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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4월30일 토요일 6 (제184호) 관향조 종친회 밀성박씨좌상공파대종회는 파조 좌 상공 박춘 선생을 비롯 아드님인 찬성공 (휘 인지), 손자 군수공(휘 정손), 내금 위장공(휘 형손) 등 4위의 제향을 광주 광역시 북구 화암동 360-4 서석단(瑞石 壇 ) 에 서 한 학 자 정 규 현 종 의 집 례 로 극 성공 후 경산 마곡문중의 태근,윤하,진 재공 후 신현이 각각 헌작하고 진재공 후상섭의독축으로봉행되었다. (이하제관분정록참조) 서석단은 고려벽상공신에 오르고 우 시중을 지낸 박춘 선생을 요승 신돈이 ‘권세지가(權勢之家)즉 구가세족을 혁 파한다는 명분으로 최영 장군과 1차로 유배를 보냈다. 이후 최영은 복귀했고 박춘 선생은 1차유배지 광양에서 머리 를 깎아 울주군 열암사로 이배 후 부하 들을 보내 암살 후 시신을 바다에 빠뜨 리는 등 억울한 참화를 당한 이후 향화 를 받들지 못하다 이곳 화암동 360-4 대 지에 단을 마련하고 제향을 올리던 중 세 월 의 흐 름 에 따 라 울 타 리 는 녹 이 슬 어 흉물스러워지고 바닥은 깨지고 솟아올 라 걸음마저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수차 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각종 규제 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2019년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아 성손들의 성금 으로 새롭게 태어나 사위 정지 장군의 사우 경열사와 함께충의정신 함양의 역 사적인 공간으로 지역주민들의 유적탐 방코스로이어진다. 좌상공 박춘 선생은 내시중(內侍中) 으로 수덕궁을 증축하고, 시어사(侍御 史 ) 재 임 시 무 신 정 변 후 폐 주 복 위 사 건 을 빌 미 로 수 많 은 문 신 들 을 제 거 할 때 이의방의 세력에 의해 살해된 휘 윤공 (允恭)의 손자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정 언(正言)을 지낸 상례(尙禮)의 아들이 다. 1300년 초 개경에서 태어났으며,이재 백이정 선생에게 수학하였다.어릴 때부 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6세에 이 르러 스스로 독서를즐기어 14세에 이재 (彛齊) 백이정(白蓬正) 선생에게 수학 하여, 문장과 무예를 익히어 원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고 한림학사(翰林 學士)가 되어 돌아와 익재 이재현(益齊 李齊賢)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더불 어 정주(程朱)의 학설(學說)을 강론(講 論)하였으며, 익재 선생의 천거로 공민 왕조에 입조(入朝)하여 문신인 밀직제 학을 지냈다. 이후 계속된 홍건적의 난 으로 만호(萬戶), 나주목사, 응양군 상 호군, 청주수원도병마사, 판밀직사사 (判密直司事),우시중 등 문무를 넘나들 며 공을 세워 벽상공신에오르기도 했으 나 요승 신돈에 의해 최영 장군 등과 함 께1차로화를입었다. 처음 광양으로 유배를 갔으나 1366년 8월 17일(음) 신돈은 정적을 유배시키 는 것을 넘어 머리를 깎아 울주군의 열 암사(裂巖寺)에 유폐했는데, 얼마 뒤에 수하 왕안덕(王安德)과 배인길(裵仁 吉)보내곤장을쳐 죽이고,바다에 수장 (水葬)시키는 만행을 저질러 유해를 수 습하지 못했다.이후 공민왕(20년)은 충 신(忠臣)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여 좌시중(追 左侍中)의 증직을 내리고 시 호를문정(謚文定)이라하였다. [제관분정록-초헌 아헌종헌축관 순] △찬성공(휘 인지) 진규(고직당공 后), 연규(인재공 后),근호(고직당공 后)성 호(고직당공 后) △군수공(휘 정손) 두 석, 순정, 순식, 화석(이상 무은공 后), 내금위장공(휘 형손) 순호, 운식, 정근, 두식(이상 주부공 后) △집례 정규(극 재공后) 밀성박씨좌상공파대종회서석단시향 봉행 서석단 전경,지난 2019년7월착공하여2020년3월준공식을가졌다.정비사업에는190여명의종원이 9천3백여만원의헌성으로 이루어졌다. 고려벽상공신박춘선생을비롯한아드님,손자등4位 서석단제향이지난20일(음3.20)봉행된가운데참례한제관들이함께하고있다.뒷줄관복입은제관오른쪽부터태근,윤하,신 현順) 밀양박씨규정공을비롯한전서공,참판공등상조3위와임 란공신 동계공·매헌공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두곡마을) 소재 숭양사(崇陽祠) 시향 이 정일인 음력3월 1일(양4.1) 종성 회장의 집례로 초헌관 장 길, 아헌관 동문, 종헌관 진권 현종이 각각 헌작하고 양순 축 관의독축으로엄숙봉행되었다. 숭양사는 헌종 기유(己酉, 1849년)년에 흥양현(현 고흥군) 과역면 가산리 의 봉암사(鳳巖祠)에 규정공(휘 현), 동계공 (휘은춘),매헌공(휘응수)3위가옛흥양출신충신열사들과 함께 배향 되었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향 사가끊겼다가1935년(乙亥)후손들의 종의로 현 위치에 사당 3칸, 강당(敬慕齋) 4칸, 신문(忠義門), 외삼문(興慶問), 고직 사 3칸을 창건, 숭양사(崇陽祠)라 이름하고, 규정공(휘 현)을 주벽으로 전서공(휘 침)참판공(휘 눌생)동계공(휘 은춘)매 헌공(휘 응수)을 배향 하여, 매년 춘 추로 정일(丁日)에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어오다, 60여년의 풍상으로 사 우가 퇴락하여 1997년에 지방정부 지원금과 후손들의 성금 으로 대지를 매입 확장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重建)하여 매년음력3월1일에향사를올리고있다, 숭양사의 숭양(崇陽)이란 복양(復陽) 또는 광복(光復)과 같이 사당을 다시 빛나고 높게 회복하였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있다. 배향된 동계공과 매헌공은 임진왜란에 전사한 충신열사이 자 효자로 유명하다. 동계공 휘 은춘(殷春)은 1544년생으로 체격이 크고 용모가 단장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궁마 익히기 와 병서 읽기를 좋아 하였으며 학문을 할 때는 밤새는 줄 몰랐 다, 1576년 33세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주부, 첨정감 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에 첨사 김완과 함께 같이 거의하고 이 충무공 진영에 달려가 합류했다. 충무공은 공의 지략과 절의 가 뛰어남을 크게 기뻐하며 함께 계략을 논의 하였으며, 1592 년 5월4일 첫 옥포해전 부터 1598년 10월 왜교성 전투까지 수 많은전공을세웠다. 1597년 9월 16일 벽파진대첩(명량대첩)때는 실전 경험이 있는 장졸 160여명의 수군 재건 노력 및 충무공의 지략과 용 맹으로크게이기니해남현감유형은공(公)의전공을통제사 에게 최고라 추대하였으며, 조정에서 듣고 인동부사에 특별 히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흉적들을 모두 섬멸하지 못하여 종묘사직이 위급하고 국가가 위태로운데 어 찌 가히 휴양하고 자적하리요”하고 계속 종군하였다.1598년 9월 20일 ~ 10월 4일에 조(朝), 명(明) 연합군의 왜교성 합동 작전에서 명나라 육군의 배신으로 조선수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그도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고 격려하며 용감히 싸우다가 홀연히 적탄이 날아와 가슴에 맞아 절명에 이르게 되어서도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음을 당하게 되나 나는 신이 되어 적을 섬멸하겠습니다.”하고 운명 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후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선무훈에 녹훈되었다. 동계공의 아들 휘 응수(應秀)의 字는 한서(漢瑞), 호는 매 헌(梅軒)으로 1566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8(무자)년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이 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말 을듣고즉일로급히가서대가(大駕)를호종하였고행재소에 서 물 샐 틈 없 는 경 계 등 모 든 군 사 일 을 성 심 을 다 하 니 . 이 를 본 윤 두 수 , 이 항 복 두 재 상 들 이 참 의 사 라 고 칭 찬 하 며 중 부 장 (中部將)에 추천하고 환궁 후에 종5품 훈련원 판관(判官)에 배수 되었다.1598년(戊戌)에는 부산 첨사로 진양(진주,양산) 지역에 배치 되었는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복 수를 결심하고 왕에게 아뢰니 선조는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말과 화살 300개를 하사 하였다. 이때 공(公)의 나이 33세였고, 부자가 함께 임란에서 유명 을 달리했다. 난이 평정된 후 선무훈에 녹훈되었고, 병조참의 에증직되었다. 고흥숭양사시향봉행 규정공·전서공·참판공·동계공·매헌공등5위 숭양사 전경 ①사당 숭양사 ②내삼문 충의문 ③ 강당 경모재 ④외삼문 흥 경문 숭양사제향이지난1일봉행된가운데참례한제관이함께하고있다. 임진왜란의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숨기에 급급하였으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를 굳건히 지킨 많은 의병들이 있었기에 7년의 전쟁에도 버틸 수 있었고 승리할수있었다. 왜적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인 경북 청도와 경남 밀양지역을 굳건히 지켜냈으 니 그 중심에 삼우정 박경신 선생의 충절과 두아드님이있었다. 오직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심이 불같았 고 집안을 위해서는 모든 식솔들과 여러 제 종(諸宗)들과 많은 가동(머슴, 하인) 들에 게 자애로운 어버이였고, 전투에서는 용감 한 장수로서 싸움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삼우정 선생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 한 추모제향이 지난 12일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마을 임호 서원의경의사에서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19로 인해 유림행사가 아닌 후손향사로 영범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영도 초헌관, 순가 아헌관, 덕상 종헌관이각각헌작하고희상회장의독축으로진행되었다. 삼우정 박경신 선생은 1592년 임진년 휴가차 와있던 고향에 서 왜놈들의 침략소식을 듣고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했을 뿐 만 아니라 선조임금을 호종하고,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서 선 생 은 한 번 도 패 한 적 이 없 었 으 나 오 랜 전 투 에 서 쌓 인 피 로누적으로순직하면서아쉬움을더해준다.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그리고 선생이 남긴 창의일록은 청도 밀양 지역의 교전상황과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전쟁에 임한 태 도 등 을 잘 알 수 있 다 . 선생에게 내려진 임란 1등 공신 녹훈과 포상문서인 절지수 등이 1996년 1월 19일 정부로부터 문화재 보물 제1237호로 지 정되었으며 선생의 위패는 경북 청도군 금천 면 임당리 임호 서원 내 경의사와 청도군 이서면 용강서원의 충렬사에 봉안 되고 1816년 8월 가선대부병조참판에증직되었다. 선생의 두 아들 계애공 휘 지남과 운애공 휘 철남은 아버지 삼우정 선생을 따라 의병으로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각 각선무원종공신2등에녹훈되었다. 임호서원은 1921년 삼우정(三友亭)으로 건립되어 1980년 경의사를 건립하여 선무원종1등공신 삼우정 박경신 선생과 두아드님을청도유림의공의로배향하였다.1980년 임호서당 으로 개편하고 이어 1995년 임호서원으로 승격 오늘에 이른 다. 그리고 1998년 경의관을 건립 선생과 두 아들 관련 유물 4 종17점이전시되어후학들의충의정신을일깨우고있다. 청도임호서원제향봉행 뱛임란공신삼우정박경신선생과 뱛두아들의충의정신기려 임란공신삼우정박경신선생을비롯한 두아드님등3부자를배향하고있는임호서원경의사 제향이 지난 12일봉행되었다.(사진참례한 제관 왼쪽부터영효, 훈상, 순원, 순가, 영도, 덕상, 희상,순복,호현영범順) 제향광경 임호서원전경 밀성박씨 충간공파대종회(회장 원환)는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인터 넷 및 족보편찬사업을 원만히 진행 하기위해 지난 3월26일 오후2시 경 북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모원재 재 실에서 수단유사회의를 갖고 각 문 중에 수단을 독려하고 책임소재를 분 명 히 하 기 위 해 ‘언 론 을 통 해 광 고와 안내에도 불구하고 수단을 접 수 하 지 않 는 책 임 은 종 원 에 있 다 .’는 것을명문화했다. 2022년 말 수단을 마감하고 2023 년 초 발행을 위해 집행부에서는 각 소종중을 순회하고 독려하고 있으 나 농경사회가 아닌 산업화로 인해 종 원 들 과 연 락 이 닿 지 않 고 있 어 많 은애로를갖고있다. 특히 매번 수보(修譜)시 고지를 받지 못해 누보되었다는 항의가 있 어 지 속 적 인 광 고 등 홍 보 를 이 어 갈 예정이나 수단을 접수하지 못해 누 보되는 종원은 본인에게 책임이 있 음을 강조한 가운데 원환 대종회장 은 이날 회의 모두발언에서 고창문 중이나 예천은 잘 추진하고 있으나 고 령 문 중 은 각 소 종 중 을 방 문 해 도 만날 수 없어 걱정이라고 말하고 적 극적인 협조를 당부하고 마지막 족 보라는 각오와 훌륭한 유산으로 남 기겠다는 사명감으로 협조를 하여 줄 것 을 강 조 했 다 . 충간공파는 은산부원군의 휘 영 균의 셋째아들 문경(文卿) 공을 파 조로 한다. 자는 성시(聖始), 호는 송재(松齎)이다. 공민조에 등재하 였 으 나 고 려 말 에 백 중 씨 (伯 仲 氏 , 송은선생)과 전객령공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공은 과천(남서울)에 물러났다. 그러나 이조에 다시 충청 도 도순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추 증 받았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으 로 시호를 따 종중이름을 충간공파 로하여세계를이루고있으며,경북 고령, 예천, 전북 고창 등지에 큰 집 성촌을 이루고 있다. 충간공의 묘는 경기도 과천 매월산 장등이라 기록 되어 있으나 실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원당) 뒤에 제단(祭 壇 ) 을 세 워 매 년 가 을 ( 秋 ) 음 1 0 월 2 일에 제(祭)를 모시고 그 아래에 재 실(齋室)을 지어 재호(齋號) 모원 재(慕遠齋)라편액(扁額)하였다. 밀성박씨충간공파수단유사회의가 져 뷺언론을통해광고와안내에도불구하고수단접수하지않는책임은종원에있 다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