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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월31일 월요일 7 (제181호) 기 획 지족당공의 아버지 휘 영( 잦)은 1547년(丁未, 명종2)에 태 어났으며 자(字)는 장원(長源) 호는 광풍리(光風里)이다. 선 조 때 충의로서 봉사와 제용감정을 지내고 사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부인 문화유씨와 의사이에 지족당(휘명부)공과낙여헌(樂汝軒,휘明桂)공을 낳았다. 지족당공의 휘는 명부 자는 여승(汝昇)호는 영치(嶺癡)또 는 지족당(知足堂)으로 1571년(辛未, 선조4)에 태어났다. 일 찍이 한강 정구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중용 대학을 탐구하 였고, 예설의 의(疑)를 논하였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 여 지주(知州,군수)외 여러 고을의 부사를 거쳐 가의대부로 서 예조참판, 한성부좌윤 동지의금부사, 도승지 겸 종부시 제 독제조, 형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및 충청도관찰사를 역 임하였다. 1605년에 선무훈(원종공신)에 책록 되고 평소 난지(難地) 의 소임이 많았으나 그때마다 치적이 뛰어나 인조께서 이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소시에 등과하여 명성이 일찍이 청운(벼 슬)에나타났고중년에는조용히살면서굳은절개를백수(白 首)가 되도록 불개(不改)하니 마치 연꽃이 더러운 곳에서 살 되 오염(汚染)되지 아니하고 옥(玉)이산 속에 묻혔으되 광채 (光 彩 )를 품 고 있 는 것 과 같 아 청 백 ( 淸 白 )하 기 가 진 실 로 한 조각의얼음과같고엄격해서조그마한율(律)도어기지아니 했다.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에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 몽진(蒙塵. 피 난) 할 때 호종하였으며, 청나라와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후일에는 화림동에 돌아와 살면서 종택 위 정(亭)을 짓고 동생 낙여헌(휘 명계)와 같이 일생을 마칠 뜻을 가지고 농월정을 지었으니 정호(亭號)와 원운이 월연암(月淵 散)에 남아있다.그러한뒤 강릉(江陵)의 세태가어지러워지니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강릉도호부사에 취임하였으나 재임 중 서거하시었다.이에 인조께서 제문을 내리시어 “10년 동안 어 지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한 번도 오염되지 아니했고, 일곱고 을(많은고을)거쳤으되집안이빈벽(가난)뿐이며,처자가기 갈(飢渴)을 외쳐도 편안히 염두에 주지 아니했노라” 당세의 세인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1651년(효종2)에 선무원종훈(호 종공신)에추론(推論)되고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경연의금 부 춘추관사 세자좌빈객을 증직하고 윤자(胤子, 아들)에게도 사명(賜名)하였다. 문집이 있고 화천서원에 향사지내니 소산 이광정이향문을지었다. 부인은 정부인 상주김씨이고,동생낙여헌공(휘 명계)의 아 들 이점(爾點)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는데 이점(爾點)은 인 조께서 사명(賜名)한 것으로 자는 인여(仁輿) 호는 영은(嶺 隱) 또는 양한당(養閒堂)이다. 음(蔭)으로 제용감 봉사에 제 수되었으나나아가지아니했다. 양한당공은 부인 영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 후기(厚基)·세 기(世基)·태기(泰基)·형기(亨基)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후기(厚基)의 셋째 아들 태민(泰敏)의 호는 회곡(晦谷)으로 효성이 지극하여정려(旌閭)가내려졌다.성품이숭고하여스 스로 명나라를 숭상하는 백성이라고 하니 세상에서 명나라 의사(義士)라고 칭송하며 관(官)에서는 포상(褒賞)하여 조 봉대부동몽교관을증했으며성재허전이서문을지으셨다.그 의 아들 태현(台鉉) 또한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고, 어버지 의 뜻에 따라 명나라를 숭상한다 했다. 동몽교관에 증직되었 다. 손자 한조(漢朝)는 증 통훈대부 군자감정이고, 해조(海 朝)는효행이뛰어났으나불행히도일찍돌아가셨다. 차남 세기(世基)는 아버지 양한당공의 생부 낙여헌공의 사 손(嗣孫)으로 대를 이었고, 넷째 태기(泰基)의 호는 죽헌(竹 軒)으로 현손 지응(之膺)은 영릉참봉이다. 타고난 효자로 상 을 당해 풍우한서(風雨寒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한 예 를 다해 세인이 말하기를 천지신명이 감동했다 하였다. 넷째 형기(亨基)는 判官이다. 이밖에도 양한당(휘 이점)의 후손들은 타고난 효자가 많고 가학(家學)을잇고선현을현창하는일에매진하고있어함양 지역에서명가의대를잇고있다. 삼오정공파는 순무어사공의 아우 완가정공(휘 승숙)의 아 들 삼형제중 차남으로 휘는 덕총(德聰)자는 자민(子敏)호는 삼오정(三五亭)이다.퇴계문하에서 학문을닦으신공은덕고 망중(德高望重)한 선비이다. 선고 완가정공이 기묘·을사 양 사화에 연좌되어 80평생 중 54년간의 장구한 유적생활을 한 탄하시어 과업을 일찍이 접고 오직 향리에서 도학 강명과 성 리학 연구에 매진하던 중 학행으로 사람의 거듭되는 추중을 받아 장사랑 훈도에 천거되어 황해곡산 훈도를 지냈다. 삼강 오상에 상응하여 세 그루의 회화나무와 다섯 그루의 버드나 무를 수식하고 그 옆에 집을 지어 삼오정이라 이름하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강촌생활을 하는 동안 회화나무와 버드나무 를 손수 심었노라. 그때 이미 마음속에 인간의 존귀함을 간직 하였고. 아울러서 만물 외에도 현묘하고 신기함을 품었노라 공은 하늘이 반드시 보답할진대 부질없는 즐거움을 어찌 바 라랴,이런 점을 모아 꼭 취향으로 삼고저하네.그대는 아는가 달려온뜻을븣’ 첨모당 임운(1517~1571)과는 같은 퇴계문인으로 도의로서 사귀면서 서로 화답한 많은 시율을 남겼다. 치사(致仕) 후에 는 명신재를 이루시어 향학 진흥과 향풍 순화에 진췌하셨으 며사후에하남사에봉향되었다. 공의 5대손 태화(台和)는 성품이 너그러워 도량이 넓고 커 착한일 하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유덕군자(有德君子)라 하 였다. 마을 뒤편에 서당을 지어 무이재(武夷齋)라하고 또한 자호(自號)하였다. 아들 시조(蓍朝)의 호는 풍천(豊泉)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매사에 절도가 분명하였으며 향학강성(鄕 學降盛)에 힘썼다. 노년에 사율(詞律)을 즐기시어 문집1권이 전해지고 통정대부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지희(之羲)는 꿈에 아우재(牙虞齋)라는 호를 얻어 호를 삼았다. 문장과 품격 있 는 시가(詩歌)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가 뛰어나 해 (楷) 전(篆)을 잘 써 원근에서 글씨를 얻고자 하는 이가 많았 다. 못을 파고 집을 지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저 높은 무이산 기운을 끌어서 생명과 덕(德·水)을 마시니 샘소리 졸졸하고 삼칸집에서풍월(風月)을읊으며술을대하니울타리둘레는 매화와 송죽이 애워쌌노라’하였다. 본시 정하여 분수를 지키 며평생을 스스로 현오(玄奧)한 진리를 기르는데 만족하였다. 매사에종용(從容)하고벗끼리모이면신의를논하고도를강 (講)하며항상자손에게가르치기를글읽기에부지런하고농 사에 힘쓰라 하였다.만년에 마을입구 구태(丘台)에 정(亭)을 짓고손수나무를심고자질(子姪)들을데려다가학문을강마 (講磨)하였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강목정(講木亭)이라 했다.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 세상을 멀리하고 임천(林泉)을 벗하 면서한가로이시와술로보냈다.수권의시문집을이루었다. 삼오정공의 12세손 화기(華箕,子順敬)는 참봉을 지냈다.3 5세 되던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조약 체결로 인한 울연(鬱 然)한 심경을 이기지 못해 주일(誅日)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 칠 것을 하늘과 땅에 그리고 조상에 맹세하고 월성 초당에서 동지들과 창의(倡義) 궐기(蹶起)하니 이른바 월성의병이다. 아장(亞將)으로 두 계씨(季氏, 남동생)인 수기(洙箕)·민기 (珉箕)와 더불어 장수전투와 무주 고창골 전투, 구천동전투 에서 혁혁한 전과(戰果)를 거뒀으나 1908년 무신 10월 4일에 전북 장수군 계북 전투에서 계씨 수기 및 동지들과 장열이 순 의(殉義)하셨다. 삼우정공의 13대손 상길(相吉)은 국회의원, 상윤은 육군사 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장군, 상윤은(相潤) 국립암센타 박 사, 14대손 동량(東亮)은 팔만대장경을 전산화하는데 기여하 여국민훈장을수여받았다.동진(적명갑동)은공직에서 퇴임 후최근각종서예전에서두각을보이며종사에매진한다. 부사공파는 삼오정공의 동생 덕신(德新)으로 문과에 올라 영월부사를 지내 후손들은 부사공파라 세계를 이룬다. 부인 진양정씨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 중부 순무어사공의 장남 덕성의 차자 해(海)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계자(系子) 해 (海)의 자(字)는 중함(仲涵)으로 생원시에 올라 장흥부사를 지내고경상우병사에승진되었다.이사실이장흥읍지에전해 진다. 그의 아들 계문(啓文)의 字는 치명(致明) 호는 이위당 (二位堂)으로 증 통훈대부 군자감정이고 손자 경립(景立)은 증 공조참의이다.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인적(仁績)·인석(仁 錫)이다. 장자 인적(仁績)의 호는 경와(敬窩) 취수당(醉睡堂)과 도 의지교하였으며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차자 인석은 무후이 다. 경와공 휘 인적의 아들 세장(世章)은 가선(嘉善)에 오르 고 표충사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만광(萬光)은 통덕랑 이고, 증손 성영(聖永)은 인품이 호걸하고 매사에 아는 것이 많고민첩하여세인이모두중히여기고공경하였다. 부사공의 10대손 기영(基榮) 字는 여홍(汝洪) 호는 지오 (遲寤)인데 조정의 부름을 받고 백의(白衣)로 입시(入侍)하 여 초임으로 수봉관(守奉官, 종9품 참봉)이다. 충숙공 민겸호 가 공의 담론(談論)을 듣고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로 중원에 태어났으면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리라고 하였다. 봉사, 직장, 부사과를 거쳐 선략장군에 올랐으며, 만수향 20봉, 인삼 20근 비단20필을 하사받았다. 공의 아들 희준은 무과에 올라 부장 이다. 지오공의 동생 재영(載榮)의 호는 만오(晩寤) 충훈부 도사이고 그의 아들 희태(熙泰)의 초휘는 승진(承鎭)으로 18 86년 무과에 올라 효력부위 수문장으로 부자의 교첩(敎牒)이 정숙재에 보관하여 전해진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중암 김평 묵(1819-1891)선생을 지도 적소(謫所, 유배지)를 찾아 배알 하여 수학하고 영향(影響)을 받아 후학을 계도(啓導)하였다. 위계철,문규태와함께읍지를편찬하였다.공의아들민교(敏 敎) 가훈을 이어받아 학문이 뛰어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손자종화(鍾和)는치산치수등지역개발에사재를바쳐산림 녹화를 이루었으며,국고사업으로 진행중인 저수지 축조공사 가 중단되어 논 12두락을 팔아 대신 공사를 마무리하여 수리 안전답으로 바꾸어 지역발전에 공이 지대하여 몽리(蒙利) 주 민들이공적비를세워칭송하고있다. 진사공파는 순무어사공의 셋째 동생 휘 승서(承緖) 공으로 인해 문호가 열린다. 호는 은와(隱窩)이고, 성균진사이다. 공 의 아들은 덕평(德坪)이고 손자 근남(瑾楠)의 호는 우란(友 蘭)으로 증 가선대부 예조참의이다. 근종(瑾從)의 호는 우송 (友松)으로증자헌대부중추부사이다. 우란(友蘭)·우송(友松)형제분의 우애가 아주 돈독하여 그 냄새가 난초 같고 무성함이 솔과 같아 여러 후손과 선비들이 여러 번 표창 할 공의를 여러 조정에 알렸으나 정려와 시호를 받지 못해 사림들의 아쉬움을 더했다. 동생 우송공은 옛 증직 에다 고종 임인(1902년)에 가선대부 장례원경을 더하고 후손 들이 정성을 다해 기초를 다듬고 건축한 이우재에 우란·우송 형제분을배향하여향화를받들고있다. 우송공(휘 근종)의 11대손 상환(相煥)의 字 는 덕윤(德閏) 호는 화중(和中,1887~1952)으로 통정대부 중추원의관에 오 르고 한일합병이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후진 훈도에 매 진하였는가 하면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일 본으로 건너가 간도의 배일단체(排日團體)인 간민교육회(墾 民敎育會)를 결성 활동하는 등 평생 우국충정의 삶을 살고 19 52년영면했다. 참의공파는 전객령공의 손자 양심정공 휘 윤리(允利)의 셋 째 휘 계동(繼東)을 파조로 하고 있다. 공은 진위장군 수의부 사를지내고병조참의에증직되었다.숙부인문화유씨와의사 이에자영(自榮)·의번(義蕃)형제를두었다. 장자자영(自榮)은진사시에 올라흥해군수를 지냈고,아들 인(仁)이 우문·우장·우간·우시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우 문(友文)의 후손들은 종중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인지 누보가 되었고, 차남 우장의 맏아들 응성(應星)은 동지중추에 올랐 으나 역시 후손들을 찾을 길 없다. 우장의 차남 치성(致星)은 충장위로 가선(嘉善)이고 그의 아들 영립이 가선대부 중추부 사에올랐다. 참의공의 차남 의번(義蕃)의 호는 상의(尙義),현신교위 선 략장군이고 아들 기석(起碩)은 어모장군으로 아들 문우(文 佑)·문부(文富)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문우(文佑)는 인수(仁 秀)·인상(仁尙) 형제를 두었는데 인수(仁秀)는 훈련원주부 이고 아들 여남·여경·여생을 두었는데 장남 여남과 셋째 여생 은 무후이고 둘재 여경은 거제 만호, 통훈대부 행 연일현감을 지냈다. 차남 문부(文富)의 字는 극달(極達) 호는 운곡(雲谷) 또는 삼우당(三憂堂)으로 1563년(癸亥, 명종18)에 태어났다. 삼종 질 지족당(휘 명부)과 한강 정구 문하에서 사사(師事) 하였 고, 1582년(선조15) 무과로 선전관 제포첨사, 1589년 조정에 들어가 사복시첨정이 되었으나 중봉 조헌 선생이 항소하였으 나 공은 철인의 언로가 막히는 것을 보고 분개(憤慨)하여 기 관(棄官, 벼슬을 버리고)하여 1591년 향리에 돌아와 운천재 (雲泉齋)를 축실하여 매일 무사(武事)를 강론하면서 불안한 상황의 극복방안, 문무인의 마음가짐의 각성을 촉구하다가 1 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왜병이 한성을 핍박하므로 임금이 근왕(勤王)의명을내렸을때체찰사이원익과초유사김성일 의 군문을 따라 대가파천에 시종일관 피곤함을 나타내지 않 고 묵묵히 호종하였으며 환도 후 의병창의에도 참여하여 많 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삼등에 녹훈되고 이성 현감에 올랐 으며,운곡유집(雲谷遺集)이있고운천서원에봉향되었다. 숙부인 월성최씨와의 사이에 천욱(天郁)·지욱(地郁)·현욱 (玄郁)·황욱(黃郁)등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천욱(天郁)의 호는 고천(孤川)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차남 지욱(地郁)은 학생(學生),삼남현욱(玄郁)의 호는 고산(孤山)충익위 통례 원인의와첨사를지냈는데청백함이뛰어나비(碑)가세워졌 고, 숙계(肅啓,편지)가 전해지고 통정대부 한성부윤에 증직 되었다. 고산공의 현손 상경(尙敬)의 호는 무욕재(無辱齋)이 다. 1730년에 태어난 공은 충(忠)과 효(孝)를 실천하였고, 타 고난 천성이 순진하고 꾸밈이 없었다. 분수를 지키며 주경야 독하였으나 문달(聞達)을 구(求)하지 않으니 향인(鄕人)들 이공을칭송하여무욕재(無辱齋)라하였다. 참의공의 13대손 주용은 숭덕전 참봉이고, 그의 아들 동진 은 부장검사이다. 14대손 헌수는 예비역해군소장(행정학박 사),15대손 보환은 제18대 국회의원·국립공원 관리공단이사 장이다. 그의 숙부 동술은 대구 성동의원 원장으로 종중의 크 고작은일에헌성하는등종사에남다른열정을보여준다. 좌승지공파는 전객령 공의 아들 부(敷)의 사남 윤정(允貞) 공으로부터 세계를 이룬다. 공은 145 5년(乙亥, 단종3)에 태어 나 통정대부 승정원좌승 지 겸 경연참찬을 지냈 다. 공의 아들 용봉(龍 鳳)은 유일(遺逸)로 예 빈시정이고, 손자 원인 (元璘)은학생이다. 좌승지공파는 좌승지 공 이 하 9 대 휘 충 (忠 )에 이르기까지 독자로 이어 지면서 번성하지 못했으 나 휘 충 ( 忠 ) 公 께 서 아 들 태용(台龍)·태달(台 達) 형제를 두면서 번성 하기에이른다. 장자 태용(台龍)은 일 조(逸朝)·만조(萬朝)·녹 조(祿朝)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일조는 통정대부 호조참의 차남 만조(萬朝)는 통정 셋째 녹조(祿朝)는 통정대부 예조참 의에각각증직되었다. 통정 만조(萬朝)의 5대손 상종(相宗)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각별(各別)히 지극하여 칭송이 자자하고, 셋째 예조참의 녹 조(祿朝)의 현손 래기(來箕)의 호는 청호(淸湖) 통훈대부 춘 추관 편수관을 지냈고, 13대손 규현(奎賢)의 호(號)는 만송 (晩松)으로타고난효자이다.손수능금나무를심어어머니에 게 사시사철 봉양하고 모친상에 3년을 시묘하니 호랑이도 함 께 도왔다. 모부인 사망후 능금나무도 고사하고, 7년 후 공이 세상을 뜨니 지역 주민들이 효우와 문학을 높이 찬양하니 군 도(郡道)가모두정려(旌閭)를세워찬양했다. 14대손 경호(庚鎬)의 호는 원방(元邦) 인데 2세에 아버지 를 잃고 5세에 큰 화재로 가산이 소실되어 재기 불능하여 어 머 니 와 중 형 을 따 라 고 향 을 떠 나 서 울 로 간 후 평 양 황 해 도 신 천 사리원 등지를 떠돌며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해방과 6븡25 를 겪고 1947년 3·8선을 넘어 서울에 안착 후 특유의 부지런함 으로자수성가하여 귀곡의 영모재·추원재를 비롯종중사업에 헌성하고 마천의 수덕재 창건 비용 전액을 헌성하는 등 종중 에 크게 기여하였고, 마천면에 20억원의 장학기금을 기탁 불 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등 지역사회 발전 에도지대한공을세웠다. 전객령공의 아버지 은산부원군이 경남 밀양군 부북면에 세 거하였고, 정객령과 그의 아들 농암공 또한 대대로 창녕에 세 거지를 두었다. 이후 농암공의 아들 양심정(휘 윤리)공이 창 녕 영산에서 진주시 집현면으로 세거지를 옮겼는데 아마도 공이 점필재 문인으로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고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옥구현령과 병마절제사를 지낸 후 산수 수 려한곳으로세거지를옮겨안빈낙도한것이아닌가싶다. 그리고 양심정공의증손 덕순(德純)공이 일찍이 부모를 잃 고 어린 나이에 진주로부터 성주 윤동으로 세거지를 옮겨 순 천박씨 종사랑 위 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가가 있는 이곳 윤동에 세거지를 이루게 되어 순무어사공의 후예들은 성주 를 근거지로 인근의 고령으로 이거해 가면서 각각 집성촌을 이루고있다. 순무어사공의 아우 완가정(휘 승숙)공은 진주에서 함양군 안의면으로 이거하여 지족당공의 후손들은 안의면 성북에 집 성촌을 이루고 삼오정공은 거창군 북상면 황점을 거쳐 안의 면 미암마을(갈마실)에 세거하면서 지족당공과 삼오정공의 후손들은 안의면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부사 공(휘덕신)의후손들은전남장흥에세거한다. 입향 유래를 보면 진주에 거주하던 전객령공의 7세손 휘 해 (海)께서 장흥부사로 부임하여 경상우병사로 이임했다. 그리 고 그 의 아 들 이 오 당 (휘 계 문 ) 공 이 임 진 란 시 수 성 감 사 김 성 의 천거로 수사가 되어 수많은 적을 참살하였으나 최경회·김 덕령 등이 억울하게 죽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고, 김응회 등 과 산수를 유람하다 호남 장흥 장서방 종정에 시거하게 되었 다.그러나7세손휘이덕(履德)에이르러우환으로장흥관산 읍 학정으로 이거하였으며, 손자 휘 재영은 1879년 록봉 아래 안텟골이 있어 후손이 번창 할 자리라 하여 샛터를 잡아 녹동 (鹿洞)이라칭하고있다.녹동은장흥군용산면이다. 성균진사공파(휘 승서)는 중형 완가정공이 안의로 이거할 때잠시거창군남상면월평리 머물다손자근남·근종 형제분 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안의면 초동리로 이거하였다. 그 근거 는파보에진사공과아들(휘덕봉)의묘소가거창군남상면에 있고이후손자대에이르러묘소가안의에있어짐작해본다. 참의공파는참의공장자자영은진주에서고경으로옮겼고, 차남 휘 의번이 진주에서 경북 청도로 세거지를 옮겨 청도 금 천면길부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좌승지공(휘 윤정)의 묘소는 진주 집현면에 있고 그의 아들 용봉의 묘는 안의면 귀곡에 있어 이 또한 완가정공이 안의로 이거하면서귀곡리에정착하였다. 이후 공의 13대손 월현공 이현은 지곡면 보각리에서 어린 다섯 손자를 이끌고 함양군 마천면 음정마을에 이거하여 지 금에이른다. 뱚▶6면에서이어짐 종담서당-함양군농월정길9-5(안의면)지족당공이 후학을가르치던곳 △삼오정공파(三五亭公派) 삼오정-안의면 율림(박정히 대통령 친필 편액) 삼강오상에 상응하여 세 그루의회화나무와다섯그루의 버드나무를수식하고그 옆에집을 지어 삼오정이라했다. △부사공파(府使公派) 정숙재-전남장흥군용산면녹동길26 도사만오공재사,享4월첫일요일 △진사공파(進士公派) 경인재-안의면초동리 통정대부 중추원의관 박상환의재사 이우재-안의면초동리 우란(友蘭)·우송(友松)두형제분을모시는재사이다. △참의공파(參議公派) 운천서원-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길부마을, 운곡공 박문부와 공의 5대손 무욕재박상경을배향하고있다. △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 영모재-안의면귀곡리 좌승지공의아들휘용봉을비롯한 선조재사이다. 추원재-안의면귀곡리 좌승지공의 9대 휘충의 차자 태달의 후 예재사이다. 수덕재-마천면음정마을 좌승지공의 13대손 월현공(휘 이현) 이 하 재사이다. 세거지변천및 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