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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3월31일 목요일 11 (제183호) 독자마당 대통령 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 다. 어떤 사람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 은 없 을 것 입니 다. 생 각해 보면 쉬운 일 이 면서도 참으로 어려운일입니다.열길 물 속이야알아볼 수있으나한 길사람 속은 알아보기 어렵다는 속담처럼, 사람 알아 보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는 방법을 하나 찾아내야 합니다. 고전 (古典)으 로 돌아 가 공자 같 은 성인 에게 물어보거나, 다산 같은 현인에게 물어보 는수밖에없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공자에게 물었습니 다. “덕으로써 원수를 갚으면 어떤가요?” 공자가 곧바로 “덕은 무엇으로 갚을 것인 가? 곧음으로 원수를 갚고 덕은 덕으로 갚 아야 한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 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 「憲問」)라고 공 자가답했습니다.원수를덕으로갚을수없 는인간의일을공자가말한것입니다.하느 님의 뜻을 전한 예수의 뷺원수를 사랑하라 뷻와는 다르게, 인간은 원수를 덕으로야 갚 을수없지만원수로갚지는말고공평무사 한곧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진리를 설파해 주었습니다. 인간의 일이 정치인데, 새로 정권을 잡으면 앞 정권의 부정부패(적폐) 를 가차없이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것 은원수는곧음으로갚는것이아니라원수 로 갚겠다는 의미와 큰 차이가 없으니, 이 는 정치보복으로 대중의 감정을 선도하겠 다는의도라는생각이듭니다.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시절에 강진의 이웃 고을인 영암군수가 정치지도 자가지닐덕목을물었던때가있습니다.그 때 다산은 지도자라면 맨 먼저 ‘하늘을 두 려워하고 (畏天), 백성을 두려워하라(畏 民)’고했습니다.참으로쉬울것같은이야 기이지만,행하려면쉽지가않은일이그것 입니다.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 하는일을달리표현하면하늘을속이지말 고(勿欺天)백성을속이지말라(勿欺民)는 말과통합니다.지금선거판에는하늘도국 민도두려운줄을모르고하늘과국민을속 이는막말이세상에가득합니다. 상대후보가속한정당에대해전혀사실 이 아닌 이야기를 과장되게 부풀려 거리낌 없이쏟아내하늘과 국민을 정말로 속이고 있습니다. ‘좌파혁명이론을 공유했다’. ‘전 체주의 정당’으로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 의 파시즘,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라는막말로국민과하늘을속이고있 습니다. ‘약탈 정당’, ‘무식한 삼류 바보’라 는등의거친막말로자신 의지지자의지를 강화시키는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공자 와다산이경계한일에마음을기울이지않 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거판, 이제 우리가선택할대상은누구일까요? 공자의 말씀은 어렵다 해도, 200년 전 다산의 말씀은 노력하면 지킬 수 있는 내용이니,국민과하늘을두려워하고 속 여먹지 않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래도 선택하기가 어렵다면 어떤 지도자들이 훌륭하고 어 떻게 해야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가를 가 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준 다산의 저서 『목민심서』를 읽어야 합니다.경제 를 알고 사람을 제대로 등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훌륭한지도자가 되고,공렴 (公廉)이라는 두 글자, 즉 공정하고 청 렴한 지도자라야만 백성을 살리고 나라 를 건 지는 지도 자가 될 수 있다 는 것 이 목 민심서의 내용입니다. 선거에서 절대적 우위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가 청렴했던가를 따져 비교우위로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 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고를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의고뇌가거기에있습니다. 최고지도자가갖출덕목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우리는 나이드신 분들이 수명을 다하 시면 죽었다는 말 대신에 ‘돌아가셨다’ 고 한다. 이는 곧 죽으면 당초에 왔던 곳 인 하늘로 다시 간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육신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영 혼이 몸속에 들어오고,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몸에서 나가 저쪽 세상에 가서 존재한다고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수명이 다하면 자기가 온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죽게 되리란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자기가 죽 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육신은 죽으 면 소멸하지만, 영혼은 육신이 없어도 존 재한다. 영혼은 그 자체의 실체를 존속시 킬수있는능력을갖고있다.그러나영혼 이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육신 이 있 어야 한 다. 육 신이 없 는 영혼 은 그 어 떠한 성과도 만들지 못한다. 육신은 영혼 이 구체적인 성과를 내게 하는 기반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몸이 살아 있을 때,즉 영혼이활동기반인육신을갖고있을때구 체적인성과를내도록열심히사랑을실천 하면서살아야할필요가있다.그러나육체 적으로생명이이어지고있다고해서삶을 살고있다고할수는없다.생을살아간다고 말하려면 하루하루가 의미 있는 삶이어야 태어난보람이있기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과 관련하여 ‘살고 있는 삶과 죽어가는 삶’에 대해 구별할 필요 가 있다.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육체 적인 생명만이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발 전하고있는삶이고,‘죽어가는삶’이라는 것 은 단 순히 먹 고 살 며 생 명만 을 유 지하 고 있기에 영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거 나 퇴보하는 삶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까?당연히영적으로,정신적으로발전하 는 삶을 살 아야 ‘나는 살고 있 다’라고 말 할 수 있다.정신적으로 발전이없거나 타 락하고 있거나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으 면이는육신이호흡만할뿐이고,정신과 사 고는 죽 은 상태 나 다름 없다 . 이제 살아가는 방식 두 가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나이와 관계없다. 첫째는 떠밀려 가는 소극적인 삶이다. 과거에 매달려 살며, 매사 회피하고, 새 로운 일은 부정적으로 대한다. 자기의 시각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면서 타인 의 시각으로 살아간다. 남들은 관심도 없는데 스스로는 남을 의식해 괜히 콤플 렉스를 만들고 괴로워하기도 한다.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이 마치 어렸을 때 가슴에 큰 상처를 갖고 사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 중심의 삶으로서, 정신적으로는 퇴보하는 삶이 다. 삶의 의미를 체념하고 살기 때문에 정신질환에도 노출되고, 고정관념으로 자기를 꽉닫아 스스로 고통을만들기도 한다. 육신이 원하는 물질적 욕구와 적 당주의를 즐긴다. 황금 같은 인생을 낭 비하고 있는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돈 안되는 일을 싫어하고 새로운 일을 싫어하는 퇴 직자들에게서 많 이 나타나지만, 성격이 소극적인 사람들 에 게서 도 많이 볼 수 있 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삶이다. 주도적으 로 일 을 찾 고 도 전하 고 만 들어 가는 사람 들이다. 성취동기를 느끼는 정신 중심의 삶이다.나이가 많건 적건 개의치 않고 사 람들에게 쓰이다 간다는 생각에서 자기 를 활 짝 열 고 새 로운 것을 계속 받아 들인 다.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실천한다. 이런 사람 들은 자기의 뒷모습을 돌아보면서 스스 로를 혁신하고, 하찮은 일에도 정성을 다 한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침묵을 즐 기며 따뜻한 가슴으로 남과 더불어 산다. 사람들 간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감정 이 서로 흐르는 공감을 느낀다. 삶의 과정 에서행복을크게느끼며항상감사하는마 음으로산다.정신적으로건강한삶이고영 적으로발전하는삶이다.이런사람은영성 이높아지기에영혼의역량도커진다. 젊을 때는 육신의 건강이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신적 건강이 중요하다. 정신적 건강은 영적으로 발전하는 삶을 살아야 가능하다. 나이 들수록 나이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래야 쓰이다 갈 수 있고,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면 영성도충만해진다. 삶과죽음,살아있다고살고있는것이아니다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이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진천 (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 祥)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조가 복 계(覆啓)하였는데,그 8대조 박승종 (朴承宗) 및 그 아들 박자흥(朴自 興)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 (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 를, ‘박승종은 혼조(昏朝)의 고굉지 신(股肱之臣)이자 폐부(肺腑)와 같 은 인척으로서 16년을 지냈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이의를 제기하여 잘못이 없는 곳으 로 임금을 인도하였다면, 실로 생사 를 함 께 하 여 다 른 것 은 생 각 하 지 않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기강 이 무너지고 사라진 때를 당하여 한 마디 말이라도 내어 천지의 경상(經 常)을 지킨 일이 있었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혼조를 위해 죽음을 택 한 것은 당시를 두루 살펴보아도 앞 에는 박승종 부자가, 뒤에는 유몽인 (柳夢寅)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몽 인은 오래전에 이미 신원되는 조치 를 입었으나, 박승종의 경우에는 답 답함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치란(治 亂)에 관계하지 않고 신하된 도리는 목숨을 바치는 데 있습니다. 지금 븮절의를 다했다[盡節]븯는 기준을 박 승종에 갖다 댄다면 아마도 적절한 것이 아니겠지만, 필부(匹夫)의 조 그마한 신의로 박승종을 단정한다 면 또한 알맞은 논의가 아닐 듯합니 다. 더구나 정묘조(正廟朝)께서 전 후로 내린 판부(判付)가 분명히 갖 추 어 져 있 고 선 배 명 현 들 이 지 은 글 에도 충분히 근거할 만한 점이 있으 니, 지금 그 죄안을 살펴 박승종 부 자의 관직을 회복시키는 것은 원통 함을 풀어주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 습니다. 다만 시일이 오래된 사안이 라 신 이 마 음 대 로 판 단 할 바 가 아 니 니 , 다 시 널 리 묻 도 록 하 는 것 이 진 실로 살피고 신중히 하는 도리에 합 당합니다.’하였습니다.상께서 재결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생사의 경계에서 사람 을 논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이 사람이 죽음을 결단한 일은 제 자리 를 얻 어 죽 은 경 우 라 하 지 않 을 수 있겠는가. 정묘께서 내리신 판부가 존재하고 선현들의 논의가 곧 공안 (公 案 )이 니 , 지 금 어 찌 굳 이 다 시 물 을 것이있겠는가.박승종부자의관 작을 특별히 회복하도록 하라.” 하 였다. [원문] 吏曹啓言: “忠淸道鎭川幼 學朴準祥上言, 臣曹覆啓, 而其八世 祖承宗及其子自興復官爵事,議于大 臣處之事, 允下矣. 右議政趙斗淳以 爲: ‘朴承宗受股肱之托, 處肺腑之 親,十有六載矣.苟有匡拂違覆,納君 於無過, 則固當生死以之, 他不暇計. 而當倫綱뜯滅之際,其能出片言發單 辭, 以守天地之經常乎? -원문 생략 - 『일 성 록 (日 省 錄 )』 철 종 8 년 6 월 9 일 [해설]븮조선 시대 상언(上言)븯격 쟁(擊錚)은 개인적 억울함을 지닌 일반 백성들이 조정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서 역할하여, 신원븡 추숭븡사면 같은 숱한 바람들이 이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러한 요청의 수용 여부에 따라 과거 에 내려졌던 하나의 판단이 후대에 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귀결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의 박승종(朴承宗,1562 ~1623)은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 의 딸이 광해군(光海君)의 세자빈 이 되면서 왕실의 인척이 된 인물이 다.이후 그는 밀창부원군(密昌府院 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까지 오르 는등당대최고의지위를점유하여, 이이첨(李爾瞻)븡유희분(柳希奮)과 함께 광해조의 권신(權臣)을 일컫 는 ‘삼창(三昌)’으로 병칭되기도 하 였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 어나자 군사를 모아 이를 저지하려 시도하였다가, 일이 틀어진 것을 알 고는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였 다. 인조 즉위 후 그는 광해군의 핵 심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관작이 삭 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며, 그 뒤 자연스레 혼군(昏君)의 정사를 방 조한 인물로서 오랜 기간 동안 인식 되었다.물론 그의 행적과 처신에 대 해 재론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정하 게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난정(亂 政)을 방관한 권신(權臣)’이라는 평 가 는 큰 변 화 없 이 조 선 후 기 까 지 이 어졌다. 이와 같은 박승종의 위상에 변화 가 일어난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 르러서였다. 1790년(정조14) 충청 도 청안(淸安)에 살던 박승종의 6 대손 박진덕(朴晉德)이 상언하여, 박승종은 애초에 폐모론(廢母論) 에 동참하지 않았고 반정 시에도 광해군을 향한 자신의 지조를 온전 히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신원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언은 과거에 이미 참 작하여 결정된 공의(公議)가 있다 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 며, 오히려 시일이 오래 지난 사안 을 방자하게 호소하였다는 이유로 박진덕을 감처(勘處)하라는 조치 가 내려졌다. 그러나 박승종에 대한 신원 노력 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충청도 직산(稷山)의 유학 박기복(朴基 復)븡박기덕(朴基德) 등이 1792년 부터 1807년까지 15년 동안 총 6차 례에 걸쳐 상언하여 박승종과 그 아들 박자흥의 복관을 청하였고, 그 다음 세대인 박응진(朴應鎭)도 1824년부터 183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상언에서 이들은 박승종이 애초에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혼란 한 정사를 바라보며 탄식을 거듭하 였고 반정 소식을 듣고는 혼조(昏 朝)에 복무한 노신(老臣)으로서 결연히 죽음을 택하였다는 점을 두 루 언급하면서, 그가 보인 절의의 측면을 한층 크게 부각시켰다. 비 록 ‘삼창’의 일원으로서 광해군의 정사에 일조한 일이 뚜렷하다는 이 유로 이들의 상언 역시 받아들여지 지 않았지만, 사안의 처리를 위해 대신(大臣)의 수의(收議)가 행해 지는 등 이 일이 점차 조정 차원에 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양상을 보이 기도 하였다. 조정의 숱한 반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진 후손들의 하소연 이 결실을 본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1857년(철종8)의 일이었다.이 해에는 박승종의 8세손인 충청도 진 천(鎭川)의 유학 박준상(朴準祥)이 상언을 올렸다.이에 대해 우의정 조 두순(趙斗淳)은, 박승종이 비록 광 해군의 척신(戚臣)이며 당시의 혼 정을 방관한 혐의는 있지만, 군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 하로서의 도리를 지킨 점은 높이 평 가될 만하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유 몽인(柳夢寅)도 광해군을 위해 절 의를 지킨 점이 인정되어 뒤늦게나 마신원된일이있음을언급하며,박 승종 부자에게도 그와 같은 조처가 내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이러한 그의 주장 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박승종 부자 는 사 후 2 3 0 여 년 만 에 생 전 에 그 들 이 지녔던 관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아가 박승종은 1871년(고종8) 조 정으로부터 ‘숙민(肅愍)’이라는 시 호까지 하사받음으로써, ‘광해조 절 신’으로서 확고한 국가적 공인을 얻 을 수 있었다. 혼조의 ‘권신’에서 ‘절 신’으로, 극적인 위상의 변화가 일어 난순간이었다. 이처럼 박승종은 혼조의 조력븡방 관자로서오랜세월동안인식되었으 나, 후손 박진덕부터 박준상까지 3대 에 걸 쳐 이루 어진 67년 간 의 긴 상언 활동끝에마침내광해군절신으로서 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박승종의 사례는, 조상의 명예를 회 복하고자지속적으로힘을기울인그 후손들의 간절함, 광해군과 같은 혼 군에 대해서조차 ‘절신’의 존재를 인 정해 주었 던 조선 후기 의 시 대적 분 위기 , 그 리고 상언 이 지 닌 여 론 조 성 의 힘과 사회적 역할을 아울러 이해 할 수 있 게 해 준다 . 역 사적 사 실의 확 정과 평가는, 때로 그 자체로 주어지 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과 치열한 투 쟁의 과정 을 거친 끝에 비로 소 얻 어 지기도한다. /글쓴이 정용건강원대학교 국어 국문학과BK21사업팀선임연구원 본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메 일링서비스를통해받은것입니다. ●고전산책븣 혼조(昏朝)의권신(權臣)에서절신(節臣)으로 숙민공박승종 우리나라의 근 대문명 도입 이 전의 주업은 농 업이었다. 농업 은 특 성상 정 착 생활을해야하고 인구에비해경지 면적이좁아대부 분 의 농 민은 소농 또는 소작 민(小作民) 이 라 매우 가 난하 게 살 수 밖 에 없었 다. 그렇 게 살 아왔 기 때 문에 수 백 년 이 흘 렀어도 농업사회의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18-19세기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기계문명이 크게 발 달하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이 제일 먼저 이를 받아들여 가만히 있는 우리나 라에 식민지 마수를 뻗어 평화롭게 잠자 던우리전통사회를 정치,군사 사회적으 로 크게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이와같 은사회변천속에일각에서는우리도재빨 리 현대문명을 받아들여 정치, 군사, 사 회를 개혁하고 중국의 사대사상(事大思 想)에서 탈피하여 자주 국가가 되자는 진보적인 개화파가 생기는가 하면, 우리 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래문화를 결사 적으 로 반대 하는 보수 파도 있었 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집정할 때는 쇄국정책 으로 일괄하여 전국요소에 척화비(斥和 碑)를 세 워 이 를 거부 했다 . 특히 대원 군 은 천주교를 배척했는데, 이는 사민평등 (四民平等)과 세계주의 사상인 천주교 는 우리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싸운 병인양요(1 866고종3)미국과 싸운 신미양요(1871 고종8)를 일으켰다. 그러나 밀물처럼 밀려오는 대세는 어찌 할 수 없었다. 이 런 와중에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 할 야 심으로 청일전쟁(1894 고종31) 러일전 쟁(1904 광무8)의 승리로 경쟁국인 청· 러시아의 양대 세력을 몰아내자 한반도 는일본의독무대가되고말았다. 1905년(을사) 일제는 나라의 손발이 요 입이 되는 외교권을 위협으로 강제 로 빼앗고 토지, 광산을 차지했다. 또한 경부선 철도와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전쟁물자 운송 및 우리의 농·광물 차지를 시작했 다. 또한 도로, 전신, 전화, 전기까지 가 설하여 어쩔 수 없이 근대문명 대세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이와 같은 과학문명을 접하자 모두가신기하 게 생각하고 환영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 다.또한 일본이나 유럽을 먼저갔다온 선 각자들 견문담에서 크게 감명 받기도 했 다.그중,개화파의한사람인유길준이188 0년(고종17)일본에건너가신학을배우고 도미하여보스턴대학에서수학한 다음 우 리나라 사람으로는최초로유럽을둘러보 고 1881년(고종21)귀국했다.그러나 그 해 에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등개화 파쿠데타인 갑신정변이 일어나 실패하자 김옥균 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유길준도 정변 가담자로 지목 받아 처형될 뻔 했으 나친구의노력으로무사했다. 유길준은 유럽 견학에서 “서유견문”이 란기행문을썼는데우리역사상국한문혼 용체의 최초 저술이고, 또한 한국 최초의 국어문법인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을 지어 국어 발전의 체계화에 기여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노인네들은철도나기차가 무엇인지도 모르다가 막상기차를타보고 는문명의편리함에감탄하고쇠로된말이 란뜻으로철마(鐵馬)라고불렀다. 1900년(광무 4) 한성전기회사가 설립 되 어 궁 중에 제일 먼 저 전 깃불 을 켰 는데 이를 “도깨비 불”이라고 불렀다.뒤에 전 신우편과 현대적인 신문이 발행되어 이 런 시설 들이 비록 일 제가 우리 강토 를 침 략하기 위한 수단이기는 했지만 우리 생 활이현대문명화된것도사실이다. 우리나라 개발시대에는 여러 곳에 방 직공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아파트가 즐비하다.방직공장에는 작업 복 차림의 여공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 는 실타래 아래서 소음과 코가 막히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고생스럽게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기도 했 다. 그 여공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 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입학하여 밤늦게 까지 학업에 열중했다. 참는 결심이 아 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생이었다. 지 금 소녀들과 비교하면 그 생활은 하늘 과 땅만큼이나 크다. 그 여공학생들은 고생스럽게 노력한 대가로 자신의 학비 는 물론, 고향에 계산 부모님의 농자금 과생활비를송금하기도했다.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생활은 주위로부 터 많은 영향을 받아가면서 살아왔다. 그 래서 인류의 문화는 그 주위의 미치는 대 소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 현 재우리한국의청소년들의생활양상을관 찰해 보면 개인이나 사회나 할 것 없이 자 기 행위의 목적에 관한 뚜렷한 자각으로 생활의결정이나 발전을도모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너무나 게으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지적하지아니할수없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노력과 고생 없이 대성(大成)한 사람은 없다. 이것이 진 리다. 옛날 중국의 진나라 차윤과 손강 은 집이 가난하여 불을 못 켜고 여름은 반딧불, 겨울에는 창밖의 눈빛으로 공 부하여 대성했다하여 형설지공(螢雪之 功)의 고사성어를 남겼다.광복 후 자유 민주주의 수호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 을 사업으로 국가 경제개발이 없었으면 오늘의 산업사회가 어찌 이루어졌겠는 가. 우리 대한민국이 이처럼 산업국가 가 된 과거를 잊어버리고 사는 청소년 들을보면안타까울뿐이다. 한빛의메아리 박 희 학 븣숭덕전前참봉 (38)근대문명사회가되기까지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영일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