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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동학농민혁명과 우금티전투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저항하여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고부봉기). 정부의 약속을 믿고 해산하였으나 이후 동학교도를 탄압하자 3월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다(무장봉기, 제차 동학농민혁명) 또한 공주와 금산, 보은과 옥천 등 충청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이어졌다.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던 정부가 청에 군대를 요청하자 일본군도 들어왔다. 조선 침략을 꾀하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을 벌이며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이에 분개하여 "척왜척양:을 앞세운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번지는 한편,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나 집강소 활동을 벌이던 남접 농민군이 9월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고, 최시형도 기포령(동학 총동원령)를 내려 남접과 북접 농민군은 공주로 향하였다(제2차 동학농민혁명). 전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남접과 북접 농민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관군에 맞서 싸운 공주전투는 최대 전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신식 무기에 막힌 농민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르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는데" 통곡하며 발길을 돌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