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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7월31일 일요일 4 (제187호) 기 획 △박성호(서울 송파구) △박병인 (인천시 연수구) △박연희븡박해용(강 원 동해시)△박인근(충북 청주시)△ 박부규(충북 충주시) △박봉순(충남 서천시) △박희중(세종시) △박수환 (경북 안동시) △박창균(경북 영천 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박상철 (경북 예천군)△박복로.박의묵(경북 청도군) △박종욱(경북 청 송군) △박 진하(대구 수성구) △박동춘(대구 달 서구) △박만순(부산 연제구) △박영 덕븡박남수(부산 수영구) △박문호븡박 성국븡박재헌븡박장제븡박능출(경남 창 원시) △박래수(경남 진주시) △박정 영(경남 밀양시) △박문갑(경남 통영 시) △박채은(경남 양산시) △박갑영 (경남 산청군) △박명호(경남 의령 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철환 (전남 장흥군)△박종인.박병순(전남 광양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 형상(전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읍)△박순원(제주한림읍) ◎서울 △박재규(중구) △박종은 (구로구) △박상웅(강동구) △박형식 (서초구) ◎경기 △박재준(의정부시) △박노 황(이천시) △박상수븡면천박씨대종 회븡밀양박씨성산종친회(용인시) △ 박웅준(수원시)△박정범(가평군) ◎강원 △박규홍븡박종구븡신라오릉 강릉시지부(강릉시) △박우철(원주 시) △박두영(동해시) △박순호(평창 군) ◎충북 △박종일븡박일순(청주시) △박우용(영동군) ◎충남 △박기홍(대전시) △박응호 (공주시) △박종덕(아산시) △박문규 (세종시)△박태우(서산시) ◎경북 △박병식(경산시) △숭덕 전. 박동수(경주시) △박성호븡박응조 (포항시) △박종대븡박경무븡박두호 (울산시) △박문학(울진군) △박석근 (청도군) △박용태(고령군) △박호규 (영양군) △박종국(청송군) △박시옥 븡박석태(예천군) ◎경남 △박부덕븡박대병(밀양시) △박의구븡박덕기븡박만종(진주시) △ 박현철(거제시) △박상기(김해시) △ 박수남(합천군) △박희보븡박장순븡박 상헌븡박원주(창녕군) △박천규븡박남 구(거창군) △박인태븡박철암븡박충기 (산청군) △박남술(고성군) △박태호 (의령군) △박우생(함양군) △박종업 (남해군)△박용순(함안군) ◎대구 △박세운븡박홍곤(동구) △ 박효명븡박호경(달서구) △박원정(수 성구) ◎부산 △박재우(연제구) △박상희 (중구)△박지후(부산진구) ◎전북 △박화석븡박찬우(전주시) △박상선(군산시) △박철완(김제시) △박순완(남원시) △박상옥(정읍시) △박용연(고창군) ◎전남 △박희옥(순천시) △박형상 (고흥군) △박광식(담양군) △박영진 (화순군) △박충좌(영암군) △박행순 (곡성군) ◎광주 △박영옥(동구) △박재일. 박철우븡박용철븡박기영븡박창욱(북구) ◎제주 △박문부(서귀포시) △박경 도(제주시) 박성삼(전남 고흥군) 박재복(경남 창원시) 박광희(전북 정읍시) 박종도 (밀성박씨 졸당공파대종회)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 자동이체 계좌 453013-55-000691 농협한빛신문 [6월21일에서7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송금하여주신분 ※△2022년 6월 21일자 신한은행으 로 입금해주신 박기태님. △3월 30일 자 E-경남은행으로 입금해주신 밀성 박씨창산공추위원회님. △4월1일자 E-신한은행으로 박재식님. △2월24 일국민은행박중수(화곡동)님.△2월 15일자 폰카카오로 입금해주신 박현 규님. △2021년 7월 2일자 E-우리은 행 한빛신문구독료로 입금해주신 고 객님.△4월13일자PC신한은행3100 로 입금해주신 고객님. △2월24일 국 민은행 박중수(화곡동)님. △12월 11 일국민은행박일남으로입금하신고 객님께서는신문사로연락주시면감 사하겠습니다.TEL:(053)5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송호영당은 광산구 소촌동 일명 솔머 리 마을에 있다. 삼남지방 일대에서 `솔 머리 朴씨'라면, 곧 忠州朴氏를 지칭하 는 마음의 고향으로 한때 수백호가 거주 했던 충주박씨의 집성촌이다. 송호영당 은 연산군 7년(1501)에 정시을과에 급제 하여 교서관 정자를 시작으로 중종24년 (1529) 나주목사를 마치기까지 약 29년 간 조정에 몸담았던 눌재 박상(1472∼15 30) 선생과 그의 조카로 조선중기의 문 인학자로 명종 8년(1553)에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예문관전적을 시작으로 약 35 년간 조정에 있었던 사암 박순(1523∼15 48)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눌재집, 사 암집 목판, 눌재 선생의 교지를 함께 관 리하였다. 송호영당은 1728년에 눌재 선 생의 묘소가 있는 광산구 서창동 사동마 을에 건립하여 향화를 받들어 왔으나 사 우의 퇴락으로 1900년 초 광산구 소촌동 299번지로 이건하였다.경내에는 재사시 설 영화재(永和齋)가 있고 영정을 모신 송호영당(松湖影堂) 효자 통덕랑공 효 자비각이있다. 명종 원년 서기 1546년에 광주 방하동 현서구 서장동 절골마을 송학산 아래 극 락강 호위에 송호(松湖)를 세우고 눌재 공의 영모를 봉안하고 후손 및 유림이 제 사를행하였다. 명종 2년에 눌재공의 문집 각자판을 보존하였다.정조 19년에 불천지위(不遷 之位)를 하명(下命)하여 예관을 보내 치 제하고 종손에 참봉직 및 녹(祿)을 하사 하였다.정조 20년 서기 1796년에 어명으 로 눌재공을 문집을 간출하고 각자판을 광주향교 명륜당에 옮겨 보존시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인쇄하여 널리 열람 교화 장려할 목적이었다.헌종 10년 서기 1845년에 종손이 현 소재지에 이거하여 제사 기타 형편으로영을 이곳에 옮겨 세 웠다. 철종 11년 서기 1860년 사암 영모 를봉안하고 사암 문집 각자판을 경기 영 평옥병서원에서옮겨보존하였다. △눌재공 음4월10일밤 △배위 유씨음 11월24일 밤 △계배위정씨음1월4일밤 △사암공음7월20일밤 △배위 고씨음 8월 24일밤 △눌재공사암공4명절제사행함 △ 정 조 단 오 추 석 동 지 (영모 에 제 사 를 겸함) 正宗己未七月十七日에 遣左副承旨尹 光顔致祭하라(정종 기미7월 17일 견 좌 부승지윤광안치제)븣원문생략. 1799년 7월 17일승지 윤광안을 보내 제사를지내게했다. 태평은 별다른 형상 없고, 교화(敎化) 의 아름다움으로 일리워지는 도다. 크게 상줌은(正義의 實賤을) 권면함을 나타 내고 북을 울리는 것으로 군의 사기(士 氣)를 돋군다. 충의(忠義)는 사람에 달 렸으며 그것을 몸소 행하는 사람 드물다. 경(卿)이 담주부사(潭州府使)에 취임했 을 때 같 은 뜻 을 지 닌 이 와 이 웃 이 되 었 었다. 그 대(臺)에 세 개의 인(印)을 건 일,(그 절개)만세(萬世)토록 변치 않으 리라. 우리가 신위(神位)의 벼리를 붙드 는데 그 누가 조정에서 사납게 떠드는가. 반드시 백방으로 권면(勸勉)이 된다. 논 정(論定)한 것은 영조대왕의 기미년, 17 59년부터이다. 선왕 이르시되 아아 엄숙 하 게 만 드 는 것 청 조 (淸 朝 ) 의 금 (琴 )의 붉은 현(絃)에서 울려나는 소리 듣는 것 같다.홀(笏)을 찾아 후손을 등용하니 남 긴 곧은 절개 버리지 않는거다.옛날에도 행했는데 지금이라고 소홀하게 할 수 있 겠는가.사판(祠版,신주)을 영원히 받들 어 제향을 드리게 하고 먼 후손(後孫)에 게 까지 대대로 벼슬을 살게 하리라. 태 실 ( 太 室 )에 정 식 (庭 食 ) 케 하 니 그 예 (禮)융숭하고 볼만하다.이 해에 한차례 제사술 드림은 즉 기미(己未)년에 느끼 는 바 있기 때문이다. 붓을 잡고 시운(詩 韻)을 생각하니 송백(松柏) 꼿꼿하다. (은詩經句節떠오른다) △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당대의 문 장가눌재박상(朴祥) 선생의 휘 는 상 (祥 ) 자 는 창 세 ( 昌 世) 호는 눌 재(訥齋) 본 관은 충주(忠 州)이다.성화 갑 오 년 ( 성 종 5년 1474) 5 月18日에 탄 생하였다. 28 세 되던 1501 년(辛酉,연산 군7년)에 정 시(庭試) 을과(乙科) 제5인으로 급제하 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처음 관 직에나갔다. 선생은 세상이 다 아 는 기묘명현(己卯 名賢)의 선구자로 사류(士類)의 순정 (純正)한 정치이념을 실제로 구현시키 기 위해 그 방향을 확정(確定)하고서 자 신이 선봉을 맡고 나섰던 인물이다.선생 은 부정과 불의를 보고는 그것을 발본색 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연 (敢然)히 행동을 취하고는 하였다. 도학 의리실천의 정신을 당시 사회화(社會 化) 시대화(時代化)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 선 인물로 유명하다. 이에 선생의 의리사상(義理思想)은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저 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함께 신비복 위소에서 주자가례의 사대부의 보편적 인륜(人倫) 논리를 왕실에서도 지켜져 야 할 것이라고 표출시킨 의리사상은 후 세의 유자(儒者)들에게 선구자적 위상 을갖게하였다. 조선왕조 정치운영에서 사림(士林)의 존재가 크게 부상하였던 기묘사화(己卯 士禍,1519년 중종 14)에 앞서 이른바 신 비복위소(愼妃復位疏))가 1515년(중종 10)에 있었다. 조광조의 기묘사화에서 보였던 사림들의 정치인식이 이보다 앞 선 신비복위소의 내적 논리에 있었으며, 이와 같은 논리 구조는 기묘사화에도 연 계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지적한다. 신비복위소를 만든 선생은 기묘사화에 서 수상중(守喪中)이어서 피해는 면했 으나 기묘사림의 한사람으로 후세 유가 (儒家)들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 거니와 같이 소(疏)를 만든 김정은 기묘 사화의 장본인이었던 것에서도 직접적 으로 신비복위소 사건은 당시 사림들의 유자적(儒者的) 정치관에 비롯된 소신 의표출이었음을알수있다. 선생은 시문학에서도 특출하다. 선생 이 남 긴 시 는 모 두 1 ,1 0 0 여 수 가 넘 는 다 . 조선 정조대왕은 선생의 시(詩)에 대해 내린 전교(傳敎)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 (詩 ) 로 는 오 직 고 ( 故 ) 교 리 (敎 理 ) 박 은 (朴誾)과 증(贈) 이판(吏判) 박상(朴 祥 ) 두 사 람 뿐 이 다 .”고 하 였 으 니 선 생 의 시문(詩文)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중시(重試) 장원으로 당상관(堂上官) 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여생을 외직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포부를 실 현시키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뇌(懊惱) 와 동지들을 잃고 외로운 가운데에서 선 생은 시주(詩酒)로 자신을 달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어지러운 정 정(政情)속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 으로 독립하여 굳은 절조(節操)를 끝까 지 굽히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진퇴(進 退)하여 후세에 기묘완인(己卯完人)으 로칭송을받았다. 선생은 (중종25년, 1530) 3월에 병이 악화하여 4월 11에 자택에서 하세(下世) 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선생은 청백리 (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성현(成 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延彧)과 함께 서거정(徐巨正) 이후의 4大文章家 로 꼽힌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追贈)되고,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 院)에 배향되고, 송호영당(松浩影堂)에 제향되며, 시호(諡號)는 문간공(文簡 公)이다. △조선의명재상사암박순선생 선생의 휘 는 순 (淳 ) 이 고, 자(字)는 화숙(和叔)으 로 어 릴 적 호 는 청하자(靑 霞子)이고 후 에 사 암 ( 思 庵)으로 바꿨 다. 선생은 나 면서부터 남 다른 자질이 있었고, 6세 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광주의 서모(庶 母) 집에 가서 의탁하였는데 여러 아이 들 과 놀 이 를 하 게 되 면 으 레 읍 양 (揖 讓 ) 진퇴(進退)하는절차를하고는하였다. 8세에 입을 열어 사물을 렓조렸는데 글을불러내면사람들을놀라게하여,이 웃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가 있었는데 도리어 가르치지를 않고 뷺내가 감히 그 의 선생 노릇을 하겠는가?뷻라고 말하였 다. 1540년까지 아버지에게서 가학을 전 습하였고, 1541년 서경덕(徐敬德, 1489 년~1546년)의 문인으로 들어가 수학하 였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명성 이대단해졌다. 명종 8년(1553)에 친시문과(親試文 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래 관도(官途) 에 올라 선조 5년(1572)부터 전후 14년 동안이나 정승(政丞)을 지낸 우리 역사 에서잊을수없는대재상(大宰相)이다. 사암선생은 숙부 눌재공(訥齋公)에서 친부(親父) 육봉공(六峯公)으로 이어지 는 강직 근엄한 가풍(家風)을 계승하고 눌재(訥齋) 선생이 선도(先導) 함양(涵 養)한 사류(士類)의 불퇴전(不退轉)의 정신(精神)을 복응(服膺)하여 평생을 절조(節操)있고 정대(正大)하게 살아가 는 일대(一代)의 사표(師表)가 되기에 부끄러움이없었다. 선조는 사암선생의 인품을 븮松筠節操 水月精神, 송균절조 수월정신븯이라고까 지 극찬하였다.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이었으리라. 한 신 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단한 내용이 다.그만큼 지절이 높았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이었다. 희대의 정치가 백사 이항복은 사암의 시장(諡狀)에서 “옛 말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 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을 두고 하는말이 다”라고 말하여 위대한 그의 용기를 찬 양했다. 명종 말년에 외척(外戚)으로 영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횡포(橫暴)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던 윤원형을 사암선생은 생명 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문의 장계(狀啓) 를 올려 탄핵하였고, 그 일이 발단이 되 어 윤원형은 마침내 권좌(權座)에서 밀 려나가기에이르렀다. 숙부인 눌재공이 ‘신비복위소(愼妃復 位疏)’를 올려 훈구파(勳舊派)의 포학무 도(暴虐無道)함을 성토한 일을 연상(聯 想)하게 한다. 선조조에 선생은 현능(賢能)한 인재 를 조정에 추거(推擧)하는데 힘을 기울 였다.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 (牛溪 成渾)은 선생이 추거한 인물들이 고 율곡과는 특히 의기가 투합(投合)하 여 국정을 바로 이끌어가기 위해 흉금 (胸 襟 )을 털 어 놓 고 숙 의 (熟 議 ) 하 기 도 하였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선생에 게는 장배(長輩)였으나 조정에서는 동 열(同列)이었다.선생은 퇴계의 학덕(學 德)을 존경하여 겸허하게 문진(問津)하 기를서슴치않았다. 선조 초년에 선생이 양관대제학에 있 을 때 자신보다 학문도 뛰어나고 연륜이 높은 이황을 자신의 아래(提學)에 둔다 는 것은 이치에맞지 않다는 생각이들어 문형(文衡)을 퇴계에게 이수(移授) 할 것 을 청 했 고 그 것 이 받 아 들 여 져 한 때 문 형이 퇴계에게로 옮겨졌다. 그 후 이 일 은미담으로전해지게되었다. 1586년 8월에 청가하여 35년의 관직을 마감하고 영평(永平, 현 경기도 포천)에 은퇴하였는데, 임금께서 내사(內使)를 보내 동문(東門)밖에서 술을 내렸다.영 평에는 백운산이 있어 계담(溪潭)이 절 승(絶勝)하였다. 선생은 그길로 자리잡 아 집 을 짓 고 거 기 에 서 사 니 산 뜻 하 니 진 속(塵俗)을 벗어나 입에서는 시사(時 事)를 끊고 매일같이 산골 백성과 전야 (田野)의 늙은이 들과 함께 자리를 다투 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친밀히 사귀었 다. 배우려 오는 자가 있으면 서로 토론하 며 즐거워하고 지칠 줄을 몰랐으며 명승 지를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며 많은 시 문을 남겼다.임금은 선생의 건강을 챙기 며 의원을 보내고 출사(出仕)할 것을 세 차례나 소망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 다. 1589년 7월 21일 일찍 일어나 시를 읊 조리다 훌쩍하니 세상을 떠나니 춘추는 67세였다. 이날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우레가 치 더니 느닷없이 상서로운 빛이 땅을 비춰 환하기가 밝은달 같았다. 산중의 백성들 이 놀라고 의아하여 모여 들으니 이미 세 상을 떠나버린 후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朝政)을 3일 동안 폐하고 승지가 조의를 전달하고 예관(禮官)이 제사(祭 祀)를드리도록명했다. 그해 10월에 례(禮)를 갖춰 종현산(鍾 賢山,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동 쪽지맥에 갑향(甲向)으로 안장 되었다. 부인 고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군수 (郡守) 이희간(李希幹)에게 출가하였 다.선생은 후사가 없어 외손봉사로 이어 져 오다가 고종께서 봉사손(奉祀孫)을 정해주었다. 당대의 제일 인물로 이조와 예조판서 를 거쳐 양관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 영 의정을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 고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 한 시인으로 문학과 학문에 깊은 조예까 지 인정받았다. 시문(詩文)에 밝아 많은 후학들에게 추앙 받았으나 선생은 후사 (後嗣)가 없었던 데다 서세(逝世)후 3년 째 되던 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 어나 그의 시문은 정리(整理) 간행될 기 회를 잃고 그 대부분이 산실(散失)되는 액운(厄運)을겪을수밖에없었다. 선생 사후 거의 60년이 지난 인조 24년 (164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손(外 孫)들이 산재(散在)해 있는 유문(遺文) 을 수합(收合)하여 사암집(思庵集)의 초인본(初印本)을 간행 하였고, 그후 중 간을 보아 부록의 문집이 다소간 추가된 사암집(思菴集) 7권이 전해져 오고 있 다. 나주 월정서원, 광주 월봉서원, 송호 영당, 개성 화곡서원, 경기 포천의 옥병 서원, 대전 돈파사, 장수 화산사에 배향 되었다. 仁祖朝에 문충(文忠)이라 사시(賜諡) 하였으니 시법(諡法)에 학문에 근면하 고 글을 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현인 (賢 人 ) 을 추 천 하 고 충 성 을 다 함 을 충 (忠)이라 하였다. 뱚재실탐방 충주박씨송호영당 광주광역시광산구소촌로46번길46 송호영당연혁 송호영당 영당영모신위제사날짜 눌재선생어제사제문 영화재(永和齋)-편액은의친왕이강의친필이다. 배향인물 눌재선생증직교지 상(上) 눌재집 하(下) 사암집 눌재집 목판은 1781 년 판본이 망가져 보기 어렵게 되자 어명으로 도 백(道伯) 서정언(徐鼎彦)과 의논하여 중간하도록 하였으며, 이 판본은 광주 향교 명륜당에 수장되 었다.그후1841년에화재로유실된것을광주목 사조철영(趙撤永)이중각(重刻)하면서빠진것을 다시 수습하여 모두 18편이 되었다. 현존 목판각 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1판에 4면을 인쇄하도 록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34㎝,세로20㎝, 두 께4㎝내외로일정하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