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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31일 화요일 8 (제176호) 집성촌 탐방 병승산원공(휘 우)이 입향 한 1400년 초반은 세종조 태평성 대를 이어가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 문종은 병 약하고 그의 아들 이홍위(李弘暐, 훗날 단종)은 어렸고, 수양 대군을 비롯 종친들은 권력의 싸움에서 치열한 암투가 일어나 는 시기였다.산원공의 아버지 세양공(휘 강)은 수양대군을 지 지하고 있으나 권력의 암투는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으로 평소 글을 좋아하고 덕(德)을 중시하는 산원공은 권력의 싸움 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넓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이 평으로낙향산수를즐기며여생을보냈다. 병승산원공(휘 우)의 본관은 반남이다. 반남박씨 관향조는 고려때반남호장을지낸휘응주(應珠)이다. 후예들은 조선시대 왕후빈(王后嬪) 3명(인성왕후, 의인왕 후, 현목수빈), 문묘에 배향된 박세체를 비롯 시호(諡號)를 받 고,정승판서청백리등많은현관을배출한명문가이다. 호장공의 5세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은 공민왕때 과 거에 급제하여 얘조정랑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古禮)를 참작 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제사 예전)을 썼다.136 7년(공민왕16) 성균관 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 사서재(五經四書齋)를마련하여생원을교수하게하였다. 이때 김구용,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등과 함께 경술(經術) 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해 3년복을 입으려 했는데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고기를먹지않았다. 친명책을 주장하였으며, 뒤이어 판전교시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 전 백염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임 임과 지윤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 정몽주,김구용,이수인,염흥방 등과 함께 귀양가던 도중 별세 하였다.시호는문정(文正)이다. 문정공의 아들 은( 첩)의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고려 우왕14(1388)년에 문과 2위로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 후덕부승을 거쳐 1391년(공민왕3)통례문부사,이듬해 개성부 소윤이 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1397년 사헌시사를 거쳐 이듬해 즉 제1차 왕자의 난 때 지춘추사로 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다.이어 사헌중증, 판사수감사를 지내고, 1400년(정종2) 지형조사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 웠다.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 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 3등으로 반남군(潘 南君)에 봉해졌다. 그 뒤 강원도관찰출척사, 한성부윤, 승추부 제학을 역임하고 1406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예의로 잘 접대해 칭송 을 받았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자 금천군 (錦川君)으로 개봉되었다. 1416년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 어 소년입각의 예에 들었으며,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 정겸판이조사에올랐다. 세종이 왕에 오르자 고려 때부터 설치는 했으나 유명무실한 집현전을 중설하도록 상소하여 많은 학자를 양성하게 되므로 세종대왕이 정치, 문화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 었 다 .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 1422년 52세로 별 세하였다.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아들 강(薑)은 성질이 정교 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1444년(세종26) 대호군을 거쳐 이 듬해군기감정에임명되어항시이직무를맡고있었다. 세종과 문종 때 왕조실록에서도 대신기전을 개발한 군기감 정‘박강’이라고밝혔다. 2년 3개월동안 자리에 근무하면서 초대형 로켓화기인 ‘대주 화(大走火)’,‘신기전(神機箭)’을만들어조선초기압록강과두 만강 이남의 여진족으로부터 우리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서 새로운화학무기로서큰역할을했다. 1449년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황해도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 사가 되었다.1452년 중추원부사가 되고 1455년 수양대군이 단 종 의 왕 위 를 수 선 (受 禪 )하 는 일 에 협 력 그 공 으 로 좌 익 공 신 3 등에 책정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1457년 지중추원 사,황해도도순찰사가 되었으며,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는 세 양(世襄)으로 세양공파의 파조가 되며 정읍 입향조 병승산원 공의아버지이다. 병승산원공의 휘는 우( 쨩)1416년(丙申, 태종16)에 태어나 관직은 병승산원(秉勝算員)으로 세종 사후에 벌어지는 권력 암투를 피해 곡창지대인 이평면 오금리로 세거지를 옮겨 시문 (詩文)과산수를함께즐기며여생을보냈다. 아들 인정은 1438년 戊午에 본제에서 출생했다.1472년 임진 進仕하고 1476년 丙申에 문과에 올라 응교(應敎)이고 행(行) 강서현령에 이어 현의교위 군산만호를 지냈다. 덕성(德性)이 돈후(敦厚)하고 기우(器宇, 외관 생김새)가 완확( 줬確)하며 부모에대한효도와형제에대한우애돈독(敦篤)하였다. 부모의 병환에 산신령과 하느님에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를 ‘아버지를 살려주고 대신 나를 잡아 가소서’라며 간곡히 빌며 남에게의지하지않고손수약시중을받들었다. 어버이 상제(喪祭)에는 진실로 슬픔을 다하고 깨끗한 제수 로 정성을 다해 조금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고, 자녀들의 훈 육에는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음을 몸소 깨닫게 하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였다.특히 말은 충성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해야 하고 청렴과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자녀들에게 인 자하고 사랑스러움이 가득하여 화평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했 다.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따뜻하게 대우하므로 공경하고 따르 지 않 은 이 가 없 었 다 . 혼란한 시기에 세속을 등지고 외부 출입을 않으려 문을 굳게 닫고 검소한 생활로 연명하며 깨끗하게 수신(修身)하며 불의 와 타협하지 않으며 임천(林泉)에서 본심(本心)을 더럽히지 않고 남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일생 을 마쳤으니 이 같은 행의(行義)는 아버지 산원공의 입향과도 다르지 않다. 아들 윤형은 생원시에 올랐고, 손자 윤형은 승위 부위이다.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승공(承恭)은 무후이고, 차자 승검(承檢)은 진사이다.아들 셋을 두었는데 세원(世元), 세견(世堅),세량(世良)인데 장자와 차자는 후사가 없고,셋째 세량은 참봉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아들 봉수(奉壽)는 증 (贈) 통정대부, 아들 도함(道涵)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에 가자되고, 아들 응선(應善), 응신(應新), 응창(應昌), 응홍 (應弘), 응성(應盛), 응린(應麟), 응곤(應昆) 등 7형제를 두어 장자 응선과 셋째 응창, 여섯째 응린은 후사가 없음에도 사형 제가 크게 번성하여 이평면 오금리 대동, 대독,소독,두지마을 에세거하며명성을이어가고있다. 특히 이들 후손들은 입향조와 그의 아들 군산만호(휘 인정) 공이 영달을 멀리하고 임천(林泉)에서 항상 몸을 깨끗이 하며 수신(修身) 하였듯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였음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않고선조의가르침을따랐다. 병승산원공이 이평면 오금리 대동마을에 세거지를 정하고 8 대손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면서 인근의 대독, 소독, 두지마을 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이후 통정대부 휘 도함의 넷째 응홍(應 弘), 다섯째 응성(應盛), 일곱째 응곤(應昆)의 후손들이 현 정 읍시 수성동으로 세거지를 옮겨 현재 오금리에는 둘째 응신 (應新)의후예들이주류를이룬다. 산원공의후손들은조선시대에는문장과 학덕을 갖추었음에도 출사하지 않고 오직 학문탐구와 후학들의 지도에만 전념 하였 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후 얼마 전 세 상을 떠난고 박찬종은 검찰에서 부이사관 으로 퇴임 후 법률상담 등 재능기부를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하였고, 고(故) 박찬중은 정읍시 부시장, 故 찬후 정읍시 보건소장, 故 찬성 정우면 면장, 故찬규(동옥) 이평면 장은 행정직, 고(故) 박찬열 교장, 故 박찬호 교장은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고(故) 성우 현종은 전북 경찰청 경무계장, 고(故) 종서 현종은 농협 상무 퇴직 지역발전을 이끌었다. 그 래서인지 그 음덕과 후광이 현재에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 이어 져 박상우 검사(정읍지청), 교단에는 우상,찬명 진옥 교수 등 이참선생님으로봉직했하고있다. 경찰공무원으로는 천권 고창경찰서 경무과장, 선우(삼선) 경찰서 경감,연우(연호)경감 퇴직,천진 경찰 경위,천택 경감 퇴직, 천범 경감, 무관(군인)은 향우 전 육군소령(이평면 예비 군중대장), 재우(재수) 예비역 육군소령, 찬옥 전 예비군 중대 장,금융계는 요우 전 농협상무,광우 농협 전무(퇴직),찬숙 전 북은행 전무(퇴직), 찬민 축협상무(퇴직)가 있으며 이밖에도 천정 세관(사무관), 천인 의학박사, 천은 공무원, 천길(동길) 현 지하철공사 역장, 천용(지용) 교사, 천수(수용) 기술직 공 무원, 화서 한전노조위원장(퇴직), 경원(여) 행정직사무관(부 천시)등이각계각층에서열정적으로활동하고있다. 그리고 현재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박향우 회장은 박씨정읍 시종친회 사무국장,청년회 부회장,한국 민속소싸움협회 정읍 시지회 사무국장,이평면 이장협의회 부회장,새천년민주당 정 읍시 이평면 협의회장 등을 맡아 지역사회에서 크게 봉사하고 있다.특히 상급종친회인 세양공파 종친회 이사로 산원공 종중 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면서 이제 흩어져 있는 농지를 영농법인 을설립효율성을높이는등종중기반을튼튼히하고있다. 뱚집성촌 탐방 뱚뱛정읍시이평면오금리 뱚뱛반남박씨세양공후병승산원 공파 전북 정읍시이평면오금리전경 전북 정읍시 이평면 오금리는 병승산원을 역임한 휘 우 ( 쨩)공(公)후손들의 600여년세거지지이다.1 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이웃 정우면(淨雨面)의 오금리(梧琴里)에서 이평면으로 편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넓은 평야 비옥(肥 沃)한 옥토에서 나오는 곡식은 풍요로움을 더해주 고있어후손들의마음또한따뜻하다.특히지역에 서 오랫동안 세거한 토반으로 사회에 대한 높은 도 덕성으로 책임 있는 의식 수준은 많은 사람들의 추 앙을받고있어찾아가본다. 뱚 입향약사 병승산원공종중재사(齋舍) 뱚 선원세계와후손들 종중묘원(수모재옆) 오금리양지마을(최초입향마을로 추정된다) 뱚 세거지변천사 뱚 문중을빛낸후손 박향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