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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3월31일 목요일 7 (제183호) 기 획 그리고 몽진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쌓은 공덕으로 책훈 (策 勳 )을 정 할 때 1 등 으 로 포 상 을 받 고 철 권 (鐵 券 )을 하 사 받 았다. 그러나 선조임금이 승하하고 광해조의 혼정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만년에 나무를 기르고 활쏘기를 익히며 스 스로 답답한 회포(懷抱)를 달랬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정(射 亭)이라 했다. 공이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유성(有誠) 은 구례파, 차남 유함은 무후(无后)이고 셋째 유해는 중추부 사로 타고난 효자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바탕이 있어 어릴 때부터 성인 같은 행실이 있었다. 석계(石溪) 민욱 (閔昱, 1559~1625)에게 학업을 받아 자기를 위하는 학문에 터 득하미 있어 집에 돌아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며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익혔다.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이 있 어영동읍지에전해지는구절(句節)을소개해본다. [朴有諧박유해 母病劇氣絶有諧先斷右脂次斷左脂出血和 藥獲全 其後母又以 疾 氣塞色(모병극기절 유해선단우지 차 단좌지출혈화약호전기후모우이려질기색색)어머니병이심 하여 기절하자 유해는 먼전 오른쪽 손가락을 자르고. 다음 왼 쪽 손 가 락 을 잘 라 피 를 흘 려 먹 게 하 여 약 이 되 어 병 이 모 두 나 았다.그 후에 어머니가 또 창질을 앓아 기도가 막혀 얼굴색이 위험하게되었다.劇不遑抽刀引木枕亂 넜巨脂取血以進廬墓 三年事 聞(극불황 추도인목침 난구거지 취혈이진 여묘삼년사 문) 침착하게 칼을 빼어 목침을 끌어다가 엄지손가락을 두드 려서 피가 나오게 하여 드렸다. 3년 여묘에서 시묘를 살았다. 이일을듣고포상했다.] 병자호란에 아우 기촌공(휘 유혜)과 의병을 일으켜 근왕병 (勤王兵)으로 달려갔으나 치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 식을듣고돌아와평생숭정처사로은둔의삶을살았다. 공의 이 같은 충효가 조정에 알려져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 는 은전을 베풀었다. 그러자 공은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 로 영문(營門, 감영)에 소장을 올린 것이 세 차례나 되었으니 “자식된 자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당연히 행해야 할 직분 이니 효(孝)라고 칭송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내가 불초 (不肖)하여 일찍이 두 분을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 지금 이렇 게 명(命)으로 포상(褒賞)을 내리는 은혜를 입는 것이 어찌 외람(猥濫)되어 비판받지 않겠는가”라 하고 사양하며 명(命) 거두어 달라고 애걸했다. 그 효성스런 마음이 끝까지 순수하 고 돈독했으니 또한 지극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은 아들 4형제 를 두었는데 이중 첫째와 둘째는 무후이고 셋째는 영동 청남 파, 넷째는 영동 용화파이다. 임란공신 휘 난의 넷째 유원은 무후(无后)이고, 다섯째 기촌공 유혜는 기촌파, 개성유수 차 남근음(根陰)은영월파로각각세계를이룬다. 군수공의 차남 흥손(興孫)은 함흥주사를 지내고 1449년(세 종31)훈련원 첨정을 지냈다.1455년 세조 즉위의 공으로 좌익 원종공신3등에책록되었는데이는본의가아니었다, 아들 원영(元榮)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였 다가 화를 피하지 못했다.손자 희삼(훈련원 첨정),증손 수종 (생원)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중종23년(1528, 戊子)에 사 마시에 동방 입격하였는데 화를 피해 금릉 유촌(현 김천시 지 례면유천)에은거하였다. 생원공 휘 수종의 아들 원복(元福)은 참봉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장남경순(景淳)은군기시주부,차남대순(大淳)은 군기감주부이다. 군기시주부 휘 경순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홍업은 부호군으로 유촌파, 차남 도은공 홍발은 신석파로 세계를 이 루고, 군기감 주부 휘 대순의 아들 홍리(鴻履)는 죽천파의 파 조가된다. 전남 구례에 거주하는 구례파는 임란공신 휘 란(欄)의 장자 참봉 휘 유성(有誠)으로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아들 이택 (以澤)은 참봉, 손자 함(檻)은 진사, 증손 응길(應吉)은 통훈 대부행성관도찰방(成觀道察訪)으로이하후손들은크게영 달을 보지 못하였으나 산수(山水)와 어울리며 시문을 가까이 하며지역토성으로자리하고있다. 청남파는충북영동군양강면일대에세거하는문중을말한 다. 임란공신 주부공 휘 란의 셋째 중추부사 유해(有諧)의 아 들 삼형제중 장남과 차남은 무후이고 셋째 통덕랑 휘 사성(思 性)을 파조로 한다. 5대손 재겸(在謙)은 품행이 단정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며, 형제간에우애가돈독하였다.부인낙안김씨는양혜공빈길의 예손으로 영섭(永燮)의 따님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슬 기로워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나이 17세에 시집와 항상 내조 의 공이 많았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집안일을 도맡아 부지런하고검소하게스스로유지하며반듯한규범이있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여 81세의 수 를 누리게 하였고, 돌아가셔서는 상제(喪祭)의 도리를 다하 여칭송이자자하였다. 7대손 치현의 호는 능암(菱庵)으로 경사를 과제로 삼아 자 식을가르치니자식들도모두삼가가풍이있었다. 금현의 호는 청계(淸溪)인데 효우와 학문이 뛰어났다.경술 국치를 당하던 날 지역의 많은 유생들과 함께 탄식하기를 “종 묘 사 직 이 저 와 같 은 데 어 찌 천 지 의 사 이 에 서 살 아 숨 쉴 수 있 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두발을 깎아야 할 무렵에도 혼자 스스 로 두발을 보전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보전을 위해서는 우수 한인재를길러야한다며후학양성에매진하였다. 9대손 준동과 그의 부인 동래정씨는 효자와 효부이다. 풍병 에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24년간 지극정성으로 봉 양함으로써지역에서칭송이자자하였다. 충북영동군용화면일대에거주하는용화파는중추부사휘 유해(有諧)의 넷째아들 수직(壽職, 81세)으로 첨지중추부사 인휘사침을파조로한다. 그의 아들 기하(基夏)의 호는 노곡당(老谷堂),지극한 효성 으로 시묘3년 동안 하루같이 정성을 다해 영동읍지에 실려 전 해진다. 이는 1716년(乙未) 7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들자 밤낮 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야 약을 지어 드렸 음에도 효험이 없이 세상을 떠나려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어 입속으로 흘려 넣어 소생(연명)하기를 수차례 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묘소를 아침저녁으로 찾아 살피고 절하고 꿇어앉은 자리가 구덩이처럼 되었고, 비 록 매 우 춥 고 무 더 운 여 름 에 도 한 번 도 그 만 둔 적 이 없 어 지 역 주민들이 앞 다투어 눈을 쓸어주고 횃불을 밝혀 효자가 가 는길을도와주었다. 기촌파는 임란공신 주부공 휘 란(欄)의 다섯째 휘 유혜(有 ) 공 의 아 호 기 촌 (耆 村 ) 을 땄 다 . 1602년(壬寅) 길동현(현 영동군) 기장리에서 태어난 기촌 선생은 중형 유해와 함께 석계(石溪) 민욱(閔昱, 1559~1625) 선생에게 수학(受學)하여 학문이 뛰어났다. 병자호란에 의병 을 일으켜 문하(門下)의 제현(諸賢)들과 함께 수백명을 모집 하여 다투어 근왕병으로 달려갔으나 성이 함락되고 치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로 인하여과거를위하여공부를일삼지않고기호(耆湖)강가에 집을 지어 오묘정사(悟杳精舍)라 편액하고 숭정(崇禎, 명나 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다는뜻)의뜻을굳게지켰다. 1663년오묘당에서세상을뜨니지역의선비들이모여사문 (斯文)의 큰 어른을 만사와 조의문을 지어 애도하고 사당을 세워제사를드리며사당을회암(晦巖)이라하였다. 슬 하 에 아 들 넷 을 두 었 는 데 넷 째 휘 사 기 ( 思 圻 )는 중 추 부 사 로 아들 계하(啓夏)·양하(樑夏)를 두었는데 장자 계하는 신 탄진문중, 차남 양하는 통정대부이고 동정문중으로 그의 아 들 래흥은 통정대부 증 공조참의이고 손자 지수는 증 한성부 판윤,증손춘영은음직으로용양위부호군이다. 영월파는 군수공의 장자 개성유수 휘 환(桓)의 차남 휘 근 음(根陰)으로인해문호가열린다. 군수공파 파보에 의하면 그동안 누보되어 1960년 경자보에 영월거주 해룡일가가 가승을 가지고 와 소명 후 부터 입계되 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此派不知 所 居而寧越郡 周水面 武陵 里海龍持參家乘因考派系븣) 파조 근음 공의 현손 우(佑) 통정대부이고 그의 아들 세걸 (世傑)은 현릉참봉[顯陵,제5대 문종(1414~1452)과 현덕왕후 권 씨(1418~1441)]참봉이다. 유촌파는 군수공의 차남 훈련원첨정 휘흥손(興孫)공의 장 손계열이다. 군기시주부를 지낸 휘 경순(景淳)의 장남 휘 홍 업(鴻業)으로인해문호가열린다.공은 부호군으로첨지중추 부사에추증되었다. 공의 현손 구년(龜年)의 호는 삼소재(三疎齋),효도와 우애 를 겸비하였다. 어려서 어머니가 풍병을 앓았는데 밤새 곁에 서 모시며 정성을 다하였고, 돌아가셔서는 성인처럼 상복을 입고예법대로행했다. 20세에 아버지가 천연두 걸려 증세가 매우 위중하자 노천 (露天)에 향을 피우고 대신 앓기를 빌었고, 대소변의 맛을 보 아가며 병증(病症) 가늠했는데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 를 흘려 넣어 거의 회생시켰으나 대명(大命)은 어찌할 수 없 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늙은 나이로 슬퍼하고 가슴아파하며 상심 하여 점점 고질병이 되어가자 정성을 다하여 약시중을 들어 한결같은마음을풀지않았다. 또한 종조모와 친조모에게도 똑같이 하였으니 출천지효라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니 사우(士友)들이 서로 추중 (推重)하였다. 6대손 천일(天一)의 호는 오우헌(五友軒)으로 족숙 삼소재 (三疎齋)에게 수학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병이 들어 구운 꿩고기를 먹고 싶다 하니 즉시 달려 나가 사방을 찾아다녀도 구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 가운데로 날아들 어드디어장만해드리니병이따라서회복하였다. 당시사람들이그효성에감동했다고감탄하며진나라임치 사람 왕상(王祥)이 잉어를 구한 일과 오나라 강하사람 맹종 (孟宗)이죽순을어머니에게바친일과비교했다. 일찍이과거공부를일삼아누차향시에합격되었으나예부 (禮部)의 진사시에 낙방되고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과거공부 를 그만두고 임천(林泉)에 살면서 집 남쪽에 정자를 짓고 천 류(川柳)라편액하였으니이는정부자(程夫子,정명도)의시 춘일우성(春日偶成)의 ‘구름은 담담하고 바람이 가벼운 한낮 무렵에 꽃을 찾고 버들 따라 앞 시내를 지나가네’에서 취하였 다. 이에 모든 배우는 사람들에게 그 가운데서 학업을 익히게 하여종일강마(講磨)하여모두성취함이있었다. 7대 주손 기찬(基瓚)의 호는 초산(憔山)이다. 어머니의 연 세가 많은데 학질에 걸려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 어마시게하여마침내소생시켜천수(天壽)를누리도록하였 다.이에 마을에서 그 효성에 감탄하여 관에 보고하니 ‘가상하 도다’라고하였다. 9대손 석천처사(石川處士)영현(永鉉)은 가난한 학자의 집 안에서태어나가풍을이었다.20여년의공직생활에청렴하였 으며, 아버지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수일간 연명토록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대한충의효열록에 기록되고 마을 앞에 효자비가세워졌다. 신석파는경북김천시조마면일대에거주하는문중으로유 촌파부호군휘홍업의동생도은공홍발(鴻發)로부터기일세 (起一世)한다. 공의 字는 여빈(汝彬) 휘는 홍발(鴻發)이니 도은(道隱)은 아호인데 오도산에 은거하며 유학의 뜻을 취해 평생을 운둔 (雲遯)하면서스스로를다스린다는뜻이다. 사당 책상에는 대학 근사록(近思錄)등의 책을 갖추어 놓았 으며, 벽에는 하도(河圖) 낙서(洛書) 주자잠명(朱子箴銘) 퇴 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을 붙여놓고 마음으로 깨닫고 암 송하며 즐겼으니 많은 선비들이 공을 중하게 추존(推尊)하였 다. 뛰어난학덕은나라에크게보탬이되리라기대하였으나병 자호란에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통곡하 고 더욱 깊은 곳에 은거하였으니 금릉군(현 김천시) 조마면 오도산아래이다. 두문불출하고 다만 향촌 수제자들과 더불어 심행수묵(尋行數墨)으로종신하려는뜻을지녔다. 만년에 조그만 한 집을 짓고 도은(道隱)이라 편액하고 백씨 중추공과 더불어 항상 왕래하니 벗들이 공경하기를 더욱더 깊이하였다. 아들창룡·천룡을두면서크게번창한다. 장자 창룡(昌龍)은 증 장악원정인데 아들 둘을 두었다. 장 자 문필은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그의 현손 빈은 효행으로 감 찰이고 그의 아내 함양오씨는 열부로 정려가 내려졌다.7대손 규혁(奎赫)의호는죽포(竹圃)인데대를이은효자이다. 8대손 익현(翊炫,한혁의 아들)의 호는 오암(五庵),이 또한 효자로 비서감에 증직되었다. 무현(武絃, 두혁이 아들)의 호 는 송헌(松軒), 생부는 죽포공 휘 규혁이다. 양부모 섬기기를 생부와 같이 하였으며, 상현(尙炫, 의혁의 아들) 또한 부모의 병환에단지(斷指)하는등타고난효자로마을입구에효자비 가 세워지는 등 한 집안에서 효자와 열녀가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장악원정 창룡의 차자 문정은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손자 세호는 가선대부 공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었 다. 도은공의차자천룡은효행이뛰어나고무과에급제하여상 (喪)을 당해 출사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문형(文亨)은 병절 교위용양위부사과이다. 죽전파는참봉휘원복의차자군자감주부휘대순으로부터 이어진다. 주부공(휘 대순)은 아들 홍이(鴻履)를 낳았는데 임진년(15 92)에 통정대부지중추부사이고 아들 문룡,상룡,정룡을 낳았 다. 장남 문룡은 학생이고, 차남 상룡은 숙종 병진(1676)에 무 과에 올라 선전관이고, 셋째 정룡(廷龍)은 남다른 재질이 있 어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 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함을 알고 두 형과 함께 두 어버이를 받들고 용문산아래 죽전리로 집을 옮겨 농사와 양잠을 겸하 여 다스리면서도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 반드시 사람의 도리 를실천하였다.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여 비록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성현이 말씀한 큰 절목과 의리가 있 는곳에익혀서이해하지않은것이없었다. 순천박씨 군수공파 선조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조선시대 관직을 따라 한양에서 거주하면서도 인근에 주거지 를 정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군수공 또한 대흥군수 임기 를 마치고 도연명과 같은 문학관을 갖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장남 개성유수 환(桓)과 차남 흥손의 아들 원영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은거하기에 이르러 충북영동에정착하기에이른다. 특히 종족인 경력공(휘 의번)의 차남 창기 공이 영동현감으 로재직한것도무관치않을것같다. 개성유수공의 현손은 임진왜란시 임금이 몽진 갈 때 호 가 1 등 공신으로 철권을 받았으나 광해 혼조에 관직으로 버리고 영동으로 낙향함으로서 영동 청남 용화 동정 추풍령 죽전 등 에산재하고있다. 이중 구례파는 파조 유성(有誠)의 아들과 손자 등이 여수와 순천에서활동하면서구례로이거하여정착한것으로보인다. 청남파는 영동군 양간면 일대, 용화파는 영동군 용화면, 기촌 파는 장자는 충청도 신탄진, 차남은 영동읍 동정에 산자하고 개성유수 환(桓)의 차남 영월파 근음은 단종을 모신 영월에 세거한다. 군수공의 차남 훈련원첨정 휘 흥손 계(系)는 김천시 지례면 유촌과 조마면 신석, 그리고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에 근거 지를두고있다. 첨정공 흥손의 증손 수종이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중종23 년(1528, 戊子)에 사마시에 동방 입격하였으나 당시 당파싸 움 등 혼정을 피해 금릉 지례현 유촌(현 김천시 부항면 유천) 에 은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2002년에 착공하여 2013년 11월 20일에 준공된 부항댐으로 인해 수몰되어 현재는 인근 지역으로흩어져산재한다. 그리고증손도은공휘홍발은병자호란에굴욕적인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통곡하고 더욱 깊은 곳에 은거한 곳이 금릉군(현 김천시) 조마면 오도산으로 신석문중의 입향 조가된다. 참봉공 휘 원복의 차남 대순의 손자 정룡은 빈약한 살림을 걱정하며 더 좋은 터를 마련하기 위해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죽전리로이거하게되었다. /글·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6면에서이어짐 △구례파(求禮派) △청남파(淸南派) △용화파(龍化派) 상춘재(도은공이하 재사) △기촌파(耆村派) △영월파(寧月派) △유촌파(柳村派) △신석파(新石派) 감모재 효자휘빈과 그의아내함양오씨정려(조마면신곡리) △죽전파(竹田派) 김천시조마면신곡리마을전경 집성촌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