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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4월30일 토요일 12 (제184호) 기획 『대체로의(義)란사람이하늘에서얻은바로서본성에두고있는것이다.능히큰일에임해큰절개를판득(辦 得)하여몸을떨쳐먼저창의(倡義)하는자가있으면곧천하의사람이강한 사람은격앙(激昻)되고약한사람은외복(畏服)하여흡연(翕然)히따르기를마치메아리처럼아니함이없어서 이다.이적(夷狄)이비록완악(頑惡)하나또한사람일뿐이다.어찌의리를보 고서멈칫거리며물러나움츠러들지않는자가있겠는가?』청도소고공박건선생의후예14의사들이창의하 면서맺은맹약문의서문앞부분이다.청도밀성박씨가문의창의동기는국 왕에대한충성심과향민(鄕民)의고통을덜어주기위한것이었다.1592년4월일본군선봉대가부산포로쳐들 어와서울을향한북진을계속해2개 월 도 채 못 되 어 전 국 토 가 유 린 되 면 서 선조와세자는평양으로피난하였다.청도지역은4월20일들어왔고,청도밀성박씨가문의창의는25일이었 다.청도14의사의맹활약으로지역을온전히보존할수있었다.이에이번호 에는청도의병아익장(亞益將)국헌공박경윤선생을소개해본다. 선생의 휘는 경윤(慶胤) 자는 효중(孝仲)이며, 호는 국헌(菊軒)으로 신라시조왕의 50世이고 고 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 (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되고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어 시호 가 문헌(文憲)인 휘 영균(永均)의 8世이다. 공민 왕조에 급제하여 사재소감, 예부시랑, 중서령, 예 판 등 벼슬을 역임하고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 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 포은, 이 목은, 길 야은 등 여러 선비들과 시국 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기고 토론하면 서 이성계가 등극한 후 다섯 번이나 불러 좌우정 승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아 세칭 8은 이라 칭하고 시호가 충숙(忠肅)으로 두문동 72현 인 휘 익(翊:1332~1398)은 선생의 6대조가 된다. 5대조는 이조의 낭관(郎官)으로 청백하고 문 장과 기절(氣節)이 뛰어는 우당공 휘 융(融)이 고, 고조는 봉사(奉仕)로 청도에 처음 입향한 소 고공 휘 건(乾), 증조는 사직(司直) 휘 승원(承 元), 조부는 소요당 휘 하담(河淡)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차례 벼슬이 내래져서 사평(司評) 에 이르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휘는 이( 視)이니 장사랑이고,어머니는 의흥예씨 만호(萬戶) 신충(信忠)의 따님으로 선생은 아들 4형제 중 차남으로 1955년(명종10)에 태어났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뜻의 방향 이 아주 원대했다.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문장 또 한 뛰어났고, 무예(武藝)를 겸하여 연마하였다. 독실한 공부와 뛰어난 무예는 모두 무리에서 특 출하였으며,또 효우(孝友)에 돈독하였으니 사람 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소요당에게 손자가 있 다.”하였다. 1592년(선조25) 왜란에 백씨(伯氏) 판서공(휘 경전)과 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있 었는데 적의 칼날이 4월 20일 청도에까지 미쳐 함 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려하면서 백형이 상중(喪中)이라 하여 머 뭇머뭇하였으나 선생이 “執喪은 작은 예절이요 救國은 큰 의리입니다. 평일 독서한 것을 바로 오 늘에야 써야 합니다.”라고 하자,백씨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관연 의리에 합한다.”하고 드디어 조카 정( , 백씨의 아들)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모시고 운문산 깊은 곳에 피하게 하고 형제가 글 을 지 어 맹 약 (盟 約 ) 한 다 음 각 각 장 호 (將 號 )를 두었는데 백씨 휘 경전은 의병장이 되고, 선생은 아익장(亞翼將)이 되니 당내(堂內, 사촌 이내의 일가)14인이었다. 향리의 정병(精兵)을 또 400여 인을 불러 모았 다. 선생이 뭇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한 곳에 같이 지키다가 만일 대적(大賊)을 만나 면 온 가문이 다 죽게 되니,요해처에 나누어 점거 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원조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선생은 아들 린(璘)과 중동(中東)길부산(吉夫 山)에 주둔하여 낮에는 반드시 면현(綿峴)·동당 (東棠)사이에 군사를 두어 척후(斥候)하고 밤에 는 주둔지를 옮겨 휴식하였다. 그리고 암석(岩 石) 속에 숨어 있는 여러 백성을 불러 모아 왜적 을 막게 하니 왜적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온 경내가 덕택에 온전하게 되고 평상시처럼농사를지을수있었다. 대개 창의 한 뒤로부터 백씨는 의병장으로 종 씨(從氏, 삼우정 박경신)는 조전장으로 도내의 적을 쳐서 무찔렀다. 선생은 본군에 머물면서 적 의 길 을 막 고 적 의 목 을 벤 것 이 그 수 효 를 셀 수 없었다. 그러나 상중(喪中)인 까닭으로 공을 양 보하여 스스로 차지하지 아니하고, 원수영(元帥 營 ) 의 길 이 또 한 막 혀 수 급 ( 首 級 )을 미 처 전 하 지 못한 것이 많아 올린 바는 다만 2개 뿐이었으므로 2등 공신에 기록되어 벼슬이 봉사(奉事)에 이르 렀다. 1603(선조3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에제수되었다. 선생이 비록 무예로 사적(士籍)에 올랐으나 문 필로 스스로 즐겨 집을 짓고 선암 곁에 퇴거하며 다음과같은시를지었다. 산수소재성(山水小齋成, 산수사이에 작은 서 재 이루어지니) 춘배행석병(春盃幸釋兵, 봄술로 다행이도 군사 먹이도다) 화중심은사(花中尋隱 士, 꽃 속에서 은사를 찾으니) 초목괴지(草木愧 知,초목도이름알려지는것부끄러워하네) 천성이 소탈하며 문필로 스스로 즐겼다. 대개 무예를 배웠으나 뜻은 실로 문학을 숭상하였다. 병화(兵火)의 뒤 끝에 공사(公私)의 서적(書籍) 이 남김없이 탕진하였다. 조정에서 경사(經史)의 각판(刻板)에 급급하여 오직 ‘예부운략(禮部韻 略)’은 미처 간행하지 못하여 선비들이 그것을 병 통으로 여겼다. 이에 선생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 하여 형 제우당공과 더불어 가 가재(家財)를 다 내어 드디어 인간(印刊)하여 세상에 공전(公傳) 하였다. 나이 72세에 나이와 덕으로 품계가 가선대부 (嘉善大夫)에 올라서 별세하니 곧 1626년(인조4)5 월12일이다.선생이남긴시문등은국헌일고(菊軒 逸稿)로세상에전해진다. 순조 16년(1816)에 어사(御使)의 계달(啓達)로 백씨 제우당공과 함께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는데 그 기록 이 순조 실록 에 전해 지고 있 어 인 용해 본다 . 【순조 16년 병자(1816) 7월 2일(기유), 예조의 청에 따라 정광로ㆍ이경대의 효행에 대해 정문을 세워 주다. 예조에서 영남 어사의 별단에 따라 장 흥(長興)의 고(故) 학생(學生) 정광로(鄭光露), 상주(尙州) 아전 이경대(李慶大)의 효행(孝行), 진주(晉州) 사인 성사해(成師海)의 아내 정씨(鄭 氏), 사천(泗川) 사인 하용관(河龍寬)의 아내 김 씨(金氏), 동래(東萊) 장교(將校) 손중일(孫重 一)의 아내 강성(姜姓)의 열행(烈行)에 대해 모 두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 랐다. 정광로는 바로 단종조 때 상신(相臣) 정분 (鄭 )의아들로 화를 만나 거짓으로 미쳐서자 취를 숨겨 제사지낼 자손을 보존한 자이다. 이조 에 서 어 사 의 별 도 단 자 에 따 라 경 상 도 사 람 고 부 사 박경신(朴慶新), 고 현감 박경전(朴慶傳), 고 첨정 박경윤(朴慶胤) 등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니,그대로 따랐다.이는 한 가문에 세 사람이 왜적을토벌하여공이드러났기때문이었다.】 선생의 부인은 경주김씨 장사랑 응권(應權)의 따님이다. 아들 린(璘)과 구(球)가 선생을 따라 창의하여 린(璘)은 우익장(右翼將)으로 2등 공 신에 녹훈되고 벼슬은 첨정이며 가선대부에 올랐 고,구(球)는판관이며3등공신에기록되었다. 국헌유집은 선생의 유집을 모아 1867년 간행되 었다.이후 국역 국헌일고 븁菊軒逸稿븂라 하여 195 9년에 초간 되었는데,본 국역본은 이를 바탕으로 하였다. 저자 朴慶胤은 임난창의공신으로 임진왜 란이 일어나자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향을 수호하였다. 이 때에 상중에 있었으므로 처음에 는 백형 경전이 머뭇머뭇하였으나 저자가 “執喪 은 작은 예절이요 구국은 큰 의리입니다.”라고 하자,그의 백형도 쾌히 동의하였다.이외에도 저 자의 빼놓을 수 업적으로 그의 형과 함께 예부운 략 븁禮 部 韻 略 븂을 간 행 한 사 실 을 들 수 있 다 . 이 책 은 운서(韻書)로서 作詩를 위한 일종의 한자음운 사전인데, 지금도 귀중한 문화재로 소중히 간직 되고 있다. 본 국역본은 기존의 븁국헌일고븂를 증 보한 것으로 총 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편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은 저자 의 친필 유문을 담고 있고 하권은 저자에 대한 비 문 등 부록이다. 제2편은 추록으로 저자의 아들 린(璘)과 구(球)의 遺文들을 수습해 놓았다. 제3 편은 븁예부운략븂에 관련된 것들을 채집해 놓았 다.제4편은 저자의 동생 경선(慶宣)에 대한 글들 을 채집해 놓았다.제5편은 보유(補遺)로서 이 역 시 저자와 관련된 글들을 다른 문헌에서 채집해 놓았다. 현존하는 저자의 친필 유문은 詩 9수, 記 文2편,祭文 1편,잡저(雜著)1편,창의맹약문(倡 義時盟約文) 1편, 이격문(移檄文) 1편이다. 시는 증답류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대체로 담박하지 만,왜란을 당하여 지은 〈수백씨부계림(隨伯氏赴 鷄林)〉에서는 “검은 달(왜구)이 성 아래로 육박 해 오나니 이 한 목숨 기필코 던져 싸우리라.흑월 박성하(黑月薄城下)/망생서향전(忘生誓向前)” 라고 하여, 저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 편 의 記 文 중 형 의 悌 友 堂 을 위 해 지 은 〈悌 友 堂 記〉에서는 형제간의 독실한 우애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저자 자신의 菊軒堂을 위해 지은 〈菊軒堂 記〉에서는 모진 서리에도 굴하지 않는 국화에다 자신의 뜻을 기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雜著 1 편은 자손을 교훈한 글인데, 그 말이 절실하여 세 인들의경계가 되기에도충분하다. ‘제우당기’와 ‘국헌당기’를소개해본다. △제우당기(悌友堂記) 제우당기는 선생의 형제애를 오롯이 엿볼 수 있다. 제우당 박경전(1553~1623)은 선생의 맏형 으로 함께 창의하여 의병장으로 곽재우(郭再祐) 와 권응수(權應銖)의 양쪽 진영을 내왕하면서 많 은전공을세웠다. 『군의 동남쪽 우뚝이 솟은 산이 있는데, 두각(頭 角)이 꽤 쫑긋 솟았고 심복(心腹)이 서로 연결 되었으 므로옛사람이합산(合山)이라이름하였다.이산의 정기를 타고 이 산의 아래에 사는 사람은 기거(起居) 와언행(言行)이이산과서로응함이있는것같다. 우리 형제 4인이 같이 부모의 기(氣)를 받았는 데 장성(長成)한 사람도 있고, 어린 사람도 있으 며, 문학(文學)을 공부하기도 하고 무예를 익히 기도 하며, 곤궁하고 통달함이 같지 아니한 것은 산 모퉁이가 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고, 한지에 살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앉을 적에나 누울 적에 나 함께 하며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산 이름과 유사함이(合山)있는것이다. 백씨 첨정공(박경전)이 여기에 당(堂)을 짓고 어버이를 모시고 거주하면서 인하여 중문(中門) 곁에 작은 집을 창건하여 형제가 아침저녁으로 보모를 봉양하는(昏定晨省) 거처로 삼았다. 띠 풀로 지붕을 덮은 것은 검소함을 보인 것이고 양 헌(凉軒, 서늘한 집)과 온돌방을 둔 것은 여름철 과 겨울철에 적의하게 한 것이고, 중간에 장막으 로 칸막이를 한 것은 자질(子姪)들이 눕고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니 백씨가 이 집을 지은 뜻이 우연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빈객(賓客)으로서 이 당 (堂)에 오르는 이는 다만 멀리 바라보고 회포를 풀따름일것이다. 내가 이에 공경한 마음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제(友弟,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 경한다.)로 당의 이름을 짓는 것이 순리이다. 지 금 제우(悌友)로 한 것은 어쩌면 궁한 아우가 동 기(同氣)의 대열에 있으면서 먼저 아우가 되는 도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선 철(先哲)이 말하기를 ‘아들의 효도는 부모의 자 애보다 중하고, 아우의 공경은 형의 우애보다 중 하다.[孝重於慈(효중어자) 悌重於友(제중어 우)]’하였으니 이 당에 거처하는 사람은 마땅히 명칭을돌아보고의의를생각해야할것이다.”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며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 가에형제들이서로모여때로술도마시고시도읊 으며, 이이(怡怡, 기뻐서 좋아하는 모양)하게 기뻐 하고 도도(陶陶,화락하게 즐기는 모양)하게 즐거 워하니 형이 아우를 사랑하는 것인가, 아우가 형을 사항하는 것인가.그리고 산이 사람을 합하게한 것 인가, 사람이 산을 합하게 한 것인가, 천지 사이에 무슨 즐 거움 이 또 이와 겨 룰 수 있겠 는가 . 맹자 가 이 른바, “부모가 함께 생존해 계시며 형제가 무고(無 故)한 것이 첫 번째 즐 거움 이다 .... 천 하에 왕 노릇 함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다.아!우리형제들은그서로힘쓸지어다.』 △국헌기(菊軒記) 주자가 말하기를 “국화를 사랑하는 도연명(陶 淵明) 이후에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 하였는 데 내가 그 국화를 취하여 자 호(自號)로 한 것은 오활(迂 闊, 현실의 경우와는 관련이 멀다)하지 않은가. 정절(靖 節, 도연명의 시호)은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훌륭한 인 물 인 만 큼 백 대 (代 )의 이 후 에 아득하여 그 영향(影響)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오직 국화는 상상하여얻을수있다. 바야흐로 도도(陶陶)한 것이 모두 이러한 것은 명리로 돌아감인데 도연명이 홀로 초연(超然)히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마치 국 화가 복사꽃·오얏꽃 피는 때에 봄을 다투지 아니 하고 우뚝이 찬바람과 서리에 초목이 떨어지는 늦가을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음이 있다. 내가 감히 ‘정절(靖節)의 지절을 사모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 니 라 뜰 에 총 국 ( 叢 菊 , 떨 기 전 국 화 )이 있 어 애 로라지나의취향을붙였을따름이다. 하루 저녁에 화신(花神, 국화의 신)이 꿈에 나 타나 고하기를, “내 천성이 지둔(遲鈍)하여 비록 뭇 꽃과 같이 피려하나 재능이 미치지 못하는데 사람이 고상한 은일(隱逸)의 표치(標致)로 삼아 받들어 칭찬함이 너무 지나치니 항상 매우 부끄 럽게 여긴다. 지금 그대가 나를 가까이하여 무엇 을하려는것인가.”한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소시에 글을 배우고 검술 (劍術)을 연마하였으나 두 가지 모두 성취하지 못 하였고, 중년에 큰 난리를 만나 백의(白衣)로 창의 하여군왕의원수를적대하였으나조그마한공로도 없었는데, 부질없이 총애로운 포상을 입으니 마음 에 항상 부끄럽게 여겼다.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물 러나 살 제 울타리의 국화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예 로부터일컫는은일(隱逸)과도같았다.이러므로헌 호(軒號)를걸어서애오라지함께 늙으면서세상을 마치도록 벼슬길에 뜻이 없고자 하나 나도 재능이 미치지못한다,정절(靖節)은재능과덕행에여유가 있으면서도 짐짓 스스로 겸손한 것과는 다르다” 하 였다. 말을 마치자 꿈에서 깨어나니 황연( 然)히 신명(神明)과 계합(契合)됨이 있는 것 같았다. 드 디 어 그 말을 적 어 국헌 기(菊軒記)로 삼 는다 . 청도 밀성박씨 14의사는 임진왜란 의병사에서 유래가 드문 한 문중의 인사들이 의병을 주도한 사례로서 주목할 만 하다. 특히 창의의 동기는 국 왕에 대한 충성심과 향민(鄕民)의 고통을 덜어주 기 위한 것이었으니 소고공(휘 건)이 청도 입향 이래 지역에서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고,후예들 은 명문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이라 하겠 다. 특히 국헌공은 학문이 뛰어나고 무예 또한 특 출하여 문무를 겸비하였다 할 것이다. 선생은 국 헌기에 다음관 같이 이록한다. ‘중년에 큰 난리를 만나 백의(白衣)로 창의하여 군왕의 원수를 적대 하였으나 조그마한 공로도 없었는데, 부질없이 총애로운 포상을 입으니 마음에 항상 부끄럽게 여겼다.’ 공(功)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조직을 단 속하고 동지와 나라를 위한 것으로 백의 장군이 라 할 만 하다.만년에 국헌당을 짓고 은거하며 학 문에 전념하니 그 공덕(功德)이 몇백년 후손들에 게까지그기운이넘치는것같다.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최대의 국난이었다. 그리고 극복의 주요 원동력 은 의병활동에 있다.이번 달은 임진왜란 430주기 를 맞는다. 국헌공 형제분의 창의 동기를 되새기 면서나라의안녕을빌어본다. /자료제공박남현前남해왕릉참봉 임란공신국헌공박경윤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충열사,청도군이서면학산동(모산)용강서원경내에있다.청도임란14의사의위패가봉안되었다. 청도14의사의행적을기록한비각이다.경상북도기념물제129호(용강서원입구) 입암재(入巖齋)청도군금천면선바위길30-22,국헌공(휘경윤)墓齋. 국 헌문집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 보물 제917호, 안동 국학진흥원기탁소장. 국헌유집(菊軒遺集) 맺음말 14의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