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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2월31일 금요일 12 (제180호) 기획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사이면서도 백의(白衣)로 의병에 나선 많은 백성들이 구국의 충 정을 보인 역사적인 한 대목이이기도 하다. 선조25년(1592)4월13일오후에부산앞바다에나타난일본침략군은14일에는부산을함락하고다음날에는동래성을함락한후파죽지세로북진하여 충주를거쳐20일만에서울을유린했다.그리고그로부터40일만에평양을점령했으며,평안도와함경도를휩쓸어전라도를제외한전국토가일본침 략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그동안 사화와 당쟁을벌이고 있던 조선왕조는 일본을 통합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침략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그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서도 동인,서인 하면서 싸우느라 아무런 대비책을세우지 못했다.왕과 조정은 서울 빼앗기고도 평양을 도망쳤다가 다시 의주까 지도망쳐압록강을건너려는생각까지하고있었다. 전국토는왜놈의발에짓밟히고국민들은살육과기아에떨었으며,나라의운명은풍전등화의위기에처해져있을때나라와민족을위해용감하게싸 우다순국한사람들,충청도,함경도,경상도에서분전하여나라와민족을구출한호남의병들의확약은대단했다.또한일본침략의예봉을면한호남지 방은부지런히농사를지어조정의관료들이나관군그리고의병들의식량을공급했으며우리를도운명나라군사의군량을보급했다. 국가군량을호남에의지했으니,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즉 호남이없으면국가도없다는것으로이같은기반을조성하는데는온전히 호남의병의 몫이었다.그리고그 가운데 회헌 박희수 선생이 있었다.그리고 회헌공은 시시각각 변하는 호남의 전황을행재소에 알리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전황(戰況)이소통되었다는점에서도대단한역할을하였기에선조임금은형조좌랑을제수한바있어소개해본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초석 다지는데 기여하고호남과행재소간전 황(戰況) 소통에 큰역할수행 회헌공이자녀들에게재산을분배하면서작성한분재기(길이7m). 맺음말 선생의휘는희수(希壽),자는덕로(德老)요호 는회헌(悔軒)으로본관은충주이다. 충주박씨는고려부정을 역임한 휘 영(英)을 관 조(貫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이후 개성소윤을 역임하고 사복시정에 증직된 8세(世)휘 광리(光 理)의 두 아들 진( 풂),소(蘇)에 이르러 참의공파 (參議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로 각각 분파 되어세계를이루고있다. 회헌공은 판서공의 후예로 판서공 휘 소(蘇)와 고령오씨 사이의 오형제중 넷째아들로 충청도 회 덕에서 태어난 찬성공 휘 지흥(智興, 1411~1489) 은 증조부가 된다. 찬성공은 1411년 고려조에 성 균 진사로 감찰과 좌랑 의천, 은산군사를 역임하 고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한 것에 격분하여 살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 와 현 광주 봉황산(鳳凰山) 아래 집을 짓고 순수 함을 보전하며 깨끗이 살았다. 그러나 학문이 뛰 어남을 알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조에 게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곧은 선비의 삶 을살았다. 조부 휘 상(1472∼1530)은 연산군 2년(1496) 2 3세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시문 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으며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백 리로 선록(選錄) 되었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신비의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려 대의를 지 키고 의로움을 실천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시 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과 조회가 깊었으며, 이조 판서에추증되고시호(諡號)는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 휘 민제(敏齊)이니 창녕 성씨(昌寧成氏) 진사(進士) 사복(士福)의 딸을 맞아 가정 경자(嘉靖庚子, 1540년 中宗 35年)에 공을 낳았는데 중부(仲父) 진사(進士) 휘 민중 (敏中)에게출계(出系)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숙취(聰明夙就)하니 종숙부 (從叔父) 사암 박순(思庵 朴淳, 諡 文忠公)이 일 찍이 칭찬해 자랑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家 門)을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이다.」라 고 하였다 점점 자라자 회재 박광옥(悔齋 朴光 玉)과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을 따라 수업(受 業)하니기대(期待)가 매우컸었다. 정축(丁丑, 1565)에 음직(蔭職)으로 후릉(厚 陵, 제2대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 참봉 (參奉)을 제수(除授)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임 진(壬辰,1592 宣祖25年) 4月에 칠치(柒齒, 倭)의 난(亂)이있어선조(宣祖)께서서행(西幸:신의주 파천)하셨다. 공이 스승인 회재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본주 목사(本州牧使: 光州를 말함)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 「적병(賊兵)이 아직 재를 넘어오 지 못했으니 각 고을을 동원하여 요해지(要害地) 를 튼튼히 지키면 막을 수 있으니 적의 허술한 곳 을 틈타 곧바로 올라 갑시다」하니 정공(丁公)이 그렇겠다 하고 완영(完營:오늘의 도청)으로 달려 가 순찰(巡察) 이광(李光)에게 강력히 말했지만 이광이 막연히 응답이 없어 정윤우는 착잡한 심 정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인심이 울분 에쌓여있었다. 공이 회재 박공(悔齋朴公), 제봉 고공(霽峯高 公) 및 재종형(再從兄) 대수(大壽), 재종칠(再從 姪) 전 감찰(前監察) 지효(之孝)로 더불어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본주(本州)에 의청(義廳)을 차 리고 고공(高公)을 추대하여 좌도대장(左道大 將)을 삼고 박공(朴公)으로 맹주(盟主)를 삼아 가동(家 뚝)60여명과 양식 80섬을 내어 모집하여 한편으로 싸움에 임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또 종 매 서 (從 妹 쉔) 해광(海光) 송제민(宋齊民),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와 함께 한쪽 동지 선 비들을 일으켜 전 부사(前府使) 김천일(金千鎰) 을 추대하여 우도대장(右道大將)을 삼아 호서의 장(湖西義將) 중봉 조헌(重峯 趙憲)으로 더불어 성세 상응(聲勢 相應)하여 양호(兩湖)를 막아낼 계획을세웠다. 이광(李洸)도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역시 군사를 내어 충성을 다하여 공주(公 州)까지 가서는 서울이 함락(陷落)되었다는 말 을 듣고 곧 명령을 내려 군사를 해산시켜 인심을 놀라게하였다. 공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곧바로 금강(錦江)으 로 달려가서 재종형(再從兄) 대수(大壽)로 더불 어 본주 신목백(本州新牧伯) 권율(權慄)을 따라 광(洸)에게 나아가 꾸짖어 말하기를, 「종사(宗 社)가 불타고 왕께서 파천(播遷)하셨는데 신자 (臣子)된 자 마땅히 적과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공의 군대 해산은 무슨 저의인가?」 하니 대수(大 壽)가 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부릅뜨고 그의 머뭇 거리는 죄를 다그치자 광(洸)이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 데 박모 형제(朴某兄弟)가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때 군사 동원이 급하게 되어 광(洸)도 어쩔 수 없이 영(嶸)으로 더불어 사만군사(四萬軍事)를 거느리고 직산(稷山)까지 갔다가 적이 용인(龍 仁)을 위협하자 광(洸)이 영(嶸)으로 하여금 먼 저 공격토록 했으니 이는 율(慄)이 중위(中衛)가 되 어 영 (嶸 )의 군 에 속 해 있 고 대 수 (大 壽 )가 율 (慄)의 참모관(參謀官)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권율(權慄)이 굳게 말려 말하기를,「적이 이미 험 한 곳을 확보하여 창졸히 치기 어려우니 조강(祖 江)을 건너가서 임진(臨津)을 막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나 광(洸)은 듣지 않고 선봉(先鋒)백광언 (白光彦)과 조방(助防) 이지시(李之詩)를 몰아 세워 가볍게 접전했다가 모두 패하여 죽고 군사 들이 지례 달아나 무너지자 광(洸)은 먼저 도망 쳐버리고말았다. 권공(權公)이 드디어 본주(本州)로 돌아와 재 거(再擧)를 도모했으나 광(洸)이 파진(罷陣)한 뒤로 인심이 느슨해져서 호응하지 않았다. 공이 회재(懷齋)와 의논하여 고을 안 자제(子弟) 500 여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띄워 정예병(精銳兵) 수천(數千: 數는 三에서 七 사이 를말함)을얻어권공(權公)에게배속시켰다. 영남(嶺南)으로 나아가 배재(梨峙) 영상(領 上)에서 크게 적을 파(破)하여 내 달으는 적을 막 아주니 호남(湖南)이 점차 편안하게 되었다. 7월 에 행조(行朝)로 부터 공에게 한성부 참군(漢城 府參軍), 군기사 주부(軍器寺主簿)를 연달아 제 수(除授)하여 은명(恩命)이 겹쳐 이르자 공이 더 욱 감격하여 동맹(同盟)에게 두루 일깨워 죽을힘 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그때 적세(賊勢)가 창궐 (猖獗)하여 도로가 막히고 끊겼는데 회재 박공 (懷齋朴公)이 군무(軍務)를 조목별로 아뢰게 되 었 다 . 9 월 에 공 이 그 글 을 품 고 지 름 길 로 곧 바 로 용만(龍灣)에 다달아 탑전(榻前)에 나아가 뵈이 니 왕께서 물으시되 「네 누구관대 위험을 무릅쓰 고 나를 보러 왔는고?」하시니 백사 이공 항복(白 沙李公恒福)이 대답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 臣) 박상(朴祥)의 손자이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네 할애비의 손자가 아니면 어떻 게이와같이할수있으리요.」하셨다. 공이 호남(湖南) 거의(擧義)에 관한 일을 낱낱 이 아뢰고 또 광(洸)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잡고 한 번도 접전(接戰)하지 않았으며 의사(義 士)를 시기하여 움직이면 문득 막아 흩어버리고 또 금산(錦山) 싸움에서 기꺼이 군사를 내지 않 아 후원(後援)이 없음으로 하여 고경명(高敬命) 부자(父子)가 진(陳)이 무너져 순절(殉節)했으 니 광(洸)의 죄는 참수(斬首)해야 하며 본주목 (本州牧) 권율(權慄)은 담략(膽略)과 의기(義 氣)가 한쪽을 막을 만 하다는 것을 갖춰 아뢰니 왕께서 깊이 받아들여 특별히 권율(權慄)을 승진 하여 순찰사(巡察使)를 삼고 박광옥(朴光玉)을 나주목사(羅州牧使)에 배(拜)하고 공에게는 형 조좌랑(刑曹佐郞)을 제수(除授)하고 또 권무과 제록 원종훈(權武科第錄原從勳)을 하사(下賜) 하셨다. 난(亂)이 차츰 진정되자 함열현령(咸悅縣令) 이 되었다. 기해(己亥) 十月二十六日에 별세(別 世)하여 주(州)서쪽 금봉산(金鳳山)갑좌(甲坐) 언덕에장사지냈다. 회헌공은 임진왜란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당시 풍부한 가세(家世)를 바탕으로 군량미를 제공하 며 가 동 (家 뚝) 60여명으로 스승인 회재 박광옥, 제봉 고경명 및 재종형(再從兄) 대수(大壽), 재 종칠(再從姪) 전 감찰(前監察) 지효(之孝)로 더 불어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본주(本州)에 의청 (義廳)을 차리고 고경명을 추대하여 좌도대장 (左道大將)을 삼고 박광옥을 맹주(盟主)를 삼아 싸움에 임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또 종매서 (從妹쉔) 해광(海光) 송제민(宋齊民), 창랑(滄 浪) 고경리(高敬履)와 함께 한쪽 동지 선비들을 일으켜 전 부사(前府使) 김천일(金千鎰)을 추대 하여 우도대장(右道大將)을 삼아 호서의장(湖西 義將) 중봉 조헌(重峯 趙憲)으로 더불어 성세 상 응(聲勢 相應)하여 양호(兩湖)를 막아낼 계획을 세우면서전열을갖추었다. 이는 당시 조선왕조 실록에 전하고 있어 옮겨 본다.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7월 19일 병자 3번 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20년>‘이조가 고경 명과 함께 의병을 모은 유사경 등의 논상을 아뢰 다’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뷺김천일(金千鎰)·고 경명(高敬命)·정운룡(鄭雲龍)·박희수(朴希壽)· 곽현(郭賢)·양산숙(粱山璹)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하는 데 대해서는 하교(下敎)를 받았고 이미 승 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즉시 정원룡(鄭元龍) 의 상소를 상고하니, 생원(生員) 유사경(柳思敬) 과 진사(進士) 박종정(朴宗挺)은 정운룡과 연명 (連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제(及第) 박광옥 (朴光玉)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초모(招募)하 여 그대로 본도에 머물고 있으며, 또 앞으로 향병 (鄕 兵 )을 규 합 하 려 한 다 합 니 다 . 이 세 사 람 은 어 떻게해야겠습니까?뷻 하니, 세 사람은 다른 예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 라고답하였다. [선조 25년 임진(1592) 7월 20일(정축)] 이유 징븡심우승븡박동량븡이광정븡양산숙븡박희수 등에 게관직을제수하다. 이유징(李幼澄)을 사간원 사간에, 심우승(沈 友勝)을 사간원 헌납에,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좌랑에, 이광정(李光庭)을 사간원 정언에, 양산 숙(梁山璹)을 공조 좌랑에, 박희수(朴希壽)를 사 포서 사포(司圃署司圃)에, 곽현(郭賢)을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에제수하였다. 그리고 민심을 이반한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 洸)을 단죄하는 상소를 가지고 행재소로 달려가 선조임금에 전하면서 이광을 단죄하고 전황(戰 況)을소통케하는큰역할을수행했던것이다. 이광의 죄상은 첫째 7~8만의 관군을 이끌고 공 주까지 올라갔지만 일본군을 막고 나아가 서울을 지켜내지 못한 점이다. 이광의 관군이 만약 서울 을 지켰다면 이후 경기를 보전하고 영남을 회복 할수있었을것인데그러지못했다는것이다. 둘째 이광은 선조가 한성을 떠나 파천했다는 소 식 을 듣 자 파 진 (罷 陣 ) 해 버 리 고 맨 먼 저 전 주 까지내려와버린것이다. 셋째 이광의 용인전투 패배이다. 적병이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겁을 먹고 후퇴를 하면서 삼도 (충청,호남,경상)의 관군이 흩어져 버려 이로 인 해 호서(湖西)와 기내(畿內)를 비롯한 지역의 민 심의이반도격화된것이다.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이 같은 이광의 죄상을 담을 소(疎)를 박광옥(朴光玉, 음성인), 박종정 (朴宗挺, 함양인), 정운룡(鄭雲龍), 유사경 등이 함께 이광의 불충한 죄상들을 조목조목 짚은 소 를 만들어 박희수로 하여금 용만(龍灣) 즉 선조 가있는행재소에올렸다고기술되어있다. 우산기사(牛山記事), 안방준 문집에는 다음과 같이기록하고있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 (錦江)에 진을 치고 있다가 뜬소문을 듣고는 진 을 파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광주 목사(光州牧 使)로 있던 권율(權慄)이 판치(板峙)에 주둔해 있다가 여러 군사들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는 자 신의 소속 군사들로 하여금 동요치 말게 한 다음, 큰소리로 이광을 힐책하니, 이광이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권율 등과 함께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재차거병하기로꾀하였다. 장성(長城)에 사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정운 룡(鄭雲龍), 광주(光州)에 사는 진사(進士) 박종 정(朴宗挺), 생원(生員) 유사경(柳思敬) 등이 항 소(抗疏)를 올려 이광이 머뭇거리면서 진격을 하 지 않은 상황을 진술하고는, 무인(武人) 박희수 (朴希壽)를 보내어 행조(行朝)에 진달하게 하였 다. 당시에 정승으로 있던 해원군 윤두수는 바로 박종정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 박종정이 해원 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본도의 감사를 만 약 행 조 에 서 제 수 해 보 낸 다 면 , 한 달 안 으 로 는 이 곳 까 지 오 기 가 쉽 지 않 을 것 입 니 다 . 도 내 의 수 령 가 운 데 에 서 는 오 직 권 율 만 이 담 략 과 기 략 이 있 습 니 다 . 이 사 람 보 다 더 적 임 자 는 없 습 니 다 . ” 하 였 다 . 회헌공께서 전한 상소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 는다. 즉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전하께서 피난 하신 행재소에 도착했으니 이날부터 호남지방 과 함경북도의 소식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호남지 방의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 근왕병에 대한 소 식을 몹시도 고대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러한 때에 회헌공이 호남의 소식을 전했으니 전황 (戰況)의 소통이 이루진 것이다. 선 생 이 일 찍 이 가 정 교 훈 을 받 고 겸 하 여 스 승 과 벗 의 도 움 을 얻 어 뛰 어 나 고 기 위 ( 寄 偉 ) 한 기 질 로 곧 고 겸 손 한 지 조 가 있 어 벼 슬 이 내 려 도 나 가 지 않 고 어 지 러 운 세 상 을 만 나 의 병 을 규 합 ( 糾 合 ) 하 여 주 진 ( 州 鎭 ) 을 방 어 하 고 마 침 내 또 위 험 을 무 릅 쓰 고 왕 을 따 라 적 정 ( 賊 情 ) 을 갖 춰 보 고 드 리 고 흩 어 진 군 사 규 율 을 잘 바 로 잡 고 쓸 만 한 인 재 ( 人 才 ) 를 천 거 하 며 정당한 논의(論議)를 다하여 크게 구제함 이 많았으니 어찌 꼭 칼을 꺾고 진(陣)을 함락시 켜서만 비로소 공업(功業)을 논(論)할 것인가! 공의 이를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우연한 일 이 아니다 조부 문간공(文簡公)과 종숙부 문충공 (文忠公)이 의리(義理)를 창명(倡明)하고 명행 (名行)을 힘써 세도(世道)를 일으켰으니 그 후손 의 선범(先範)을 복습(服習)함이 근원이 있음이 니어찌대단하지아니한가. 호남지방을 보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 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니 호남이 없으면 국가 도 없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 家)의 교훈을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기에 선생의 행적은더욱아름답다. 회헌(悔軒) 박희수(朴希壽)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와생애 만력20년(1592년)7월20일계공랑참봉박희수를계공랑한 성부참군에임명하는교첩 만력20년(1592)9월16일군기시주부박희수를선무랑형조 좌랑(정6품)에임명한교첩. 만력20년(1592) 7월22일한성부참군박희수를선무랑사포 서사포(정6품)임명된교첩. 회헌공박희수묘소,광주광역시서구용두동. 임진왜란과회헌박희수 문간공파종중박종률회장이눌재회관4층자료실을찾은원파박수섭선생에게분재기를보여드리고있다.