과 함께 적을 토벌하고 악견산성에 서 잠시 쉴 때 대소헌이 글을 지어주었는데 당동산 밖에서 산 것도 비록 즐겁지만 순원성 가운데서 죽는 것도 아깝지 않다 라며 공의 명예로운 삶을 극찬하였으며, 원공공훈에 기록이 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창도(昌道) 또한 백사 이항복, 월사 이정구, 한음 이덕형과 더불어 난리가 평정된 후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통 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손자 화( )는 재능이 남달라 노파 이 흘선생문하에서수학하여학행이뛰어났다. 부장공(휘 인수)의 셋째 천기(天祺)는 진사에 오르고 천거 로 등과(登科)하여 의령, 강서, 낙안, 벽동, 지교동 수군절도 사(水使)를지냈다. 부장공의 넷째 천생(天生)은 임란에 중형(仲兄) 천우(天 祐)등과함께창의하여가선대부이다. 사복정공(휘 분)의 차자 인성(仁誠)은 집의(執義)이다. 문 의공 김식(金湜, 1482년 ~ 1520년 조선 중기의 문신)의 문인 으로 스승 김식이 조광조 등과 함께 성리학에 입각한 도의정 치를 추구하다가 훈구파 및 온건 사림파의 반격에 희생되어 절도안치의 처벌이 내려지는 등 같은 문인으로 사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기묘명현록 및 동국문헌록에 전해진다. 아들 셋중 천식은 영릉참봉, 천유는 음(蔭) 참봉, 천록은무과에올라주부이다. 주부공의 아들 상(相)은 가선대부형조참판이다. 그러나 집 의공(휘 인성)이 기묘사화로 인해 두촌공의 후예들은 세거지 를 의령 정곡면 죽전리(화곡)으로 옮겨 살던 중 1728년(영조 4)무신란(이인좌의난)발발함에휘 인성의 7세손인 중로(운 죽)은 의령부의 쉬장으로 성부지키게 되어 동생 취로(은월) 와 사촌인 동로(설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한후 귀향하여군자지도하며여생을보냈다. 사후에 세분 모두 공조판서에 추증되어 화산재를 중건하여 봉사하고있다. 사복정공의 셋째 휘 인원(仁元)은 통정(通政)으로 아들 4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은 천해(天 훼)는 기개와 충절이 남달라 종형들과 함께 창의하여 임진왜란의 적 수 천명을 사살하니 원종훈에 오르고 군자감 주부이다. 그 사적은 봉성여지 등에 전해진다.차남천담(天潭)또한 임란에 창의하여 원종공신으 로 통정대부동충추부사이다. 셋째 천홍(天泓)은 통정(通政), 넷째 천택(天澤)의 호는 송강(松崗)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 이다. 청백한 치적이 돋보이고 어질고 의로운 도리를 스스로 실천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고 지극한 효도로 칭송이 자자 했다. 아들 창생(昌生)은 통정대부이고 학행이 있었고, 손자 욱(稶, 호 浦岩)은 학문이 깊고 정밀하였으며 아버지 상에 3 년에 걸쳐 여묘 하였다. 둘째 손자 래는 호는 벽암(碧岩)으로 통덕랑군기시별좌이다.품성이단단하고여러재능이이있었 다. 특히 경전을 좋아해 학문을 이루었고, 그의 8대손 휘 희선 (熙善)의 호는 율정(栗亭)으로 타고난 본성이 온화하고 공손 하여 부귀를 탐하지 않고 굶주리고 헐벗은 주민을 구휼하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짓고 스승을 맞아 子姪과 고을 사람들을 대하고 종족들을 대함에 신의가 더해 져후학들이추모계를만들어집을지어농산재(農山齋)라하 고 마을입구에 합천군 대병면 율정마을 입구에 송덕비를 세 워 세세(世世)토록 기리고 있어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 家必有餘慶)의교훈을남겼다. 셋째 손자 목(穆)의 호는 금암(錦岩)으로 음(蔭)으로 통정 (通政)이다. 통정공(휘인원)의다섯째천흡(天洽)은장사랑훈도이다. △생원공파(生員,휘서림) 생원공의 휘는 서림(書林)으로 성균행원이고 군자감 판관 이다.슬하에번(蕃)·훤(萱)·진( 풂)삼형제를두었다. 뱚파조별약사 밀성박씨졸당공파(拙堂公派) 밀성박씨졸당공파는신라시조왕(휘혁거세)의후 예중백파(伯派),즉장손가인밀성대군후예이고 그중에서도 맏집인 태사공(휘 언부) 후 은산부원 군의장자이면서두문동현인(賢人)으로불사이군 의절의를 지킨 송은공(휘 익)의네 아들 중 막내아 들인 휘 총(聰)으로부터 문호가 열린다.이후 졸당 선생의 아들 형제(승문, 희문) 장남인 휘 승문(承 文,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과 차남 휘 희문(熙文, 태인현감)에서 두촌파와 현감파로 나누어지고 이 어이들형제에서태어난아들6형제로인해각지 파가형성된다. 그리고권귀(權貴)를탄핵하다유배되어돌아와서 세 사 (世 事 )에 뜻 이 없 어 산 수 간 (山 水 間 )에 노 닐다 가만년에삼가(嘉樹,아름다운나무)고을대평송 지촌(현합천군대병면성리1구)에이거한이후삼 산(허굴산, 악견산, 금성산)이 수려하고 동부(洞 府,신선이 사는 곳)가 평평하게 퍼져 아늑하여자 손에게전할만한곳이라하여졸당선생의두아들 (승문,희문)과그후손들의집성촌이되었으며,또 다시 이들 후손들은 경남 진주, 의령, 밀양, 거창, 남해 전북 장수, 정읍 등으로 세거지를 옮겨 살고 있어소개해본다. 신계서원,경남산청군신안면진태마을 졸당공과형아당공을배향하고있다. 봉양재 ,졸당공재사이다.(용주면봉기리) 봉산재,두촌공재사이다.(합천군대병면성리) 산천재 ,태인공재사이다,대병면성리) 졸당공파연원(淵源) 졸당공(휘총)묘소-합천면용주면봉기리 졸당공파세계(世系) ■두촌파(杜村派) 뱚▶7면으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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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진사공(휘 원량)의 둘째아드님의 휘는 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