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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2월31일 금요일 6 (제180호) 기획 1398년(정종 원년) 창건한 창평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단은 좁은 부지에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독특한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으며,향교 건축의 전형에 크게 벗어나 있지 있으며,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체계구축,보수사업비의 안정적인 지원 과 효율적인 활용사업 진행 등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가필요하다. 담양군고서면교산리교촌마을뒤에위치한창평항교는13 98년 창건하여 옛 창평현의 구심점이 되어 왔으며, 현재에는 ‘창평향교 은행나무 학교’라는 살아 숨 쉬는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을 통해 활발하게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 인교육기관이다. 좁은입지로인해전형적인향교건축물의배치구조에서벗 어나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와 서재가 ‘□자’ 형으로 배치된 독특한 구조로 보이고 있다. 대성전은 높은 기단위에 전퇴를 두고 화려한 단청과 공포를 갖추었으나 내부는 단순한 목구 조와 백색으로만 이루어져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명륜 당은 뻥 뚫려있는 앞면과 달리 후면은 조망권 확보 기후변화 에 능동적 대처가 가능하도록 판장문을 설치한 독특한 건물 구조를형성하였다. 창평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은 보존상태가 좋으며 건축적 독창성이 뛰어 날 뿐만 아니라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 은 귀중한 자료로서 국가지장문화재(보물)로 승격 지정하여 보존관리함이타당하다고사료됨. 【역사성】 창평향교는 조선시대 창평현에 위치한 교육시 설로 창건은 1398년(邑誌), 즉 14세기다. 당시 조선의 유교화 정책의 하나인 일읍일교(一邑一校) 원칙을 충실히 준수, 600 여년의역사와시대적특성을지니고있다.한편조선후기일 련의 건축사실(중수)를 자세하게 알 수 있 는 현판기(懸板記) 4매(1689, 1783, 1854, 1879)가 있어 향교 역사를 규명하는데 신뢰감이있다. 창평향교 대성전이 현재의 모습으로 안착된 시기는 성묘중 수기(聖廟重修記, 1689) 분석결과 1600년대 후반으로 여겨진 다.특히보수당시백성에게전혀경제적부담을주지않고대 성전이 복구되는 당시의 사회성(경제, 문화, 수령의 관심도 등)이잘나타나있다. 【예술성】 대성전은 현(縣)고을 소설위(小設位) 위계에 맞게 규모나 치장 등에서 장대하거 화려하지 않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당 건축의 규범은 타 향교 못지않게 잘 갖추고 있다.특히 공포는 향교 건축에서 보기 드문 헛첨차를 둔 주심 포 양식이다. 헛첨차 부재가 있으므로 상부 제공살미는 소로 받침 높이만큼 간격이 생기는데 이는 이것이 서로 붙어있는 전국 대부분 향교의 익공계 대성전과 구분이 된다. 헛첨차 구 성은 수덕사 대웅전,강릉의 객사문,송광사 하사당 등이 대표 적이고, 전남 나주향교 대성전(보물)도 창평향교 대성전 공 포와전체짜임이유사하다. 【 학술성】 강학구역은 호남지방 향교의 특징인 ‘전당후재 (前堂後齋’인데 대지가 협소한 관계로 동재와 서재가 대성전 에 매우 근접해 있어 마치 다른 향교의 동서무 위치에 있는 것 처럼보인다.따라서창평향교의전체배치모습은평면적으로 ‘□자’형과 같은 독특한 형식이며 그 중심에 대성전이 있다. 사찰로 보면 불전 앞 좌우에 승방이 있고, 앞에 누각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배치는 전남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보기힘든배치형식이다. 석탑이나 석등 등 불교관련 석재를 그대로 퇴주 초석 4개에 사용했던 대성전은 조선시대 유불교체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 나주향교 대성전 전면 뒷 간부초석10개도연화문초석으로되어있다. 창평향교 대성전은 건립과 중수 이력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고, 특히 공포형식에 독특성이 있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므 로 현 지방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가치가 충 분히있다고판단된다. 【역사성】 창평향교의 명륜당은 대성전과 같은 역사를 갖 고있다.그리고현재의모습으로시기또한같다.특히명륜당 은 1700년대, 1800년대 등 시기별 중수 이력이 잘 드러나 있 고,고을 수령의 행동이 잘 묘사되어 있어 향교 사회사 연구의 중요한자료를제공해주고있다. 【예술성】 창평향교 명륜당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온돌방 이 없는 평면구성, 다양한 5량 가구의 구성과 합리적인 비례, 보와 도리 등 부재의 치목상태 영쌍창 등 전반적으로 다른 향 교에서 보기 힘든 특징이 있다.특히 주심포 양식은 전국 향교 명륜당 건물로는 매우 이례적이며, 대성저나 보다 오히려 헛 첨차 처리 등 포작 기술이 한 단계 높다. 비록 작은 현의 고을 명륜당이었지만 당시 수령의 지원과 고을의 솜씨 있는 목수 의뛰어난안목의결과로여겨진다. 【학술성】 향교 건축은 그 수나 분포, 그리고 역사적 중요 성에 감안하면 연구의 양과 연구자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특히 2,000년 이후 연구는 극히 미미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건 축적 특징은 거의 1980~90년대 결과다.나주,강릉,경주,전주 등 조선의 큰 도읍향교는 그간 잘 알려져 있으나 작은 현 고을 의 향교는 아직 연구의 손길이 많이 못 미치고, 있다. 그런 의 미에서 창평향교 명륜당은 새롭게 선보이는 건물로 학술적 가치가매우높다. 창평향교 명륜당은 건립과 중수 이력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고, 건축구성도 매우 남다르다. 특히 공표형식에 독특성이 있다.보존상태도양호하므로현지방문화재에서국가지정문 화재보물로승격가치가충분히있다고판단된다. 창평향교 창건 연대는 읍지(邑誌)에 1398년(정종원년)이라 고 기록되어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창평이 고려 중 기 이후부터 독립적인 현으로서 자리했고, 이는 조선 초까지 이어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 ‘일읍일교(一邑一校)원 칙’즉 모든 고을에 학교는 세우는 당시 통치 규범에 따라 1398 년 창건도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대에 완성한 븮경국대전븯 외관직제에의하면창평은형령(종5품)이파견된고을이었고, ‘동국여지승람’(1488)에도 전라도 57개 향교중 하나로 기대되 어 있다.당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 8도에 모두 329개 소의 향교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 지방 수령들이 신 왕 조의유교화정책에적극참여한결과로볼수있다. 창평향교는 성종10년(1479)에 지금의 자리, 즉 치소 동쪽 산기슭에서반대편북서쪽으로옮겼다.왜창건후100여년도 안된 시점에 향교를 이건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전 에 의하면 호랑이 출몰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원 자리는 당시 치소의 오른쪽에 있는 목맥산(木麥山)골로 지금도 마을 주민 들은 그곳을 향교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목맥산은 매우 산 세가 깊고 험난하다.한편 이 시기는 1479년 현의 복현 시기와 맞물리므로 이 과정에서 새롭게 향교 이건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명륜당 중수당시 발견된 상량문에는 1582년 2월2일의기록이있어상고해보야야할것같다. 향교의 장소적 특징 중 하나는 이건인데 특히 17~18세기에 가장많다.이는임란시많은향교가소실되어새로좋은장소 로 옮겼고, 이외 풍수적인 사유(서향, 선비가 나오지 않음)과 현실적인 수재, 소랑이 출몰 등도 이건 사유가 됐다. 1회정도 는보통이고많게는5번옮긴향교도있다. 전국의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창평향 교도그중하나가되었다.당시어떤건물이그피해가어느정 도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다만 ‘성묘중수기(1689’에 1 620(광해 1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임란 시 파괴 된건물(대성전)의보수가있었던것으로보인다. 1658년(효종9)현인 인걸(仁乞) 등이 전패(殿牌)를 훔쳐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향교에도 어떤 일종의 변화가 있었 을 것으로 짐작되나 자세한 건축적인 상황은 전하지 않고 있 다. 1600년대 이후 창평향교 일련의 건축 사실(중수)을 보여주 는 것은 븮학교등록(學校謄錄)븯과 향교에 보존되어 있는 현판 기(懸板記)다.특히 대성전과 명륜당의 중수 내용이 현판기에 있으며 두 건물의 현재 모습도 160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령박세웅에의해향교중수가대대적으로 이루어진사실 이매우구체적으로기록되어있는데그요점을다음과같다. ○ 경신년(1620년) 보수가 개축 사실이 있고, 그 이후 대성 전이 퇴락하여 고을 선비들의 한탄이 있음, 당시 보수는 임란 시파손된부분을수리한것으로여겨짐. ○1686년 겨울 현령 박세웅 부임,벽이 갈라지고 기와가 파 손되어 비가 새고, 상량보와 서까래가 썩어가는 대성전의 상 황을 현장에서 깊이 인식하고 보수하기로 결정, 전라감사를 거처조정에상계후승낙을받음. ○1689년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향교 보수,특히 대성전의 구체적 보수 사실을 언급(전면 기둥은 존치하고 후면 기둥은 신재로교체,서까래교체,벽체보수,단청등) ○남은비용으로명륜당,동·서재,존경각,양현고도수리. ○ 고을 선비들이 박세웅 현령의 향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칭송함. 1869년 보수는 기둥을 교체할 정도의 큰 중수로 여겨져 이 때현재의대성전모습이완성된것으로여겨짐.한편“자리까 지 바꾸어 놓으니 전보다 더 웅장하고” 란 내용도 있어 당시 약간의 자리 변경과 함께 규모를 키웠는지도 궁금하다. 또한 당시 보수는 그 전의 가구구조와 공포 등을 그대로 두고 부재 교체와번와,단청등으로마무리했을가능성도있다. 1780년 7월 현령 이의백(李宜白)이 창평현 수령으로 부임 후 바로 향교에 들러 명륜당의 퇴락함으로 보고 수리하기로 하였는데그내용은다음과같다. ○ 명륜당 창건이 200년이 넘었고, 퇴락한지 수 십 년 이 됨 . 겨우한모퉁이에서비를피할정도임 ○기둥과서까래보수번와공사 ○공사는한달이걸림. ○ 그간 여러 명의 현령이 부임해도 관심이 없었는데 이의 백 현령의 부임으로 명륜당 중수가 이루어짐을 매우 기뻐하 며이현령을극히칭송함. 한 달 정도의 빠른 기간에 기둥 보수와 번와 등을 마쳐 다시 웅장하고 빛이 난다고 했다. 당시 보수는 그 전의 가구구조와 공포 등을 그대로 두고 부재 교체와 번와 등으로 마무리 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륜당 창건이 200년이 넘는다고 했는데 이때 (1500년대 후반) 현재의 모습으로, 아니면 1689년 보수 시 정 착됐는지궁금하다. 명륜당 중수는 이외에도 1854년 현령 정기대(鄭基大)와 18 79년 현령 임백헌(任百憲)의 부임으로 퇴락함을 보고 중수한 기록이전해진다. 창평향교 건물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현(縣)’고을에 소 설위(小設位) 향교라는 제약된 여건에 기인한 것으로도 여겨 진다.건물규모도대성전정면3칸등장대하고화려한건물이 없다. 문묘에는 대성전, 강학구역에는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 으며, 지원 건물은 문묘 우측에 있다. 향교의 주 출입문으로 건립되는 외삼문은 본래 없었고, 문묘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건립되지않았다.대신협문식인사주문과일각대문이외삼문 과 내삼문의 역할을 했다.이러한 구성은 협소한 향교 터와 전 면의급한지형적여건에서나온것으로여겨진다. 창평향교는 지형적으로 상당히 급경사지에 위치하 고 대지는 종(從)축보는 횡 (橫)축에 조성되어 있다.제 향(문묘)과 교육구역 설정 은 경사지 입지의 규범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식으로 되어 있으나 두 구 역의 차는 1.2M로 큰 차이 는 없다. 즉 두 구역이 한데 모아있는형식이다. 강학구역은 호남지방 향 교의 특징인 ‘전당후재(前 堂後齋’인데 대지가 협소한 관계로 동재와 서재가 대성 전에 매우 근접해 있어 마 치 다른 향교의 동·서무 위 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창평향교의 전체 배 치모습은 평면적으로 ‘□ 자’ 형과 같은 독특한 형식 이다. 사찰로 보면불전앞 좌우 에 승방이 있고 앞에 누각 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 러한 배치는 전남뿐만 아니 라 전국에서도 보기 힘든 배치형식이다. 향교출입은명륜당우측아래쪽의사주문을이용하고있으 며, 그 아래로는 경사가 매우 급해 자연석 계단을 설치했다(1 987년 상황) 이 구역은 진입이 불편하여 2020년에 진입로를 일부변경했고,사주문자리에새로외삼문을건립했다. 창평향교 배치와 구역설정에서 주목되는 시설은 대성전 앞 마당의담장설치다.즉문묘의신성함을저해할수있기때문 에 대 성 전 앞 마 당 좌 ·우 쪽 , 즉 동 · 서 재 앞 에 별 도 의 담 장 을 설 치했다.이 담장이 언제 설치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부터있었을것으로보인다. 당시 유림들이 문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협소한 대지 여 건에 조성된 문묘와 강학구역의 혼재를 담장 설치로 해결했 던것으로여겨진다. 담장 구조는 현재 한와가 올려진 자연석 한식담장이다.198 7년 당시 시멘트블럭 구조였으나 후에 개보한 것이다.블록구 조 이전에는 토담이었으나 유지가 어려워 블록담장으로 1970 년대 새로 축조한 것이다.담장 높이는 1.0m로 그리 높지 않아 단순히 구역설정 역할 만 했다.담장에는 출입용 일각대문3개 를명륜당과동재,서재방향에설치했다. 창평향교는 지방교육의 현장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생 원 진사시에 246명, 문과 90명, 무과 95명, 호당 4명, 대제학 1 명, 상신 2명이 배출되어 작은 고을에서 엄청난 인재를 배출 하게 되었으니 그 중심에는 고직당 박영철과 수죽헌 조홍립 이있다. 고직당공의 본관은 밀성, 송고공 박홍정의 맏이로 명종 병 인(丙寅, 1566년) 7月5日에 전남 창평에서 태어났다. 효자로 이름을 올렸고, 학문이 뛰어나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광해군 의 폭정에 정국이 더욱 혼란하여 광해 5년 계축(癸丑, 1613) 에 극도로 가니 창평향교의 제생(諸生)과 더불어 창의(倡義) 하여 항소력간(抗疏力諫)한 바 있다. 갑자(甲子,1624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효행(孝行) 으로 강릉참봉에 이어 사옹시 봉사에 제수 받았더니 계유(癸 酉, 1633년) 문과(文科)에 올라 병조정랑, 승정원승지, 영춘 현감으로 치적을 쌓아 통정대부에 가자되었고, 향실(香室)에 들어 향실사(香室事)와 영녕전(永寧殿)의 덕종(德宗)과 예 종(睿宗)의 위차(位次)및 태종(太宗)의 휘호(彙號)로 전례 (典禮)를 명거(明據)하여 조목조목 열거하여 진소(陣疏)하 고 丁亥(1647)에 또 시폐(時弊)로써 만언소(萬言疏)를 올리 니 너그럽게 비답하시고 초피(貂皮)와 이모(耳帽)를 특사(特 賜)하여권장하셨다.(묘갈문참조) 수죽헌공의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극원(克遠),호는 수죽헌 (數竹軒). 조세흠(曺世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희인 (曺希仁)이고, 아버지는 조광복(曺光福)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충의위(忠義衛)창(昌)의딸이다. 1579년(선조 12)진사시에 합격하고,1588년 식년문과에 갑 과로 급제, 탐화랑이 되어 궐정(闕庭)에 나가 임금을 만났다. 선조가 그 풍채의 아름다움을 보고 인물을 얻었다고 감탄하 였다. 한성부참군에 제수되고,이어 사재감직장·사간원정언을 거 쳐 1590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으 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를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사헌부 지평, 병조·형조의 정랑을 거쳐 통제사의 막좌(幕佐)로 나갔 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파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1623년 인조반정 뒤에 영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 뒤에 다 시 등용되어 사섬시정·사도시정·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하고 옥당에들어가부교리가되었다. 1626년(인조 4)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여주목사가 되었 는데,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하동에 유배되었다가혐의가없음이밝혀져곧방면되었다. 그뒤나이가71세였으므로벼슬에서은퇴하고오로지교육 에 힘써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637년 80세에 우로(優老) 의특전에따라가선대부(嘉善大夫)의위계에올랐다. 고직당 수죽헌 두분의 흥학(興學)으로 창평향교는 크게 번 성하여 많은 위답과 교생이 늘어나 그 위세를 떨칠 수 있었으 며,권학(勸學)으로문행충언(文行忠言)을완성하게되었다. 뱚서원(향교)탐방 전남담양군창평향교 창평향교 전경,①대성전②명륜당③서재④동재⑤전사청⑥수련원⑦양현재⑧외삼문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교육과 교화를 위하여창건된 전남 담양 군의창평향교 대성전과 명륜당이 전라남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에서 지난해 12월 12월 대성 전이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99호로,명륜당이보 물 2100호로 문화재청으로부터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박문수 전교 가 있 어 함 께 소 개 해 본 다 . 뱚보물선정사유와특징 뱚보물지정검토의견 뱚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의지정가치 대성전(大聖전(殿)) 명륜당(明倫堂) 뱚 창평향교연혁 창건과이건 중수 뱚▶성묘(대성전)중수기(1689년,숙종15) 뱚▶명륜당중수기 뱚건물구성및배치 뱚▶강학의완성 뱚 ▶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