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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3월31일 목요일 12 (제183호) 기획 병재박하징(1483~1566)선생은중종조와명종조의유현으로청송성수침가문과자주학문을강론하고회재 이언적,퇴계이황선생과도서신왕래를통하여의리를더욱도탑게하 였으며,탄수원두표,우계성혼,남명조식,삼족당김대유등당대의명현들과학문을토론하고강마하여우 리나라유도(儒道)에큰도움이되었다.이에사림들은선생을제향하기 위해명동사를건립선생의위패를봉안하였고,서원으로승격되었으나대원군의서원훼철령에따라철폐되 었으나사당만을그대로존치하여지금에이르며매년2월중정일에향 화를받들고있어소개해본다. 선생의 본관은 밀성이다.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 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 임하고 밀성부원군으로 피봉된 휘 언부(彦孚) 는 중조이고,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 도판서와 삼제(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 로 봉군되고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으로 추봉되어 시호가 문헌(文憲)인 휘 영균 (永均)은 파조이다. 공민왕조에 급제하여 사재소감, 예부시랑, 중 서령, 예판 등 벼슬을 역임하고 려말 국정이 쇠퇴 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 포은, 이 목은, 길 야은 등 여러 선비들 과 시국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기고 토론하면서 이성계가 등극한 후 다섯 번이나 불 러 좌우정승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 아 세칭 8은이라 칭하고 시호가 충숙(忠肅)으로 두문동 72현인 휘 익(翊 : 1332~1398)은 선생의 고조가된다. 고조 송은 선생의 고분에서 지난 2000년 9월 벽 화가 발견되어 국가 문화재 사적제459호로 지정 되었다. 증조 휘 휘 융(融)은 태종8년(1408년) 사마시 에 합격했다. 성균관 사예, 사간원 정언, 집협전 수찬·전한, 형조좌랑, 이조정랑, 종부시 정을 역 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금산, 함안 두 군을 다스 렸는데 정사가 공평하고 백성이 화목했으며, 손 을 씻을 듯 청백하니 기리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 였다. 조부 소고(嘯皐)는 호(號)이다. 무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으로 훈련 원 봉사와 충순위 부사직(忠順衛 副司直, 종5품) 을 지냈다. 밀양에서 청도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이기도하다. 아버지 휘 승원(承元)의 자(字)는 선부(善夫) 호(號)는 퇴암(退巖)으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충순위 부사직을 역 임하였다. 진주하씨 경절공 하숙부 딸과 혼인하 여 아들 삼형제 두니 하담(河淡)·하청(河淸)·하 징(河澄)으로 이들 3형제를 중심으로 소요당공 파,성와공파,병재공파로각기세계를이룬다. 선생의 휘는 하징(河登) 자는 성천(聖千)이며 호는 병재(甁齋) 또는 서암(西巖)인데 병재(甁 齋 ) 란 호 는 남 명 조 직 이 주 자 (失 子 )의 「경 재 잠 (敬齋箴)」과 이를 인용한 『명심보감』의 「존심」 篇에 나오는 ‘수구여병 방의여성(守口如甁 防意 如城, 입지키기를 병과 같이 하고 뜻 막기를 성을 지키는 것처럼 하라)’에서 따서 붙여준 호이다. 선생은 1483년 6월 25일 지내리 세제(世第, 본가) 에서출생했다. 어머니(母夫人) 하씨(河氏)가 일찍이 삼태성 (三台星)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과연 아들 셋을 낳았다. 그래서 성자(星字)로 이 름을 지어주었는데 선생은 소자(小字)가 ‘三星’ 이었다. 골상(骨相)이 준수하고 눈동자가 맑았 으며 돌을 갓 지나서 문득 말을 알아듣고 선악 (善惡)을 구별할 줄 알았다. 특히 어머니가 질 병으로 앓았을 때에는 젖을 빨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서 피하여 집안사람들이 ‘유효(乳孝)’라고 일컬었다. 겨우 3, 4살이 되었을 때 부형(父兄) 들이 ‘天地父母忠孝(천지부모충효)’ 등의 글자 를 입으로 말해주면 한번 듣고 모두 외워서 대 답하였다. 8살 때에 『소학(小學)』한 부를 배웠고 11살 무 렵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동강부춘(桐江富 春)’을 병풍에다 그림에 백씨인 소요당(하담)이 시를 짓고 중씨(仲氏)인 성와공(城窩公, 하청)도 역시 시를 지으니 병재(甁齋)도 즉석에서 시를 지었는데 두 형이 병재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또 한 백 씨 가 『소 학 』 을 두 고 시 를 지 었 는 데 병 재 도 백씨의 운자에 화운(和韻)하였고 「성력시(星 曆詩)」와 「우중만영(雨中 묄詠)」같은 작품도 있 다. 그리고 모부인이 병이 들어 한겨울에 꿩고기 구이를 요구함에 맨발로 밖을 나가 하늘에 백번 이나 절을 하고 東山에 가니 눈이 반쯤 녹았는데 마침 꿩 한 마리가 품으로 날아 들어오니 마을사 람들이 모두 경탄(驚歎)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병 재의 아들이 지은 제문에 실려 있다. 그리고 백씨 (伯氏, 소요당 하담)를 따라 입암(立巖)과 눌연 (訥淵)으로 가서 날마다 사서(四書)와 제자백가 서(諸子百家書)를 공부하며 학문을 하는 여가에 자연 속에서 형제애(兄弟愛)를 나누었다. 항상 말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람 성품의 벼리이기 때문에 어찌하여 의리를 잊고 이익을 취해 성품을 깡그리 없애는 곳으로 돌아가는가? 요순(堯舜)을 배우고자 하면 요순(堯舜)이 멀지 않다.” 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경(恭敬)과 근신(謹愼)은 몸을 닦는 요체(要諦)가 되니 더욱 『小 學 』 과 『大 學 』 두 책 에 다 공 력 을 쏟 아 야 하 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행위는 반드시 여기에다 준칙 (準則)을삼아야한다.”라고하였다. 또한 암행어사인 이시백이 조정에다 보고하여 곧 입 시 (入 侍 ) 를 하 였 고 그 후 에 는 효 행 으 로 팔 도에 알려져 교관을 제수 받아 사은(謝恩)하고 두어 달을 봉직(奉職)하다가 어버이가 늙었으므 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일찍이 경기 도 파주의 죽우당(竹雨堂) 성수침(成守琛, 호 청 송) 문하에 유학했는데 청송(聽松)은 사사(師 事)를 하였고 우계(牛溪, 성혼)는 벗으로 사귀었 다. 1515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어 부임할 적에 절구(절구)한 수를 지었다.그 뒤 벼슬을 그 만두고 5년이 지나 기묘사화사가 일어나자 고향 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군의 북쪽에 있는 귀 일곡(歸一谷)에다 별장을 짓고 『온공가예(溫公 家禮)』를 걸어두고 집을 나갈 때와 귀가했을 때 반드시 사당에다 보고를 하였다. 1544년에 외직 으로 나갔다가 수구재(守口齋)로 돌아와 금서 (琴書)서와 화죽(花竹)을 즐기며 늙음이 장차 이 르는것을알지못하였다. 1566년 9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84세였고 유현(儒賢)을 포상)褒賞)하는 제도로 호조판서 가 증직되었으며 병재가 사는 마을의 뒷산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수 성라씨(壽城羅氏)가 있고 後配는 창녕장씨(昌寧 張氏)로 참봉 순(煦)의 따님이다. 외아들 적( ) 을 두었는데 이미 자라서는 도산(陶山)으로 퇴계 (退溪)선생에게수학하였다. 병 재 선 생 은 모 두 3 2 제 3 4 수 의 시 를 남 겨 1 8 7 1년 이를 한데 묶은 목판본이 병재집(甁齋集) 전해지고 목판은 2015년 학국국학진흥원에 기 증되었다. △성종 14년(1483)계묘(선생 1세)6월 25일 자 시(子時) 지내리(地內里) 본가에서 출생하다. 공 이 태어나던 밤, 무지개가 뜰에 뻗치어 특별한 징 조라고 이웃에서 축하하다. 삼태성(三台星)이 품 에 안기는 태몽으로 3형제 모두 성(星)자로 이름 하여공의어릴때자를삼성(三星)이라하다. ※선생 형제(河淡·河淸·河澄) 이름에 모두 ‘하 (河)’자가 들어 간 것은 외가인 하씨를 잊지 말라 는 뜻이 담겨 있다. 소고공의 사돈이었던 경절공 하숙부가 원래 살았던 곳이 수야였고, 소고공의 아들인 부사직 승원공이 처가 재산을 물려받으면 서수야일대가박씨세거지가되었다. △성종 15년(1484)갑진(선생 2세)태어난 지 1 년이 지나자 곧 말뜻을 알아들어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다. 공의 어머님이 병환을 앓으시면 젖을 먹지 않고 주위를 기어 다니며 피하므로 ‘젖먹이 효자’라하였다. △성종 16~17년(1485~1486년) 을사~병오(선 생 3~4세) 부형(父兄), 천지(天地), 부모(父母), 충효(忠孝) 등의 글자를 한번 배우면 외웠고, 밥 먹을때도숟가락으로글자를그리다. 문밖에 나가 놀 때에는 깨끗한 곳에 돌 조각을 질서 있게 차려놓고 절하고 읍하며 제사지내는 시늉을 하다. 귀한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품안에 간직하고와서무릎을꿇고부모님앞에내놓다. △성종 21년(1490) 경술(선생 8세) 외지 스승 에게 나아가 『소학』을 공부하다. 그날 배운 것은 반드시 외워 10일에서 한 달 사이에 여러 편을 보 다.글 짓고 해독하는 것을 노성한 사람처럼 하다. 인 륜 편 과 효 행 편 에 감 화 받 아 평 생 동 안 부 모 곁 에서효행을실천하는바탕을삼다. △성종 24년(1493) 계축(선생 11세) 선생이 어 린 나이로 시를 차운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다. ※ 어떤 화공이 동강과 부춘산을 병풍에 그려 공에 게 들려 보내자, 백씨인 소요당(당시 16세)이 그 림 을 보 고 시 한 수 를 짓 고 이 어 중 형 성와공이 차 운하였는데, 어린 나이의 선생도 따라 차운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다.이 때 선생이 차운한 시은 다 음과같다. 良工神筆下(양공신필하) 뛰어난 화공의 신비 스런 붓끝이로고/ 造化多此間(조화다차간) 많은 조화가 그 속에 다 있구려/ 借問釣臺客(차문조대 객) 강가의 고기 낚는 이에게 길을 물어/ 作伴好 還山(작반호환산)둘이서 짝을 이루어 산으로 돌 아가네. △연산군 4년(1498)무오(선생 16세)무오사화 가 일어나다. 조부 사직공이 사화에 연루되어 절 도에 귀양 가다. 이웃동네의 탁영 김일손과 우졸 재박한주등이무오사화로화를당하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선생 22세) 갑자사 화가 일어나다. 재차 일어난 사화에서 오졸재 박 한주가죽음을당하다. △연산군 11년(1505) 을축(선생 23세) 백씨 소 요당을도와수야에행단(杏壇)을쌓다. ※일찍이 선생은 백씨 소요당과 함께 성현의 초상을 그려 분향배례(焚香拜禮)하며 경모(敬 慕)의 뜻을 표하였는데,이에 단(壇)을 쌓고 은행 나무를 심어 공부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소요당의기문(記文)이전한다. △중종 2년(1507) 정묘(선생 25세) 선생의 아 들 수모재(守慕齋) (적)공이 출생하다. 해배되 었던 동창(東窓) 김준손(김일손 형) 공이 선생 형제를방문하다. △중종 3년(1508) 무진(선생 26세) 백씨 소요 당이 진사시에 합격하다. 삼족당 김대유공이 선 생형제를방문하다. △중종 6년(1511) 신미(선생 29세) 백씨 소요 당을 따라 운문(雲門)과 눌연(訥淵)에서 산책하 고독서를하다. △중종 9년(1514) 갑술(선생 32세) 노량진 사 육신묘를 방문하고 충절에 감동하여 박팽년공에 대한 제문을 짓다. 파주 청송 성수침공을 방문하 여거려(居廬)함을위로하고시를지어주다. △중종 10년(1515) 을해(선생 33세) 사간원 정 언으로 제수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다. 관직 취임 전의 심경을 시로 남기고, 탄수 이연경공에게도 편지를 짓다. 입대하여 옛 제왕을 도를 밝히고 관 직에뜻이없음을밝히다. △중종 10~11년(1515~1516)(선생 33~34세) 선 생의 고조 충숙공(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휘는 翊)의 개경 유허지를 찾아 보다. 백씨 소요당이 사마시에합격하다. △중종 12년(1517) 정축(선생 35세) 백씨 소요 당을 도와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을 간행하다. 주문공이 편찬한 근사록이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선생 형 제가사재를내어간행보급하다. △중종 13년(1518) 정축(선생 36세) 백씨 소요 당이 삼족당 김대유공과 함께 사창(社倉)건립하 는것을돕다. △중종 14년(1519) 기묘(선생 37세) 기묘사화 가 일어나다. 공과 도의지교로 사귀던 탄수 이연 경공이 화를 입다. 백씨 소요당과 함께 문적을 불 사르다. △중종 15년(1520) 경진(선생 38세) 백씨 소요 당이 삼족당 김대유공과 함께 사창(社倉)인근에 운수정(雲水亭)을 짓다. 신재(愼齋) 주세봉공이 선생 형제를 방문하여 운문의 명소를 함께 즐기 다. △중종 16년(1521) 신사(선생 39세) 선생의 백 씨 소요당이 입암(立巖) 눌연 위에 소요당을 짓 고 아 호 로 삼 다 . △중종 26년(1531) 신묘(선생 49세) 백씨 소요 당을 따라 김 삼족당 · 곽 경재와 함께 곡천대(曲 川臺)에서놀다. △중종 32년(1537) 정유(선생 55세) 『주자가 례』에심취한후일상생활에본령임을깨닫다. △중종 34년(1539) 기해(선생 57세) 선생의 어 머니 하씨가 별세하다. 초종(初終) 범절을 가례 에따라행하다. △중종 35년(1540) 경자(선생 58세) 봄에 모부 인 하씨를 귀일(歸一) 뒷산 응봉(鷹峰) 건좌(乾 坐)에 안장하다. 여막(廬幕) 생활을 시작하여 3 년을보내다. △중종 36년(1541)(선생 59세)선생의 중씨 성 와(城窩)하청(河淸)공이별세하다. △중종 37년(1542) 임인(선생 60세) 선생의 아 버지 사직공이 별세하다. 모부인 하씨 묘 오른쪽 에합장한후여막(廬幕)에서3년상을보내다. △중종 38년(1543) 계묘(선생 61세) 신재 주세 붕과 남명 조식 등이 여차(廬次)에 와서 조문하 다. △중종 39년(1544) 갑진(선생 62세) 외우(外 憂)를 마치고 수구(守口)의 옛 서재로 돌아와 금 서와 화죽을 즐기며 지내다. 백씨 소요당이 이화 지대(耳火池臺; 오늘날 귀일)의 토지와 노비를 선생께급여하다. ※ 지 대 의 토 지 는 진 외 조 부 판 서 김 공 에 게 물 려 받은 것이고, 노비는 외조부 경절공이 물려주신 것이다. 백씨 소요당이 운문산 근처 입암으로 돌 아가다. △명종 즉위년(1545) 을사(생 63세) 을사사화 가 일어나다. 조남명(조식)공이 선생 형제를 방 문하여 입암정사에서 함께 담소하다. 곽 경재(곽 순) 피화를 전해 듣다. 파주의 우계에 우거한 성 청송(성수침)을 방문, 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나 누다. △명종 원년(1546)정묘(선생 64세)조남명(조 식)공이 김해 탄동에서 모친상을 당하자 선생 형 제가가서조문하다. △명종 5년(1550) 경술(선생 68세) 이 회재(이 언적)공의 강계 적소에 위문하는 글과 약재를 보 내다. △명종 12년(1557)정사(선생 75세)이퇴계(이 황)선생과편지를주고받다. △명종 21년(1566) 병인(선생 84세) 9월 16일 술시에별세하다.귀일뒷산응봉에안장하다. △선조 3년(1570) 경오 9월 수직(壽職)으로 형 조참판에 올랐고, 돌아가신 뒤에는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아드님 수모재(守慕齋) 적 공이 선 생의묘비를세우다. 명동서사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 있으 며, 철종8년(1857년) 건립하여 이듬해부터 사림 들의 뜻을 모은 공론으로 제향(祭享)을 올렸다.1 862년 명동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고종 5년(186 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다행히 선생의 11세손 성균진사 박기우 공(公)의 노력으로 건물이 손상되지 않고 오늘까 지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 역사상 드문 일이다. 서 원의 승격은 안동의 도산서원 유림들의 통문이 절대적이어서통문을실어본다. [도산통문] 이 통문은 무오년(1858)에 명동에 입사(立祠) 된 지 5년 뒤에 사림에서 존봉하려는 뜻으로이통문이있게되었다. 아래의 통문으로 두루 알립니다. 엎드려 생각 하건대, 사당을 세워 현인을 제사함은 도 있는 사 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며, 사당에서 서원으로 승 격하는 것은 존경하기 사람을 숭배하려 하는 것 이다. 조심스럽게 생각하건대 우리 박공 병재 선 생은 중종 명종의 성대하고 밝안 때와 수사의 도 학 다시 천명되던 운 때를 맞이하여 청송(성수 침)가문과 자주 학문을 강론하시고 회재 및 퇴 계 선생과도 서신 왕래를 통하여 의를 더욱 도 탑게 하셨으며,또 탄수·우계·남명·삼족당 제선 생과 학문을 토론하고 강마하여 우리 유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으로는 소요 성와 두 형님들 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가정의 명성을 천양하시 어 동남지방의 거유가 되셨으니 얼마나 장하십 니까! 예컨대 경(敬)으로써 몸을 조신하여 흙으 로 빚은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것은 선생의 학문 이요. 부모님을 지성으로 섬기어 눈 속에서 꿩 이 날아들게 한 것은 선생의 효도였습니다. 산 림 속에서 팔짱만 끼고 않았네(林間袖手坐看 川,병재 선생이 정언 벼슬을 내린다는 중종의 비 망 기 를 읽 고 지 은 시 )라 고 시 를 읊 음 은 선 생 이 세상에 나가고 물러가는 법도였으며, 봄바람도 알았다는 시구(春風應解至孝貞, 삼족당 김대유 가 선생의 여막에 조문하러 와 지은시)는 선생의 여묘생활이었습니다. 그 외 에 법 이 되 고 스 승 이 될 만 한 가 언 과 선 생 또한 어느 것인들 백세토록 의심 없는 바른 논리가 아님이 있으리요 마는 한스럽게도 세상 의 교화가 점차 미약해지고 유풍도 점차 떨어져 서 선생이 작고하신지 삼백년이 지났으나 아직 까지도 선생을 공경하는 의식을 계약할 기회가 없었으니 무른 둥근 갓을 쓰고 네모진 옷깃을 입는 사람이라면 누가 억울한 마음을 간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선생의 덕망이 이미 오랜 세월동안 이어지고 사림들의 공의(公議)가 한 결같이 뭉치어 수석이 아름답 고 선생의 자취가 깃든 귀일원의 빈터에 새로운 묘원(廟院)을 건립하였으니 이는 단지 후손들 의 근본에 보답하는 터전이 마련되었을 뿐만 아 니라 많은 선비들이 장려되어 진작되며 보고 듣 고 깨닫는 데는 더욱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 까? 저희들의 미미한 말 한 마디야 옥을 다듬는 돌 이나 쇠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지는 못하지만 인륜과 본성은 누구나 같으니 자연 소문을 들으 면 감격함이 이와 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원하옵 건대 여러 존위께서는 도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숭배하는 뜻을 준수하요 하루속 히 성대한 일을 착수한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 하겠습니다. 임술년(1862) 정월 초 오일 도산서 원상유사유학이조순외제현 병재선생은 타고난 효자이면서 형제간에 우애 가 돈독하였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병재집에 보면 한시 작품으로 오언절구가 5제 5수, 오언율 시가 6제 6수,오언고시가 1제 1수,칠언절구가 17 제 18수,칠언율시가 3제 4수 등 모두 32제 34수가 실려 전해진다. 선생의 시 세계는 유람(遊覽)이 나 유상(遊賞,자연 속에 놀고 풍경을 사랑함)의 시세계를 표현한 작품이 많다. 이는 연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생은 파주의 성수침을 비롯 노량 진의 사육신 등 전국의 큰 선비를 찾아 학문을 나 누었고, 유서 깊은 곳을 찾아서는 선현의 정신을 기렸다. 이에 선생의 삶이 더욱 빛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명동서사와병재박하징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선원세계 명동서사,경북청도군이서면수야리. 위 유정,병재선생과아들수모재공이여러군자와시를읊고강론하던곳. 선생의 생애 병재선생의증직교지, 가선대부호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 총관. 병재선생 문집 목판. 병재선생연보(甁齋先生年譜) 명동서사(明洞書社)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